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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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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10월 07일 (일) 14:23:00 [조회수 : 2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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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성찬
신24:19-22
(2018/10/07, 세계성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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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이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마십시오. 그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그래야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당신들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딴 뒤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당신들은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경계선 가로지르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세계성찬주일로 지키는 오늘 우리는 성찬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교회가 성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가톨릭은 성찬을 위해 축성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화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일러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라 합니다. 개신교회의 성찬 이해는 교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찬의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이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하신다는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는 교파도 있고, ‘나를 기념하라’ 하신 주님의 가르침 그대로 떡과 포도주는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파도 있습니다. 이 복잡한 문제를 두고 교회는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왔고 서로를 이단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교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구에 집착하다가 본질을 잃어서는 곤란합니다.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 까닭은 제자들을 ‘한솥밥 공동체’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만의 신학자인 송천성은 예수님의 삶의 특색을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라고 요약했습니다. 주님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고, 성스러움과 속됨을 가르는 모든 경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주님은 경계선 저편에 있어 만나기 어렵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만나면 달라집니다. 만나기까지가 어렵지 일단 만나고 나면 경계선 저편 사람들이 그렇게 위험하지도, 불결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편견을 내려놓고, 그들의 행동을 지레 판단하려는 조급증을 잠시 유보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중증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슈 공동체를 만든 장 바니에는 ”만남은 드물고도 놀라운 일/서로가 서로에게 존재하게 되는 일/서로가 서로에게 함께 있어 주는 일/서로에게로 흘러드는 생명”(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김은경 옮김, 홍성사, 2002년 4월 25일, p.72)이라고 말합니다. 만남은 한사코 거절하면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요?

∙ 주류 문화를 거슬러
주님은 가르고 나누는 일에 익숙한 세상을 사랑으로 꿰맨 분이십니다. 성찬은 나뉜 마음을 하나로 꿰매는 행위의 상징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오래 전에 읽었던 탈무드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샴쌍둥이는 몸체가 붙어 있습니다. 그들이 둘인지 하나인지 하는 해묵은 논쟁 끝에 랍비가 말합니다. 한 쪽에게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다른 쪽도 함께 아파하면 한 몸이고 그렇지 않으면 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학적인 예여서 안됐습니다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아픔이 내게도 저릿한 아픔이 되어 다가오는지요? 기쁨도 함께 나누고 슬픔과 아픔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한 몸 공동체로 지어져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탐욕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경쟁심을 주입합니다. 승자들이 모든 것을 독식합니다. 패자 부활전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죽자사자 앞만 보고 달립니다. 다른 이들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건 사람다움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다움은 생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모든 생명이 생존을 위한 경쟁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사태의 절반 밖에는 보지 못한 말입니다. 모든 생명은 동시에 협동 속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은 타자를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조절하고 때로는 희생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당신 몸으로 짊어지신 주님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류 세계가 우리를 몰아가는 그 길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흐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바로 그런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아가페적 사랑에 근거한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성찬은 다른 이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토라는 거룩함의 본질을 약자들에 대한 배려라고 가르칩니다. 진짜 거룩함은 일상적 삶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때로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듯 보이는 이들이 정작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 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 성례전적 삶
오늘 본문은 토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교훈입니다. 신명기서는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고 왔거든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올리브 열매를 딸 때도 마찬가지이고, 포도를 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서는 조금 더 적극적입니다.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렘19:9). 포도를 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의 변형은 있지만 취지는 동일합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기 경작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배고픔과 서러움 속에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려 하십니다. 하나님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최소한의 삶이라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의지가지없는 신세의 사람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고,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도록 돕는 것은 무릇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입니다.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은 성경의 정신에 부합합니다.

많은 것을 쌓아두기만 할 뿐 나눌 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나요? 지난 주일 우리는 이태후 목사님을 통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이 폭력과 어둠이 지극하던 땅에서 어떻게 현실화되었는지를 들었습니다. 작은 나눔이 큰 기적을 일으킵니다. 오래 전 베르쟈예프의 글을 읽다가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내용은 이러합니다. 예컨대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돈이 100만원이라면 그 돈은 물질입니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빈곤한 사람을 위해 20만원을 나누고 나를 위해 80만원만 쓴다면 그 돈은 이미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십시일반으로 후원하고,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일이 아닐까요?

나눔은 물질을 정신으로 바꿉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거룩함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눔이야말로 성찬의 본질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나누셨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흘러드는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줄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함으로 통하는 삶의 문고리를 잡았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이 거룩함을 향한 순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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