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가까이 오랫동안 피고지는 화려한 꽃빛에 반한 것이 아닙니다. 30여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3월 말, 쌀쌀한 봄바람이 불고 있었지요. 역사기행 차 들른 충청도 어느 사찰 마당에서 벌거벗은 나무를 만났는데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들이 범상치 않았습니다. 궁금했으나 이름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그저 마당에 심고 싶다는 바램만 품은 채 기대서서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왔습니다. 제 눈에는 노랗고 말간 수피가 얼마나 반질거리던지 마치 부잣집 막내아들 같아 보였습니다. 이름도 몰랐으니 추위에 약해 충청이북지방에서는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 수 없었지요.

여름 한복판에서 꽃을 피우는 더운 중국 남부지방출신이지만 올여름은 좀 힘겨웠겠어요. 고려때 들어왔고 백일홍나무이라 불리다가 배기롱나무, 배롱나무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붉은색, 보라색, 드물게 하얀색 꽃이 있습니다. 나무를 멀리서만 바라보아도 충분히 멋있는 수형(樹形)과 빛깔이지만 오골오골한 꽃을 들여다보면 커다란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작은 꽃송이가 모여 있다 생각되지만 한송이가 생각보다 큽니다. 꽃자루가 긴 표면적 넓은 꽃잎과 암술은 하나지만 곤충을 유혹하는 수술은 암술머리를 한 가짜 수술까지 합해 30여개가 됩니다. 수정이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는 셈이지요.

배롱나무로 유명한 곳은 역사 깊은 사찰이나 성당, 그리고 옛 양반들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원이나 머물던 서가, 그리고 정원입니다. 언제가도 정겨운 안동의 병산서원과 체화정, 작년에 다녀온 담양의 명옥헌과 화순 만연사, 그리고 왜관의 가실성당, 달성의 하목정과 도동서원에서 담았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힘을 빌려 수도권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꽃’을 품고 있는 ‘그지역’만의 특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꽃’을 만나러 ‘그곳’으로 떠나는 설레임은 아무래도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몽글몽글 올라오네요. 하하! 오지랖이 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