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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장난친 교회개역개정판 성경은 '누더기 성경'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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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3월 17일 (일) 14:45:38
최종편집 : 2019년 03월 20일 (수) 00:35:05 [조회수 : 9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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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비교적 잘 번역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반대로 일부에서는 아예 형편 없는 졸작이라는 극평도 있다.

나는 극단적이고 싶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 한글 성경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 아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한글 번역보다 더 정확하게 성경 원어에 충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영어 성경 수준 정도라도 좋은 한글판을 못 만들까. 나는 이게 한글이 영어보다 표현력이나 어휘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은 번역 기관의 자질과 지속적인 노력이 크게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동안 번역 저작권으로 큰 돈을 벌었슴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너무 부실하다는 지적이다.

개신교 일각에서는 현재의 한글 개역개정판은 적어도 1만개의 크고 작은 번역 오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것을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우선 치명적인 오류 세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천국을 '침노'하라는 건 황당한 오역

아래에 마태복음 11장 12절에 대한 한글 번역을 비교했다.

[개역개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많은 설교자들은 이 구절을 읽고 "천국은 스스로 침노하는 자가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천국을 침공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는 물론 아주 크게 틀린 해석이다. 그럼에도 이 경우 설교자들을 너무 탓할 수가 없다. 이건 근본적으로 번역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번역이 더 정확하다.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이 번역을 보면, "천국을 폭력으로 강탈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폭력으로 천국을 얻으려는 것은 나쁜 짓이다."라는 의미다. 아래의 영어 성경을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KJV]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NASB]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여기를 보면 "천국이 폭력(violence)으로 침범하려는 자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결국 성경 원문의 가르침은 "천국을 폭력으로 얻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이를 오해하여 "천국을 공격적으로 침노하라!"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무지한 것인가.


성경엔 "영적 예배"가 없다

로마서 12장 1절 번역을 아래에 비교했다.

[개역개정]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부분도 전혀 엉뚱한 번역이다. 오히려 새번역이 더 바람직하다.
     
[새번역]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영어 성경 역시 "reasonable service(합리적인 예배)"로 더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KJV]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e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un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내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점은 왜 굳이 "합리적인 예배"를 그대로 직역하지 않고 "영적 예배"라고 바꾸어 엉뚱하게 번역을 했냐는 점이다. 세상에 '영적 예배'가 따로 있고, 아니면 거꾸로 무슨 '육적 예배'라도 별도로 있다는 말인지 참으로 무책임한 번역이다.

요즘 어떤 목사들은 이 "영적"이라는 말을 너무 남용한다. 신앙을 너무 종교화하려 한다. 그리고 이는 세상을 극히 이원론적으로 보는 발상이다. 성도 자신은 이미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의 신분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에 무슨 영적 또는 육적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성도에게는 교회당 예식만 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삶이 더 중요한 예배다.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 1절은 오늘날 가장 문제가 많은 번역 중에 하나다. "심판하지 말라"를 "비판하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다. 고의로 성도들의 비판 기능을 무력화하도록 유도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 흔한 영어 성경조차 제대로 참조하지 않고 번역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개역개정]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전체적인 문맥상 이 부분 역시 새번역이나 영어 성경이 더 정확하다. 신구약 성경은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갑자기 비판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가?     
    
[새번역]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NIV]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KJV] "Judge not, that ye be not judged."

상황이 이렇다보니 요즘은 함부로 한글 성경을 인용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잘못된 번역을 가지고 일점일획도 무오한 '하나님말씀'이라고 홀로 목소리 높~여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이 외에도 의도적으로 성경 원문의 '경배'를 대부분 '예배'로 바꾸어 교회당 중심 생활을 유인하고, 본래는 이웃과 나누는 '연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란 용어로 바꿔치기한 것도 모두 시정해야 옳다고 본다. 특히 불과 500년 전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새로 만든 '목사(원어에는 목자)'라는 직분의 용어를 한글 성경에 무리하게 삽입한 것 또한 억지 번역이다(엡4:11).

개역개정판 성경이 별로 개선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저작권 종료 시한을 앞두고 졸속으로 작업한 결과라는 비판이 크다. 오죽하면 그 성경의 별명이 '누더기 성경'일까.

중세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장난친 교회였다. 소위 성직자란 사람들이 라틴어 성경을 독점하여 번역에도 문제가 많았고 그 해석과 가르침은 더욱 엉터리였다. 그 결과는 교회의 극심한 부패였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에겐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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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33.231)
2019-03-17 22:05:08
아는게 없으면 용감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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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0
신성남 (49.50.206.22)
2019-03-20 05:46:53
댓글로 귀한 의견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저의 보충 의견을 추가하고자 합니다.

1. 성경 원어엔 특정 단어가 2-3 가지 다른 의미가 있을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비판'이나 '심판'의 헬라 원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영적 예배'와 '합리적인 예배'
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 둘 중에 아무 것으로나 선택해도 큰 하자가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까요? 아니지요! 그건 아마추어나 할 소리이지요.

"전문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 뜻이 있기에 그 문맥에 따라 더 고심하고 신중히 가장 적합한 단어로 택하여 번역해야 마땅합니다. 하필이면 문맥에 안 맞거나 본의를 왜곡하는 단어를 골라 번역했다면 당연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마7:1의 경우 아무리 보아도 "심판하지 말라"가 더 정확한 번역인데 이를 굳이 "비판하지 말라"고 번역한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그러니 이건 의도적인 왜곡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의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2. 천국을 '침노'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당 구절의 원어가 문법상 문제가 있다면 이를 더욱 조심하여 적어도 전통적으로 인정받던 영어 성경이라도 좀 참조하여 "천국이 폭력(violence)으로 침범하려는 자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내용으로 번역했다면, 굳이 이를 원어의 문법 논란으로 변명하지는 않아도 될 것입니다. 현재의 번역은 누가 봐도 어설프고 성경의 진의를 거꾸로 해석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3. '연보'냐 아니면 '헌금'이냐의 논점은 기록 당시 그것이 사람과 나누기 위해 걷었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었냐가 핵심입니다. 하지만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 돈을 직접 바치는 헌금' 행위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웃을 구제하고 나누는 모금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돈 바치는 행위로서의 '헌금'이나 또는 '봉헌'이란 번역은 적절치 않고, 차라리 과거에 사용하던 '연보'나 또는 '모금'이란 번역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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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1
김경환 (222.100.38.174)
2019-03-19 00:34:29
로기코스(logikos)의 경우 영적인 예배보다는 합리적(합당한) 예배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로기코스는 주로 합리적(합당한)이란 뜻으로 쓰인다. 영적이란 뜻은 있기는 한데 잘 쓰이지 않는다. 주로 쓰이는 <합리적(합당한)>이란 뜻을 놔두고 별로 쓰이지도 않는 <영적>이란 단어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脈絡上 합당한(합리적) 예배로 번역하는 경우 전달이 잘 안되어 어쩔 수 없이 次善으로 영적인 예배로 번역하였다면 백번 수긍하겠으나 멀쩡한 합리적(합당한) 예배를 놔두고 굳이 영적인 예배라고 번역할 필요성이 있었는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잘 쓰지도 않는 用例를 가져와 그 무엇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듯하니... 이래서 ‘성경으로 장난친 교회’라는 지탄까지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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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6
변영권 (203.236.91.189)
2019-03-18 22:38:17
3. 연보

"연보"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전부 같은 단어에서 번역된 것인지, 애초에 개역성경에서 "연보"라고 번역한게 맞는 것인지, 그걸 "헌금"으로 바꿨을 때 앞뒤 문맥에 따라 어떤 의미인지는 좀 읽어보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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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서 15:26

연보 : 코이노니아 - 참여, 나누어줌, 친교, 교제, 자선품이나 기부금 / KVV, NIV : collection

(개역개정)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새번역)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2. 고린도전서 16:1-2

연보 : 로기아 - 수금, 기부금, 세금 / NIV : collections

(개역개정)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새번역) 1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2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3. 고린도후서 8:2

연보 : 하플로테스 - 관대한 마음으로 베푼 것, 선물 / NIV : rich generosity / KJV : riches of their liberality

(개역개정)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새번역)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4. 고린도후서 8:20

거액의 연보 : 하드로테스 - 풍성한 선물 / NIV : liberal gift / KJV : abundance

(개역개정)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새번역) 우리가 맡아서 봉사하고 있는 이 많은 헌금을 두고,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조심합니다

5. 고린도후서 9:5

율로기아 - 축복(의 선물) / NIV : generous gift / KJV : bounty

(개역개정)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그 형제들에게 청하여, 나보다 먼저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이 전에 약속한 선물을 준비해 놓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선물은, 마지못해서 낸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마련한 것이 됩니다.

6. 고린도후서 9:11

연보 : 하플로테스 - 관대한 마음으로 베푼 것, 선물

(개역개정)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새번역)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7. 고린도후서 9:13

연보 : 하플로테스 - 관대한 마음으로 베푼 것, 선물 / NIV : generosity in sharing / KJV : liberal distribution

(개역개정)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새번역)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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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1
변영권 (203.236.91.189)
2019-03-18 22:37:16
2. "영적 예배"

이건 그냥 사전만 찾아봐도 왜 "영적 예배"로 번역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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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코스 logikos : 말씀의, 이성적인, 영적인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형용사 로기코스(Aristot., 이래)는 로고스($3056)에서 유래했으며,

(a) '말에 속한, 말씀의'

(b) '이성에 속한, 이성적인, 합리적인'을 의미한다. 사람은 조온 로기 콘 즉 '이성적 존재'이다(Epictetus, Dissesrtations, 2, 9, 2; M. Ant., 2, 16, 6; Philo, Abr. 32, 이 곳에서 '영적인'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2. 신약성경의 용법.

형용사 로기코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로마서(롬 12:1), 베드로전서(벧전 2:2)에만 사용되었다.

(a) 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개역표준성경(RSV)은 로기코스를 'spiritual' (영적인, 한글개역: "신령한")으로 번역한다.
베스트(E. Best)는 이 의미를 '말씀의'(of the word, AV), 혹은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의미인 '합리적인, 이성적인' rational이라는 의미보다 더욱 선호한다. 그가 말씀의(of the word)라는 의미가 이 문맥에 적합한 의미라는 사실을 인정할지라도 그러한 것이다(참조: 벧전 1:23이하; 약 1:21). 베스트는 '합리적인, 이성적인'(rational)이란 의미가 롬 12:1에는 적당하다고 생각을 하나 그것이 벧전 2:2에 적합한지를 고찰하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갖난 아이들의 음식인 젖과 먹음으로써 성숙해지는 합리적인 말씀(참조: 2절하반절)과의 사이에 의도적인 역설(paradox) 또는 대조가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가능하다(참조: 20절). 킷텔(G. Kittel)처럼 베스트도 이곳과 롬 12:1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spiritual)이란 의미도 택하는데, 그는 영적인 즉 비물질적인 희생제물을 임시하는 후기 영지주의 문서들에 이것의 병행구가 있다고 본다(Corp. Herm).

프뉴마(프뉴마티고스, 벧전 2:5)의 수준에 있는 "집"과 "제사"는 로고스(로기코스, 벧전 2:2)의 수준에 있는 "젖"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두 단어의 병행적 사용은 로기코스가 제의의 영성화를 표현한다고 본다(참조: G. Kittel).

(b)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개역표준성경(RSV)에는 롬 12:1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는 데에도(한글개역과 같이) "영적인"(spiritual)이란 의미가 사용된다. 여기서도 로기코스가 제의의 영성화를 표현한다고 본다. 로기코스는 바로 이러한 기능으로 사용되었는데, 우리의 몸을 희생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예배로 드려야 한다(참조: 벧전 2:5). 유대교에서도 역시 제의를 도덕적으로 영성화(spiritualizing) 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론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있으며(롬 12:1), 로고스와 일치되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놓여 있다(참조: G. Kittel).

참조: 로기코스가 '영적인' (spiritual)과 '이성적인'(rational)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또한 이 두 가지의 부대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롬 12:1과 벧전 2:2에서 선택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 바울은 동시에 영적이며 이성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카리스마적 예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롬 12장의 문맥에서 바울은 은사라는 주제로 되돌아가고 있으며(롬 12:6이하, 참조: 롬 12:3이하) 이성적이며 실제적인 말로 드리는 예배의 필요성은 롬 8장에 나오는 카리스마적 예배에 대한 그의 논법과 대응되는 것 같다(C.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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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한 단어가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런 번역이 나온겁니다. 그 중 로마서 12:1절의 번역은 쉽게 말해서 "육적인 예배 - 실제로 제물을 바치는 예배" vs "영적인 예배 -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는 예배"의 의미로 봤기 때문에 그런 번역이 나온 것이고, 전자를 "비합리적인 예배", 후자를 "합리적인 예배"로 번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대 세계의 제의에 대한 비합리/합리의 문제이지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비이성/이성의 의미는 아닙니다.

목사들이 "영적인"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게 무슨 성서 번역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말입니다.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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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권 (203.236.91.189)
2019-03-18 22:35:39
1. 마태복음 11:12

[개역개정]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이것을 "침노한다"라고 번역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논쟁이 있기 때문이지, 번역자들이 무식하거나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전에 어느 목회자 그룹에서 몇 분의 전공자가 이 부분에 대해 논쟁한 적이 있어서 관련된 댓글을 옮겨봅니다. 강원모 목사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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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에서 침노라고 번역한 단어, 비아조의 기본 의미는 폭행하다, 약탈하다 정도의 의미라고 합니다. (BDAG) 마 11:12에서는 비아조의 형태(비아제타이)를 자동사적인 중간태냐 아니면 수동태냐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갈립니다. 동사의 어미변화가 같기 때문이죠.

하늘나라를 주어로 하여 중간태의 의미로 본 경우가 새번역, NIV, 쉬운 성경의 경우입니다.

새번역 마 11:12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NIV Mt 11:12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쉬운 성경: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있게 성장하고 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문제는 하늘나라가 힘 있게 성장 혹은 힘을 떨치고 있다는 내용과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인 '힘 있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한다' 사이에 논리적인 모순이 생긴다는 점 입니다. 아무래도 그 둘은 동의적인 평행구절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반절의 대명사 아우텐이 앞의 하늘나라를 받는 것으로 보이므로 논리적으로 폭력적인 이들이 강하든지, 하늘나라가 강하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하는데, 두 쪽이 다 강하다고 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바아조를 수동형으로 보게 되면 논리의 흐름이 보다 더 매끄럽게 됩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는 객체이고 폭력적인 이들이 그 하늘나라를 잡고 있는 것이 되니 말입니다. 이 편에서 보는 역본들은 NRSV, 공동번역, 개역(개정), TEV 등 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리아 지역의 역본인 시리아역 페쉬타 신약역본도 수동분사 형태인 메트다브라라고 옮기고 있는 점에서도 저는 이 쪽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역개 마태 11: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개정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TEV Mt 11:12 From the time John preached his message until this very day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t attacks, and violent men try to seize it.

NRS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suffered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율법과 예언자의 마지막 시대에 세례 요한을 위치시키고 있는 연관구절인 눅 16:16과는 달리, 마 11:12는 until now, finally로 해석되는 호스 아르티를 통해 세례요한을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를 대변하는 중요 역할을 하는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세상 권력에 의해 옥에 억류되고(세례요한) 박해받는 상황을 하늘나라가 폭행당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습니다. 궁극적으로 파루시아가 오기 전에, 고난의 시기가 먼저 오리라고 믿었던 당대의 이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예수님의 어록이라고 일컫는 Q로부터 이 전승을 마태와는 다른 방식으로 서술한 눅 16:16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하나님 나라 도래의 전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율법과 선지자의 영역(세례요한을 포함하는)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종말의 시대, 즉 모든 사람이 마음껏 제약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려들어갈 것을 요청 받는 시대가 열렸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을 첨가하고 비아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유앙겔리조(복음을 전하다, 선포하다) 동사를 위치시켰으며, 전치사 에이스를 함께 사용해서 비아조를 율법 규정에 있어서 제약을 받던 이들이 그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나라로 진입하는 의미로 변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번역 눅 16:16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공역개 루가 16:16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개정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따라서, 마태복음 11.12의 비아조를 중간태로 해석하고, 폭력적인 이들을 믿음 있는 신자들로 대입하여 해석하는 것은 누가의 이해를 마태의 맥락에 강요하여 읽고자 하는 간섭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본인이 생각하시는 구약의 내용과 연결하고 싶으시면 마태보다는 누가의 본문을 사용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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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대로, 같은 예수의 어록 전승을 이어받은 마태와 누가도 이 부분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침노하다"에 대한 이해가 이미 복음서의 기록 단계부터 복음서 저자들 사이에 서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마태의 맥락에서는 링크글이나 강원모 목사님의 견해가 옳다고 봅니다만, 이것을 단순히 번역자들의 황당한 오역으로 치부하는 것이야말로 황당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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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화 (175.214.79.27)
2019-03-18 20:51:47
신집사님 자세한 설명에 모호했던 부분 잘 배웠습니다

요즈음 일반에서 헬라어 원문 성경읽기 도전하시는 분들 종종 계시더라구요
그나마 영문이 나은편이데 영문도 오역이 아주 없는건 아닌지라

외국생활 오래하면서 성경에 전문학위를 받아오지도 않은 일반목양 목회과정 겨우 한사람들이 가르치자고 드니 문제가 될 밖에요.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것이야 누구라도 하는일이지만
성경을 가르치는일은 자격이 있어야 함이 옳겠습니다
깨인 일반성도 만도 못한사람들이 부지기 수입니다

어떤 외부지배나 교단 세력과 분리되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명할수있는 양심있는 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해 지원해서 일반 성도들이 누구다 등록할수있는 아카데미가 활성화 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성경을 공부하고 바르게 깨달으려는 시도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이 교회마다 녈켜있는 아무나 교사(목사)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없고 지생각 천지
때론 무지해서 이기도 하고 상당수는 의도적이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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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3-18 08:29:43
최소한 韓英성경으로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야만 성경을 도둑질 당하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오로지 한글로만 읽고선 앞 쪽 설명 다르고 뒤 쪽 설명이 달라 무슨 이런 게 다 있느냐고 흥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英韓對譯으로 읽어보니 그 뜻이 그런대로 명확해져 헛웃음만 지었습니다.

성경記術者의 시각, 성경飜譯者의 시각, 사도바울의 시각, 샐 수 없이 많은 성경解說者의 시각, 바로 코앞에서 설교하는 목사의 시각 이 전부를 뚫어야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의지하다가는 잘못 전달된 예수님을 만나게 될 뿐입니다.

바로 위의 <김기석 설교>를 읽어보니 “어떤 목소리에 반응하는가?” “주님의 말씀 가려듣기”라는 식이더군요. “삯꾼의 뒤를 따르다가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주님의 말씀을 가려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라는 구절도 있더군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삯꾼의 말을 가려듣고 주님의 말씀은 전부 다 받아들여도 성경을 제대로 알기가 곤란한데 주님의 말씀을 가려들으라고요? 저는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삯꾼의 뒤를 따르다가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삯꾼의 말씀’을 가려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라는 게 맞는 게 아닐까요?

이런 목사의 시각도 뚫어야만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겹겹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성경을 읽지 않는 한 우리가 만나는 예수님은 본래의 모습과 동떨어진 일그러진 예수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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