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 만에 한국 방문 첫 날의 행선지는 서초동 법원이었다. 법원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법으로 먹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갈등과 불만을 다루는 법원이 정의가 강같이 흐르기를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법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전관 예우라는 말이었다. 중학 2학년 때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수표를 부도 낸 혐의로 구속이 되자 어른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전관 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를 찾아야 한다고 수근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그 질긴 인연들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서 정의를 메말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과 권력의 그림자가 짖게 들이어 있는 법원을 보면서 법이 조금만 더 정의롭고 조금만 더 상식에 가까웠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인혁당 피해자, 강기훈 등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오늘도 법원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1인 시위를 하는 사람, 법원을 규탄하는 갖가지 벽보들에서 오늘도 그 절실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제일 힘든 것은 소음이다.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도무지 시끄러워서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돈 내고 고문 받는 격이다. 오히려 가게 밖이 더 조용할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조용한 곳을 찾는 것에 가장 우선 순위를 둔다. 이렇게 소음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주일 아침 퀘이커 모임에 갔다.

퀘이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경험한 종교체험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형태이다. 일체의 기도, 찬송, 설교 없이 단순히 둘러앉아서 1 시간 동안 침묵을 하는 형태로 이성적으로 영성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퀘이커의 모임은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침묵에는 불편한 침묵도 있다. 그러나 퀘이커의 침묵은 자신을 가장 자유롭게 만드는 침묵이다.

30년 전부터 퀘이커를 몇 년에 한 번씩 방문했지만 항상 20명 미만의 인원이 얼굴을 바꾸어 가며 앉아 있었다. 한 마디로 영업이 안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역시 인간들 탓이다. 내가 만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갔던 사람도 삐져서 안 나오고 있었다.

딱딱한 접는 의자에 앉아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만한 침묵을 하면서 “이러다가 방구 소리라도 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방구 소리 정도는 흡수할 수 있을 만한 쿠션이 있는 의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년 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의자만이 아니었다. 퀘이커 고유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고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조직을 운영할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이 안 되는 모양이다. 신은 문제가 없는데 역시 인간들이 문제이다

멘토링을 하고 있는 JMS 이탈자 구룹을 만나서 최근 소식을 들으면서 일본의 전공투가 생각 났다. 밀리고 밀려 소수가 되면서 점점 폐쇄적이 되고 과격해져서 극단으로 치달았던 추세가 아주 비슷했다.

병을 앓아본 사람 보다 그 병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험한 무당이 되려면 무병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교회를 알려면 교회병을 앓아보아야 한다. 모임은 종교의 병을 앓아본 이들의 집단 지성 같은 것이었다.

젊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을 만났다. 오랜만에 운전 기사와 수행 비서를 대동한 사람을 만났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생리이다. 권력을 가지고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런 경우 공적으로는 권위 있는 인간으로 사적으로는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분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권위와 섬김의 양면적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것은 마치 균형을 잡기 어려운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아 오히려 보는 사람이 어색함을 느끼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13일 동안 11번의 구룹 미팅을 하고 수 십명의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짧은 체류 기간 동안에 또 다시 만나거나 연락할 일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번 만난 후에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거의 매일 전화를 해온 사람이 있었다. 여자도 아닌 50대 중년의 사나이가.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솔나무는 54세, 부인은 49세이다. 어느 날 23세의 아들이 21세의 여자친구에게 임신을 시켜서 만삭이 되어 나타났다. 건조하게 결론만 내리면 솔나무는 둘의 혼인신고를 하고 애를 낳은 후 살림을 차려주었다. 전후 사정을 잊어 버리고 예쁜 손녀 딸 키우는 재미에 빠질만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며느리의 아버지가 나타나서 이혼을 시켜서 친권을 포기하기로 하고 딸을 데려가 버렸다.

그 사이 솔나무 부부가 겪었어야 할 난감, 번민, 황당함 등은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다. 그러나 솔나무는 그 모든 상황들을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극복하고 마치 전지전능한 하나님처럼 해결해 왔다.

미혼부가 되어 버린 23살 병역미필 대학생인 아들과 7개월 반인 예뿐 손녀딸을 키우는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웅쿠리고 있는 표현 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통해서 솔나무가 완벽하리만큼 그렇게 미혼부의 아비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에서 쌓인 남다른 내공 덕분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솔나무에게는 혼외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 슬하에서 컸으면 몸이나 편했을 편인데 어머니가 놓치 않아서 시장통에서 대포집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거칠게 자라면서 쌓여진 삶의 내공이 있었던 것이다. 전화로 솔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가 있는 남자인 내 마음 속에서도 쓰라린 빗물이 흘러 내렸다.

나도 어머니가 대포집을 해서 술 취한 손님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얻어 맞기도 하고 어머니 대신 파출소에 끌려 다니기도 했던 세월이 있었다. 당시에는 요즘의 직업소개소의 원형인 인간시장을 통해서 접대부를 구해 왔다. 명동 뒷골목에 있는 인간시장에 가서 쭉 앉아 있는 여자들 중에 고르는 것이다. 어머니가 바쁠 때는 내가 가서 여자를 골랐다. 그러니까 나는 당당 20살에 여자를 고르는 안목(?)을 길렀던 것이다.

한 번은 예쁘고 키가 큰 나보다 어린 여자가 들어왔다. ‘동백 아가씨’를 불렀던 문주란처럼 되고 싶어서 철 없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갈 곳이 없어서 인간시장에 갔다가 우리 집까지 흘러 들어온 것이다. 대숙이는 노래도 잘하고 활달해서 요즘 말로 인기가 짱이었다.

어느 날은 일찍 자고 있는데 대숙이가 술이 취해 내 방에 들어와서 자고 있는 나에게 볼을 비벼대며 울면서 “오빠! 오빠!”하면서 “남자들은 다 도둑놈이야.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주정을 하는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이 놈의 계집애가 어디서 주정을 해?”하고 소리를 질러서 내쫓았다.

그것이 내가 대숙이와 나누었던 한 마디였다. 사건이 있고 나서 대숙이는 어머니에게 혼이 나고 우리 집을 나가버렸다. 1년 후에 대숙이가 다시 동네에 나타나 여관방에서 손님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여관방에서 손님을 받는다면 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몸을 파는 단계로 전락한 셈인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서 대숙이를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없었다. 내가 대숙이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책감이 그 후부터 늘 따라다녔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 사건은 예수가 창녀의 친구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