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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분노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었는가?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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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4월 06일 (토) 07:33:42
최종편집 : 2019년 04월 06일 (토) 11:08:30 [조회수 :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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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동안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독자들과 함께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인간들로 인해서 당신의 의가 훼손되었다는 데에 분노했고 예수는 그 훼손된 의를 보상하기 위한 속죄 제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노하신 하나님께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 드린다고 그분의 화가 풀렸을까? 노한 하나님에게 당신의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그분의 훼손된 의에 대한 보상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분노하게 할 만한 일 아닌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노한 분이 당신의 아들을 속죄 제물로 요구하셨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다.

이제 논리적인 것보다도 성경으로 들어가 본다.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하는 하나님이었다. 노아 시대에 홍수로 인간을 멸한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멸망시킨 것은 분명 분노의 표출로 보인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사이 이스라엘이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분노하사”(신 9:19) 삼천 명 가량의 우상 숭배자를 죽이라고 명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이 질투하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는 분이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신명기에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를 벌하겠다는 언급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는 이스라엘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라고 명령하는 잔혹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는 이방 나라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겨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분노하고 벌만을 내린 분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해서 애굽에서 해방시키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신을 떠나서 우상을 섬길 때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적극적으로 권면하다가 영 돌리키지 않을 때 이방인의 손에 넘긴 것은 일종의 사랑의 매였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속죄 제물을 드리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06편에서 당신을 실망시키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오래 참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우리는 보통 구약의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신약의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지만, 아버지처럼 때로 노하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엄한 하나님이었다.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자녀들이 엉뚱한 길로 나갈 때 노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며 애끊는 마음으로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은 악을 행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집을 나간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애끓는 사랑에 비유하셨다. 이 때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용서하는 아버지는 오히려 자애로운 어머니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낸 신약의 하나님이 당신을 거역한 인간에게 분노해서 손상된 당신의 의에 대한 보상을 받기 원했다고 하면, 그것은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을 왜곡하는 일이다. 혹시 구약의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그런 보상설이나 만족설을 내세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분노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은 신약의 사건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진 제물이었다고 믿는다. 이 대속 제물의 원형은 구약에 나오는 속죄 제물이다. 그러나 구약의 속죄 제물과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는 아주 다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조건으로 속죄 제물을 요구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속죄 제물을 바치라고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속죄 제물로 삼았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준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살을 깎는 고통을 감수한 것이다. 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보상을 받으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따라서 보상 이론은 신약성경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분노를 해소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독 아닌가?

나는 김균진 교수의 글에서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래서 그 답을 <당당뉴스>의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그의  『예수와 하나님 나라』(새물결플러스, 2016)에 나오는 <속죄 제물 사상의 새로운 해석과 수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 * * * * * * * * *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이 그의 훼손된 의에 대하여 분노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필요로 하며, 예수는 하나님의 의를 보상함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는 ‘속죄 제물’이라고 해석하였다. 속죄 제물 사상은 두 가지 원칙에 입각한다.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체계화시킨 원죄론과 법적 보상의 사상에 입각한다. 원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의를 무한히 훼손하며, 의의 훼손은 벌을 불가피하게 한다. 이 벌을 면하기 위하여 보상 곧 속죄 제물이 하나님에게 바쳐져야 한다.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속죄 제물은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이 같은 속죄 제물 사상은 철저히 법적 사고에 근거하며, 안셀무스는 법적 사고에 따라 속죄제물 사상을 보상설 혹은 만족설로 발전시켰다. 법적 사고에 근거한 속죄 제물 사상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신약성서의 고백에 모순된다. 그것은 무한히 용서하는 은혜로운 하나님과 죄에 대하여 분노하며 제물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대립시킨다.

이에 대해 오늘의 신학은 이렇게 비판한다.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무한히 용서하는 하나님이 왜 속죄 제물을 요구하겠는가? 자기의 훼손된 의를 회복하고 인간을 용서하기 위하여 제물을 요구한다는 속죄 제물 사상은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의 가르침과 연결되지 않는다. 예수가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용서를 선포하였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의 죽음을 죄 용서를 위한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법적 범주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범주에서 예수의 죽음을 “속죄 제물”의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 본회퍼가 그의 『저항과 복종』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의 존재는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예수는 타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를 축복하며, 그의 구원을 추구했다. 그의 사역은 “네가 이웃에게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주어라”는 “황금률”의 실천 자체였다. 우리 인간은 황금률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한다. 그래서 “내가 네게 바라는 대로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다. 예수는 이 인간에게 자기를 내어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아들을 내어줌으로써 인간에게 자기를 내어준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상대가 자기를 내어줄 것을 기대하는 인간에게 예수가 “자기를 내어줌”인 동시에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아니라, 죄악 된 인간의 기대와 요구에 응하여 하나님이 내어주는 제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계시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의 고통 속에서 자기를 내어주면서 죄악 된 인간을 용서한다. 그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는 용서할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을 보임으로써 인간을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예수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울”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거울”이다. 예수를 죽이는 로마와 유대교의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스승을 부인하고 버리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의 심연을 보는 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예수에게서 인류의 죄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본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훼손된 의를 보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불되어야 하는 법적 의미에서의 속죄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영 가운데서 무한히 용서받는다는 뜻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제물”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훼손된 의에 대한 “보상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무한히 고통을 당하면서(탕자의 아버지와 같이)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의 속죄 제물 사상의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속죄 제물을 받고 만족스러워하며, 속죄 제물을 “조건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분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 상은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모습과 매우 다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 자신이 제물을 마련하고 내어주며 제물이 당하는 죽음의 고통을 영 가운데서 함께 겪는다. 그는 고난당할 수 없는 신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신이다. 그는 “지배하는 전능한 아버지”, “무감각한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한한 사랑의 영 가운데서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당하는 어머니와 같은 신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속죄 제물 혹은 희생제물이라는 데에 대한 이해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은 신약성서 후기문헌에 분명히 나타난다. 이에 관한 요한문서의 증언들, 예를 들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라는(요일 2:2) 구절은 후기 기독교 공동체의 매우 공식화된 신앙고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최초의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는 일찍부터 예수의 죽음을 속죄 제물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다.

그 증거를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려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요”(행 3:18-19). 따라서 속죄 제물로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후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증언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예수 자신은 자기의 죽음을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는(막 10:45; 마 20:28)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 구절이 예수가 말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인지, 우리는 증명할 수 없다.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들도 공관복음서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속죄 제물로 죽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제자들의 신앙에 불과한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에서 일어난 예수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에 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삶에서 적어도 최소한의 암시를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을 속죄 제물의 죽음으로 중언하였을 것이다.


마치면서

교리란 인간이 자신의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만들어낸 이론이다. 위에서 언급한 보상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의 안목은 시대마다 다르고 거기에 따라서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이에 관련해서 복음주의 신학자 버나드 램의 말은 귀 기울일 만하다. “고고학, 철학, 역사학은 계속해서 구약과 신약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한다. 이 풍성한 지식과 더불어 더 세심하고 정확한 주해가 나온다. 그래서 주해는 어느 선까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보상으로 보는 견해는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데 지금도 교부시대의 법적 보상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아직도 교부시대의 보상론에 집착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지나친 보수성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유물론이나 과학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심지어 근본주의 신학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까지도 새롭다고 해서 무조건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을 보고 놀라는 격이다.

옛 것에 무조건 집착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새로운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진 마음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읽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더 성격적이냐 하는 점이다.

실상 우리는 분노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왔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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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218.153.165.20)
2019-04-06 15:54:04
예정, 주관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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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4-06 10:16:10
김균진式 논리 전개에 대한 다른 시각
김균진은 “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데 하나님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용서와 사랑의 측면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는 결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하게 옳다고도 볼 수 없다.

新約의 하나님은 결코 분노를 거둔바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舊約에 비해 新約에서 압도적으로 풍부하게 언급된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분노’의 측면을 애써 무시하며 접근한 논리가 아닌가 하고 여겨진다. 新約에도 ‘하나님의 분노’가 분명히 있다.

김균진은 <그럼 예수 자신은 자기의 죽음을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는(막 10:45; 마 20:28) 말씀은 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 구절이 예수가 말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인지, 우리는 증명할 수 없다. 예수의 말씀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들도 공관복음서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식의 접근이라면 新約에 ‘하나님의 분노’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언급한 것 역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의도적인’ 신앙고백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누가복음은 19장 11절~27절에는 ‘하나님의 분노’가 비유로 적시되어 있다. 주인이 하인에게 10원을 주고 장사를 시켰는데 어떤 하인은 10원을 100원으로 불리고, 어떤 하인은 10원을 그냥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돈을 10배로 불린 하인은 칭찬하며 상까지 내리고, 돈을 그냥 가지고 있었던 하인은 심히 질책하고, 그로부터 10원을 반환받아 돈을 불린 하인에게 덤으로 주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종들을 부려먹은 다음 그 결과가 나오자 그때에야 주인이 돈을 종에게 맡긴 이유를 알 수 있게 하였다... “But those enemies of mine who did not want me to be king over them-bring them here and kill them in front of me."라며 敵意를 표출하고 있다.

즉 주인의 명을 명시적으로 거역하지 않았을지라도 주인의 心氣(참뜻)를 헤아리지 못한 게으른 종은 결론적으로는 주인을 王으로 섬기지 아니한 대역죄를 범한 것이므로...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눈치가 빨라 주인의 심기를 잘 헤아리는 종은 칭찬은 기본이고 보너스에다 특별보너스까지 받고, 눈치가 느려 주인의 심기를 헤아릴 줄 모르는 종은 야단은 기본이고 땡전 한 푼 없이 졸지에 주인의 원수가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누가복음은 19장 11절~27절에 적시되어 있다.

舊約에 비해 新約에 ‘하나님의 사랑’ 측면이 많이 언급되었다고 하여 ‘하나님의 분노’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하나님의 心氣(참뜻)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눈치가 느려 주인의 心氣(참뜻)를 헤아릴 줄 몰라 졸지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죽임을 당하는 비유를 그냥 흘려버릴 수 있을까? 단지 풍부하게 언급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즉 ‘하나님의 사랑’이 보다 많이 언급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가볍게 볼 수 있을까?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신약성서의 고백에 모순된다.> 라고 한 김균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舊約과 마찬가지로 新約의 “하나님은 사랑뿐만 아니라 분노다.”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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