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교회를 알리는 유일한 표식이다. 어느 교회든 예배실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다. 큰 예배당에는 대형 십자가가, 작은 기도실에는 작은 십자가가 걸려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성물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다. 강대상, 예배용 종, 헌금함, 성찬기 등 십자가 이미지는 모든 곳에서 활용된다. 교회와 교회 용도임을 알리는 약속된 부호이지만, 실은 십자가가 너무 남발되는 경향도 있다.

  몇 해 전 일이다. 인천 작전동교회가 ‘십자가 전시회’를 열었다. 교인들이 직접 만든 십자가 작품들과 교회 안에 있는 십자가 이미지들을 모아서 전시한 것이다. 성전의 역사를 알려주는 십자가와 함께 구석구석에 생각보다 많은 십자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천정의 보와 기둥, 바닥 타일, 창호와 유리에도 십자가를 담아냈다. 만약 우연한 이미지까지 찾았다면 훨씬 많을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십자가 이미지는 따로 있었다. 바로 담임목사 팔뚝에 새긴 십자가였다. 청년 김의중은 군대를 제대한 후 자기 팔뚝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것도 훨훨 달군 연탄집게로! 지금은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예수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아뜩한 사랑의 추억도 흑백사진에 담겨 전시하였다. 십자가는 감동이었다.

  십자가 전시회를 위해 인천 학익교회를 여러 차례 드나든 적이 있다. 한 해는 ‘세계의 십자가 전’을 주관하였고, 이듬해는 교회가 자체적으로 준비한 십자가 전시를 축하하러 갔다. 모두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진행된 일이다. 교인들이 만든 십자가들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였다. 물론 개성있는 십자가를 만들도록 이끈 목회자의 노력이 눈길을 끌었다.
 
  조중기 목사가 소개한 십자가 중에 나무를 새카맣게 태운 ‘숯 십자가’가 있었다. 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자신의 심경을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속을 시커멓게 태운 그야말로 목회자의 마음이었다. 학익교회 외벽에 일렬로 붙여둔 여러 개의 돌들도 가슴에 오래 남았다. 우리나라 강화에서 고성까지 DMZ 여러 곳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전 벽에 새기려고 한 것은 우리 민족의 분단 십자가처럼 느껴졌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6).

  언젠가 역사가 아주 오랜 어느 교회 담임목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아마 예배당을 리모델링하면서 예배당의 십자가를 교체한 모양이다. 이전에 걸어두었던 나무 십자가를 처분할 방법을 문의하면서 내게 가져가겠냐며 물었다. 크기가 교회의 역사만큼 초대형이었다. 나무 십자가를 솜씨 좋은 목수에게 맡겨 같은 모양의 작은 십자가로 가정 수만큼 제작해 나누어주라고 귀 뜸을 주었다. 그는 두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던 해는 마침 토요일이어서 ‘정오기도회’를 준비하여 예배드렸다. 평소 색동교회에서 사용하던 일곱 가지 십자가를 주제로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광복의 고백 속에 담아냈다. ‘못 십자가’를 비롯하여 ‘무릎, 빛, 핀, 희년, 색동, 손’ 십자가들이었다. 광복의 기쁨과 희망으로 조명해보니 십자가는 더 풍성한 고백을 품고 있었다. 십자가는 지난 세월 동안 다른 연유로 만들어졌지만, 십자가의 정신에서 서로 그 맥이 통하고 있었다.

  어느새 3.1절 100주년을 맞았다. 독립선언서에 담긴 민족대표 33인 중 ‘출이독립’(出以獨立)으로 유명한 신석구 목사가 있다. 그는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심사숙고 한 것이다. 그러나 1심과 복심 재판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독립정신을 주장함으로써 좌장인 손병희와 똑같은 최고형을 구형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석구 목사는 징역을 살고 나온 이후에 시골의 가난한 교회로만 돌았다. 스스로 무명인사로 살던 그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극심한 가난이었다고 한다. 지독한 청렴 때문에 가족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63세가 되던 해인 1937년, 새벽 기도를 하는 중에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 그는 해방 후 1950년 평양형무소에서 희생되었다.

  3.1운동은 어느새 100년을 기념하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가 있다. 신석구 목사가 짊어진 남북분단의 비극과 아픔이 우리 민족의 십자가로 이어진 것이다. 분단현실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십자가이다. 그러기에 온전한 광복은 민족의 고난을 감내한 후 마침내 평화와 통일로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