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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 땅은 하나님의 것” (에스겔 45장)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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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4월 07일 (일) 17:36:32 [조회수 : 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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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 땅은 하나님의 것” (에스겔 45장)

 

0. 에스겔 45장 요약

 

제사장의 책무와 그에 따른 기업을 전하는 44장에 이어 45장은 왕과 백성의 책무와 그에 따른 기업(땅)의 분배를 전한다.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은 ‘땅은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는데 있다. 모든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를 전하는 창세기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요한계시록까지 성서를 관통하는 근본정신이다. 에스겔이 전하는 메시지도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고백하는 데 있다. 사람의 지식과 힘이 하나님 노릇하는 시대, 돈과 명예가 왕 노릇하는 시대에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며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예배)하는 삶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모든 삶(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놓치면 소중한 삶을 헛된 물질에 허비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삶의 기반이 되어 주신다.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물질의 노예로 탐욕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다. 신명기 6장 일명 쉐마가 전하는 정신 또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지 말라는 경계에 있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최고의 가치에 두고 섬기며 살아가라는 명령이다. 쉐마를 삶의 원칙으로 삼아야 비로소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에 삶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십일조와 안식일의 정신 곧 땅(생산수단)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이들에게 삶의 행복과 풍성함을 보장 하시겠다는 변함없는 언약이다.

 

 

1. 땅은 하나님의 것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

 

➀ (1절 전반부)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

▶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께 속한 백성(ό λαος του θεου)들을 가리킨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λαος)인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증거가 바로 예배(경배)다.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잠언16:33)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땅을 분배하는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이다. 땅은 삶을 위한 기업과 생산수단을 통칭하는 은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배(경외, 예배)하는 백성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보증(guarant)이다. 이집트 노예들의 기업(생산수단)은 파라오였다. 충성과 노동의 보상으로 의식주를 제공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출애굽기 8장과 9장에 반복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백성들의 기업이 되시겠다는 보장이다.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예배자로의 존재적 변화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기반이 되어 주신다는 말이다.

 

➁ (1절 후반부)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 백성들을 위한 땅을 나누기 전에 먼저 거룩한 땅을 구별하여 예물로 드릴 것을 명하시는 까닭은 삶의 우선순위를 증거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나중에, 남은 것, 모아둔 것이 아니라 즉시, 온전히, 기쁘게 드려야 한다.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강요나 수단이 아니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하는 믿음의 선택이며 그에 따른 고백이다.

 

③ (마6장25절~33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본문의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라는 차원에서 동일하다. (출16: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모아둔 진짜 이유는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었다. 오경에 반복해서 전하는 ‘안식일(안식년, 희년)의 준수’와 ‘온전한 십일조(구별된 예물)의 강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백성에게 생산수단을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의 척도다.

▶ 구약의 십일조는 신약의 연보로 포괄되었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주님의 날(the Lord's day)’로 정해 안식일의 정신을 지켜왔다. 안식일의 정신을 주님의 날로 지켜서 하나님의 주신 삶임을 기억하고 십일조의 정신을 연보에 담아 나에게 부여된 모든 생산수단이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십일조든 연보든 간에 그 규례에 담긴 정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의무라는 점은 변함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소유)’이라는 고백은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의 노예로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자신을 경계하는 유용한 도구인 까닭이다. 안식일과 십일조의 정신을 여전히 지켜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 삶의 우선순위 (삶은 어디서 오나?)

 

➀ (4절~8절)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고...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나눠 줄찌라”

▶ 땅을 구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나누는 순서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소’와 ‘제사장’, ‘레위인’, ‘기지(공유지)’, ‘왕’, 그리고 ‘나머지 땅을 그 지파들에게’ 차례로 나누고 있다. 성소를 중심으로 밖으로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다. 특권이나 지위에 따른 순서나 배치가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이 원리를 거꾸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 원리를 복원하는 데 있다. 신대륙개척자들인 청교도들이 교회를 먼저 세우고 정착했던 삶의 방식과 전통적인 유럽의 도시들이 광장과 중앙에 교회를 세운 모습이 실 예다. 백성들에게 지파별로 땅을 나누는 장면은 이후 48장에 자세히 기록된다.

 

➁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의 정신은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곧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만을 최고의 가치로 섬기며 살아가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유혹하며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을 물리치실 때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마4:10)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쉐마를 삶의 원칙으로 삼을 때 하나님의 주신 소중한 삶을 물질과 명예, 권력과 쾌락에 빼앗기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가 바로 ‘예배(경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최우선에 가치에 두는 쉐마는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변함없는 교육철학이다. 자녀들을 위해 물질적인 풍요를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은 복이 아니라 독이다.

 

③ (겔 47장 12절)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 왜 성소로부터 백성들의 순으로 분배하는가?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성소로부터 나온 물이 강이 되고 바다로 흘러가며 생명을 공급하는 장엄한 비전을 통해 생명(Life, 삶)이 성소로부터 흘러나옴을 증거 한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모든 삶(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삶은 예배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존재가 의식을 결정 한다’는 신념으로 산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의 원리인 사적 유물론과 자본주의의 원리인 물질만능주의는 샴쌍둥이다.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물질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 한다’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창조신앙과 진화론’, ‘유물론과 관념론’, ‘무신론과 유신론’,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왕과 백성의 책무

 

➀ (9절~12절)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과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찌니라”

▶ 백성들의 치리자인 왕의 본분은 관리자인 청지기(steward)다.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 받은 섭정(攝政:regent)일 뿐이다. 백성들은 우상숭배로 도탄에 빠지고 치리자인 왕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만 급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삶의 기반이 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분을 망각해서 벌어진 참담한 결과물이다. 부정한 저울과 불공평한 추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소위 경제민주화로 대변되는 공평과 공정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를 실현하는 것이 ‘왕의 본분’ 곧 위임받은 왕의 책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왜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물은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만 특권층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➁ (13절~17절)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로 이스라엘 왕에게 드리고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 왕과 백성의 새로운 역할과 책무를 규정한다. 백성은 왕에게 예물을 드리고 왕은 그 예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떠나 우상숭배를 자행했고 왕은 백성들을 강포하고 수탈하는데 급급했다.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이제 백성과 왕의 역할이 달라진다. ‘이 땅 모든 백성은...왕은 본분대로’ 백성과 왕의 본래적인 사명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경배 곧 예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겔34:23) ‘내 종 다윗을 보내리니’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을 가리키는 은유다. 하나님의 통치로 새롭게 세워질 왕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예배의 주관자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에 참된 중보자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통치를 예표 한다.

 

4. 속죄제와 유월절

 

➀ (18절~20절) “정월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모든 그릇 범죄한 자와 부지중 범죄한 자들을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속죄할찌니라”

▶ 정월 초하룻날(유대력이 시작되는 아빕월)에 성소와 죄인을 정결케 하는 속죄제를 먼저 드릴 것을 명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긍휼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길 곧 예배의 참된 자세는 긍휼과 회개뿐이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예배의 본질은 희생 곧 자기부인이다.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과시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 될 뿐이다.

▶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예배를 오용해서 잘못 드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십일조와 안식일의 규례에 대한 형식적인 논쟁 보다 그 규례가 전하는 내용을 밝히고 그 정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 즉 ‘온전함’에 힘써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이든 신약의 연보이든 그 정신은 하나다.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고백이다.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든 신약의 주일을 지키든 그 정신도 하나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와 그 뜻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고백이다.

 

➁ (21절~25절)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 (신16:1)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유월절로부터 아빕월이 시작된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머리와 내장과 정강이를 불에 구워 먹고 나머지는 태웠다. 죽음의 사자로부터 출애굽의 구원을 누린 유월절 사건은 구약에서 제시된 모든 예배의 시초이자 표상이다.

▶ (신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희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유월절의 핵심은 기억(기념, Memorial)이다. ‘과거’에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지금’ 이 순간에 기억하는 것이다. 죄악으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능력은 나의 공덕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눅12:1) ‘그 동안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누룩 없는 떡에 담긴 메시지는 뭘까? 예수께서 고발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외식’이다. 외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드러내는 신앙행위를 가리킨다.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과시로 드려진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도리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멸시(무시)하는 일이다. 자기자랑과 자기영광을 위해 외식하는 신앙행위(예배, 기도, 찬양, 봉사, 헌금 등)는 제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가인의 제사처럼 결코 하나님께 열납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모든 신앙행위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날마다 중심을 그분 앞에 반듯하게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넘어 변함없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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