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목사 부부가 사시는 곳은 바트 조덴-잘 뮌스터(Bad Soden-Salmuenster)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풀다(Fulda) 방향으로 서북쪽 50킬로미터 남짓 거리인데, 1991년에 은퇴하여 욧사(Jossa)라는 인근 산골에 살다가 몇 년 후 응급의 경우에 필요한 병원을 찾아 가까운 대처로 이사한 곳이 바로 여기다.

  부부는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함께 곱게 늙어가는 장수부부로, 모두 90세가 넘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넘어져서 뇌와 관련해 두 군데 수술을 한 리 목사는 심각한 청각불편을 겪게 되었다. 걸음걸이도 뒤뚱뒤뚱한다. 그래도 예전처럼 커피를 내리고, 주방과 식탁을 들락거리면서 그릇을 나르며, 방문 온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소소한 일을 챙긴다.

  젊어서부터 몸에 배었기에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92세 남편 보다 두 살 어린 아내는 “노인일수록 자꾸 움직여야 한다”고 계속 주문한다. 행동반경은 몹시 불안해 보이지만 심지어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운전할 이유가 아직도 자주 생긴다. 갑자기 늙어버린 남편의 보호자가 된 때문일까, 아내는 훨씬 젊어 보인다. 90대 부부의 하루는 여전히 생기와 활력이 넘친다. 

  실은 두 분에게 죽음은 먼 미래가 아니었다. ‘죽음 이후’를 준비한 것은 벌써 오랜 세월이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던 2002년 가을, 장례식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한 적이 있다. 리 목사는 내게 장례를 부탁하면서 강원도 통천군 협곡에 묻혀 있는 아버지 리풍운 목사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하였다. 그곳은 고향이나, 너무 먼 곳이었다.

  1955년, 젊은 리영빈이 독일로 유학 온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와 만남이었다. 해방 이후 감신(監神) 첫 입학생으로 일찍 고향을 떠난 그는 북에 남은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전쟁을 치룬 와중이니 생사여부도 몰랐다. 독일에 살면서 북에 있는 아버지의 생존을 알게 되었고, 편지왕래를 시도하였다.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오랜 후였지만 뒤늦게 묘비를 찾았다. 리 목사는 자신이 1980년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조직 등 남과 북의 이해와 대화를 위해 애쓴 만큼 북한 당국의 양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2009년에 다시 만났을 때, 리 목사 부부는 미래의 장지를 독일로 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을 바꾸신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장례식을 집례 해야 할 남한 국적의 당사자가 국가보안법의 시비를 치뤄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보다 독일 이주 첫 세대로서 묘비일망정 독일 땅에 남아 이정표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이니만큼, 그의 선택은 옳다.

  무엇보다 프랑크푸르트 파울-게하르트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하고, 은퇴했기에 그곳의 교회묘지는 마지막 안착지로 더 없이 좋은 장소가 될 만 하였다. 생전에 자신이 살던 곳의 공동묘지를 이용하는 것이 독일의 장례법이기에, 다른 지역에서 묘지 쓰는 일은 법적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허락을 받아냈다.

  2018년 여름, 이번에 만나서 장례절차를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었다. 독일인과 한국인 참석자를 위해 독일인 목사와 한인목사가 공동으로 장례절차를 집례하기로 했다. 지난 해 집에 찾아 온 울리케 호프만 목사와 이러한 절차를 끝냈다. 리 목사의 후임 목사인 호프만은 지금까지 현직에 있는 여목회자이다.

  정리를 염두에 둔 유품도 많았다. 이미 절판되었기에 독일에서도 귀한 신학전집을 모교에 기증하고 싶어 했지만, 과연 반가워할까 싶었다. 이미 10여 년 전에도 감신도서관에 기증했지만, 반응이 뜨악했던 것이다. 독일식 파일집에 차곡차곡 쌓아둔 서류와 사진은 그 자체로 역사였다. 아마 통일운동과 관련한 남과 북의 자료는 산더미일 것이다.

  무엇보다 리 목사의 장례식 준비는 고희 기념으로 만든 자서전 <경계선>이 시발점이다. 게다가 2014년에는 한글을 알지 못하는 손자 세대와 독일 지인들과 나누고자 독일어 판으로 새로 간행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 헤쎈 나사우 주교회가 후원하였다. 마틴 니묄러 감독의 후예인 그들은 독일 땅에서 그들의 동역자로 살아 온 한국인 목사의 삶을 소중히 받아준 셈이다.

  무엇보다 2017년 말에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기억할만한 다큐멘트를 작성하였다. 독일어로 20쪽짜리에 이르는 ‘감사의 문서’이다. 그는 네 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헌사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장례준비일 성 싶다. 네 명은 먼저 아내 김순환을 비롯해 신학지도교수인 요아킴 이반트 박사, 구스타프 하이네만 변호사 그리고 NRW주 노동청장 데에겐이었다.

  김순환은 전쟁 직후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을 두고 독일로 떠나는 자신을 격려하였고, 아내로서 무거운 멍에를 안아 주었다. 이반트 교수는 냉전극복과 평화를 배우려고 유학 온 분단국가의 가난한 신학생을 위해 자기 집에 머물도록 배려하고 서재를 공개하였다. 그는 체코 신학자 로마드카와 함께 동서 냉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한 장본인으로, 덕분에 리영빈은 유럽의 평화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1965년부터 5년 동안 독일교회의 위탁을 받아 광부와 간호사를 돌보던 리 목사에게 한국어 예배 외에도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 때문에 독일 노동변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하이네만 부자의 도움은 만네스만이란 대기업의 로테이션법이란 갑질로 부터 광부들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리고 데에겐 노동청장은 간호사와 결혼한 광부를 추방할 수 없다면서 부부가 독일에 체류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리 목사 부부는 1980년에 북을 방문한 이래 현재까지 남과 북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그들이 겪은 비난은 분단시대가 함께 져야 할 아픔이었다. 그런 분단의 그림자로 두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리 목사가 증언하려는 것은 바로 독일에 정착한 한인들의 역사인데, 이미 1955년부터 자신이 겪어온 실존을 포함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의 목회적 사명이었다. 

  26년 전인 1992년 봄, 은퇴하신 리 목사를 욧사에서 만난 후 나는 두 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감사의 문서’를 접하면서 두 분의 우선적 관심사는 남북문제 훨씬 이전에 파독 광부의 노동문제와 디아스포라 정착의 역사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것은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존재감이며, 그들 공통의 흔적이었다.

  이영빈 목사는 자신을 ‘그렌츠 갱어’로 부른다. 우리말로 ‘경계선에 선 인간’이다. 해방 직후 냉전시대를 살아온 삶, 독일 이주와 정착의 역사, 독일교회 목회자로서 또 한국인 목사로서 화해와 평화통일의 사역은 단지 개인의 관심과 결단을 넘어 세계와 부대껴온 진실한 몸부림이었다.

  지금 92세인 그는 비로소 자신의 장례식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셈이다. 이를 설계하고 준비하는데 어느새 16년이 흘렀다. 언젠가 현재의 문턱을 넘어 다른 미지의 세계로 이주할 준비를 하는 그의 마음은 아직도 분주하다. 프랑크푸르트 시내 파울-게어하르트교회 묘지에 자리를 잡게 될 그의 생애는 독일한인이민들의 내일 밝힐 역사의 등불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