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할아버지가 지난 수요일에 우리집에 오셨습니다. 갑자기 겨울다운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날이었는데 여든이 넘는 노인께서 일부러 오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낡은 검은 가방에는 장기수 노인들의 시모음집과 성탄카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누빈 바바리속에 식지 않게 품어오신 작은 병 하나, 비록 가벼운 몸차림이었으나 그분 몸 하나 추스리기도 불편하신 연세 아닙니까?

검연쩍게 건네주시는 빨간색 카드에는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송병구 목사님을 비롯한 문수산성 교회의 형제 자매님들에게 내려질 것을 간절히 축원합니다”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넓은 아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편협한 종교적 외피

에 둘러싸여 신앙이건 이념이건 상대방을 인정하는 일에 인색했던 우리는 참 못난이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따듯한 아랫목에 내려놓은 작은병은 내 몸을 생각해 가져오신 건강식품이었습니다. 얼마전 한밤중에 찾아뵈었을 때 냉장고에서 귀하게 꺼내어 내놓으시던 포도주빛 음료를 맛있게 얻어마시고 인사치레차 여러번 입맛을 다셨더니 김선생님은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별러 봉천동 산꼭대기에서 북녘땅이 멀리 보이는 우리동네까지 그 별난 음료를 배달해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상큼한 감칠 맛을 내는 그것은 해보(海寶)라고 부릅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정주영버섯’이라는 것을 누가 건강에 좋다고 소개하여 확인해보니 이북에 있을 때 장복하던 물건이랍니다. 효험이 좋다보니 부자나 먹는 귀한 음식처럼 취급되고 또 탐욕스러운 재벌의 장수욕심까지 연상케하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선생님은 아마 정주영씨가 이북에 다녀오면서 들여왔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답니다.

해보는 해파리의 일종으로 약 15일이면 발효하면서 성장하여 약 4배로 자라는데 흑설탕과 홍차를 섞어 끓인 물을 먹고 삽니다. 섭씨 18도를 꼭 유지시켜야 하는 여간 까다롭지 않은 생명인 셈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까탈스런 것을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에게 가져와 보름마다 세사람에게는 반드시 나눠줘야 할 의무감을 짐지우시다니···. 사실 나는 봄철에 새로 심어놓은 감나무 묘목을 가을까지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주제인데다, 주접을 떠는 어린 감나무를 보고 입안에 단침을 삼키는 조급하기 짝이 없는 인물입니다.

잘 닦아놓은 질항아리에 해보를 실에 꿰어 아구로부터 매다는 일을 너무도 조심스럽게 진행하시는 김선생님은 진지하기가 마치 큰 수술을 눈 앞에 둔 외과의사 같아 보입니다. 몇 번씩 다짐하고 확인하는 김선생님은 약효를 짐작케하는 우스개 소리를 한자락 해주었습니다. “내가 이북에 있을 땐데 말이요, 그 당시에도 해보가 있었지요. 너도 나도 몸에 좋다니까 말입니다. 우려낸 물을 열심히 마셔대지 않았겠소? 자연히 젊은이들이 정력이 왕성해져 풍기가 문란해졌지요. 그런데 이북은 일치된 사회 아니요? 정부에서 40세 미만은 못마시게 했어요. 이쯤 되면 해보의 효능을 알만 하지요?”

그리고 총총 걸음으로 우리집을 나섰습니다. “꼭 하루가 걸렸구만요···” 금쪽같은 겨울의 짧은 하루 해를 이렇게 섭섭하게 보내고 가시다니 마음은 목에 가시가 걸린듯 했으나 그 분을 붙잡아둘 여유가 없는 내가 미련스러웠습니다. 하긴 삼십 몇년씩 기약없는 감옥살이에서 천년을 하루같이 버텨내신 분들이니 김선생님은 우리네와는 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시계를 갖고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 번은 고난 회원중 결혼식 때 통일 할아버지의 주례를 부탁하기에 그중 연장자이신 김선생님께 청을 드렸더니 한 마디로 사양하십니다. “난 아직 신분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고 또 실수하기 쉬운 사람입니다ㅏ. 일데시대 땐데 결혼 주례서다 남의 혼인 산통을 깨뜨렸지요. 축사를 하던 중 딸을 낳으면 로자 룩셈부르크를, 또 아들을 얻으면 칼 막스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했다가 순사들에 의해 결혼식 자체가 해산당해 버리고 말았어요. 지금에야 그런 실수 안하겠지만 아무래도 난 부적격이니 다른 사람 샂아 보는 게 좋겠소.” 도무지 막무가내로 거절하시는 통에 결국은 주례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다 아는 것처럼 그분은 주민등록증도 의료보험카드도 심지어 그 흔한 은행통장 하나 없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4남 2녀가 있지만 다 통일이나 되어야 만날 수 있는 그리운 이름일 뿐입니다. 한달 전 우리교회 여선교회에서 노인들을 초청하여 애기봉을 모시고 갔을 때 어린아이같은 솔직함으로 한강 너머를 내려다 보며 눈길을 붉히시던 모습을 훔쳐뵌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선생님은 참 단호하십니다. “난 자유왕래가 허용되면 제일 먼저 고향엘 가겠지만 방북허가서를 내고 가는 조건부 방문은 절대 않습니다.”

세칭 그분은 남파 공작원입니다. 5.16직후 황태성 밀사사건 이후 박정희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남에 내려왔습니다. 일제시대 중국 유학시절 그를 알았다고 했습니다. 곧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반공법 6조 3항에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1년 12월 24일까지 꼬박 30년간을 독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소외된 감옥살이의 한풀이 일까요, 아니면 조국애와 마찬가지의 진실함 일까요? 편견으로 가득한 근시안으로는 헤아려 보기 어렵습니다.

비단 연말연시라서 품게된 감상은 아닙니다. 우리교인들이 친정 아버지 같다고 친근감을 나타내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은 더더욱 아닙니다. 적어도 날마다 우리가 구두선 처

럼 외는 ‘이웃 사랑’은 우리들 팔둘레 만큼은 뛰어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입니다. 마찬가지로 젊어서의 작은 실수를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작은 것 나누는 일에도 하루를 쪼갤 수 있으며, 30년을 한결같이 벽붙이로 살아낸 인간승리 앞에 더욱 정직해야ㅑ 하지 않겠냐며 자신을 책망해 봅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경우를 불문하고 ‘올 곧게’ 산다는 말과 표현의 낭비를 자제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김선생님이 전해주신 건강의 비결이 단지 ‘해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분이 되돌아 가시는 먼 발치에서 였습니다.

송병구(김포 문수산성교회 목사) 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