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 이 글은 천안의 단비교회 정훈영 전도사와 울진의 구산교회 이중석 전도사의 편지를 옮긴 것이다.

친구 보시게

찬 바다 바람으로 혹 감기나 들지 않았나 걱정이 되네. 결혼 3주밖에 안된 새 사모님은 건강하신가. 자네보다 한 주 먼저 ‘으른’이 된 우리집도 덕분에 편안히 지내고 있네.

우리가 추운 겨울을 앞두고 결혼했기 때문에 이번 겨울은 다른 해에 비해 훨씬 따뜻하게 보내리라 생각해 보네. 자네하고 학창시절 두 해 겨울을 같이 보냈던가? 꺼진 연탄불을 갈아 피우고 두꺼운 이불속에서 책을 뒤적이던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각각의 목회지에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산다는 것이 꿈같은 현실이려니 생각되네.

그런데 우린 왜 이렇게 거리가 먼 곳에서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곳 천안에서 그곳 울진까지는 일곱시간은 넉넉할테니 말일세. 그리고 자네는 오징어를 줄줄이 널어놓은 어촌이고 나는 마늘심고 꼬추따는 촌동네

일세. 거리가 멀고 사는 현장이 다르기 때문에 주고받을 이야기가 더더욱 많아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드네.

나는 이곳에 내려와 목회를 시작한지 벌써 한해를 넘기고 여섯날째이네. 처음에 보았던 낮설고 황량한 이곳 들판과 사람들의 얼굴은 어제 내 삶의 한 부분이고 친숙해져 있다네. 아무것고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무언가를 하나하나 만들어 간다는 것은 인생가운데서 흥미롭고 해볼만한 일이라는 생각이드네.

버려진 축사를 하나씩 개조해 가면서 손때묻은 작품을 만들어 낼 때마다 찾아오는 희열이란 것은 참으로 큰 것이네. 남이 이루어 놓은 열매를 따먹는 것은 물론 풉가피할 때도 있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일세. 그래서 나는 없는 재주이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섬겨야 할 교회와 내 방안에 있는 가구 하나라도 기성품으로 사다 갖다놓는 일은 거의 없다네. 자랑같네만 내 방안에 헌 문짝으로 맞춰 짜놓은 장롱이 우리집에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호평을 받고 있는지 아나? 목사는 팔방미인이어야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사실 예수님도 목수 일을 하셨던 분이신 것을 생각해 보면 장인정신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자세라는 생각이 드네.

개척이란 것이 무엇인가? 자네가 이제 교회당도 없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니 친구의 고생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내심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일세. 자네는 이제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지어내는 사람낚는 어부일세. 모든 것은 자네가 만들기 나름일 걸세. 자네가 어느정도의 고상한 인간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신도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될 것이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실천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얼만큼 뿌리내리게 될 것인지 결정될 것일세. 그리스도의 최선의 진리를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실천해 볼 기회가 인생 초반에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지난번 신혼여행 때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미 농촌생활의 속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바닷가의 바람과 즐비한 어선

들조차도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진 않았네.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졌지. 자네가 그곳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되는 과제는 멋진 예배당을 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이 땅의 민중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네. 그분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부여잡지 못하고서는 불과 몇년이 안지나 스스로 지쳐버리고 그래서 도시로 올라오고 싶은 유혹이 생겨나게 될 것일세. 그렇기에 목회자에게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걸세. 끊임없이 사람들하고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함과 동시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인 작업으로서 연구와 영성을 훈련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한 거례. 대외적인 활동 못지 않게 내적인 준비작업이 고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네.

그리고 명희씨에 대한 배려를 늘 잊지 않았으면 하네. 전도사인 우리가 현실에 막막해 할 때가 있다면 여자쪽에서는 우리의 두세배는 더 힘들어 한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지 않겠나. 자네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성품을 지녔으니까 크게 걱정안해도 되겠지만 목회자가 일반적으로 보면 사모를 목회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는 말일세. 동반자의 의미를 단순히 자신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해주는 정도로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할 걸세. 사모가 힘들어하는 것은 생활의 궁핍에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목회자와 목회하는 의미를 충분히 공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목표와 의미에 대한 생각의 일치 없이는 희생적인 헌신이 있을 수가 없고 표면적인 만족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일세. 그러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생활상의 문제와 어른에서 목회하는 일에 대한 가치를 그리고 자네가 책을 읽는 만큼 명희씨도 책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게나. 명희씨는 자네와 같이 훌륭한 목회 동

역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네.

멀리 있지만 자주 연락하세. 전국 어느 곳곳에 흩어져 있더라도 연대할 사람들은 늘

기억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리고 우리교회가 지난 가을 추수감사절 때 헌금을 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쌀을 드리셨기 때문에 그 쌀을 어촌에 있는 자네에게 보내기로 하였네. 조만간에 한 번 들르게. 거기서 흔한 오징어나 몇마리 가져오게.

추위에 몸 조심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구산교회와 가정위에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네. 샬롬.

             1993. 12.10   

             천안에서 정훈영 씀

               P.S: 애경씨가 안부 전하네.

벗이여 보게나.

유난히도 세차게 부는 바람에 추위를 느끼는 날씨에 아무일 없는지 궁금하네. 여기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네. 비록 새사모님이 새 아기의 탄생을 위해 조금 고생을 하지만 괜찮아지리라 믿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가 보내준 편지 정말 감명있게 읽었다네. 아침에 먹다 남은 밥을 김치 넣고 볶아서 계란국과 함께 먹고 있는데 등기가 왔다고 해서 나가 보았더니 자네에게 온 편지가 아닌가. 기뻤네. 얼른 방으로 들어와 소리내어 읽었네. 읽는데 왜 그렇게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나는지 참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가. 편지 받고 울기는 처음이네.

울진에 내려오기 전에는 이런 생각뿐이었네. “어떻게 하면 빨리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어디 자리 없을까?” 정작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은 잊어버린채 지내왔다네. 앞으로 어떤 목회를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데 고민이 안되더군. 그러다가 우연히 울진에 목회자리가 났다더군. 그것도 개척이나 다름이 없다는 거야. 한번 해볼만한 목회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

군. 그래서 뛰어 들었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교회를 짓겠다는 일념뿐이었고, 목회를 나가게 되는 자신이 좋아 보였네. 그 지역에 가서 지역적 공동체를 이루어 내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지닌채 울진에 내려왔다네. 이런 막연한 생각들이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만들더군. 거기에다 아는 사람은 없지 이야기 할 사람도 없지. 동네 사람들 마저도 반응은 냉냉하지. 서글퍼 지기 시작하더군. 서울로 뛰쳐 올라가고 싶었네. 허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차피 이 지역에서 살고 목회할거라면 그래서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어 낼거라면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이 생각에 위로를 얻었다네. 지금은 여기가 좋다네. 몇몇 분을 알게 되고,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알고 나서 좋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이제 많은 곳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유혹과 압력이 있지만 그렇게 목회할 생각은 없네. 이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고히는 아니라 믿네. 이 지역 목회자들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네.

내가 해야 할 일은 교회를 지어야 한다네. 땅이 어려운 문제가 얽혀 있어서 서둘러야 한다네. 감사한 것은 교회를 누가 지어 주겠다지 않겠나. 그래서 교회를 건축해야 한다네. 비록 자네가 섬기는 단비교회처럼 목회자의 피와 땀이 들어가지 않아서 섭섭하지만 앞으로 많으리라 믿으며 긍정적으로 받아ㅏ 들이려네. 그런 후 어부가 되어 보려 하네. 고깃배를 타고 함께 일해보고 싶다네. 물로 목회에 지장이 없도록 말일세. 그들의 삶에 나도 들어가서 느껴보고 싶다네. 그러면 나도 예수님의 제자처럼 어부가 되는 것이네.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네.

이런 기대와 함께 걱정이 있다네. 기성목회자가 되어야 견딜 수 있다는 유혹과 생활고에서 오는 재정적 유혹은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걱정이네. 아내가 아침 밥상을 보면서 서글피 울더군. 이유는 서글프다는 것일

세. 비참하다는 말이기도 하다네. 이런 아내의 모습에 내가 약해지더군. 거기에 아기까지 있으면 더욱더 내가 약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러나 내가 이런 유혹에 넘어간다면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한다네. 그것은 목회자 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하네. 이제는 이것과 싸워야 한다네. 예수님이 싸워 승리했듯이 나도 싸워 승리해야 한다네. 예수님의 초연함과 넉넉함을 내가 소유해야 할 것같네. 멀리서나마 기도부탁하네.

내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 목회를 나간 초년생이 하는 이야기로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로 생각해 주게. 그리고 내 생각에 대해 평가도 부탁하네.

참, 애경씨에게 잘해주게. 애경씨 자네보고 힘든 길을 선택했는데 자네가 소홀하면 얼마나 서글퍼지겠는가? 물론 잘 하리라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일세.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열심히 사는 것. 이해하는 것. 희생하는 것. 그 외에는 없네. 당분간은 어울려 열심히 살아 보려네. 흔한 오징어 가지고 언제 한번 올라가겠네. 겨울에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단비교회와 애경씨, 그리고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또 소식 띄우겠네. 잘있게.

                      1993. 12. 22.

                     울진에서 중석이가.

                               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