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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언에 귀 기울이라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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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7월 28일 (토) 23:55:59
최종편집 : 2018년 07월 28일 (토) 23:58:22 [조회수 : 4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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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에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단과 같은 선지자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단은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환관적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체제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권력과 맞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리 없건만 그는 왕의 호감을 사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길을 택했다. 체코의 문인이자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현실과 불화하고 현실에 대항한다. 진리에 잇닿아 있는 자는 어찌할 수 없는 저항자로 산다".1)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마치 한담을 늘어놓듯 어떤 성읍에 살고 있던 두 사람 이야기를 꺼낸다.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아주 많은 거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겨우 암양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한 마리에 불과했기에 그는 양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 집의 아이들에게 그 양은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오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인색했던 부자는 자기 짐승을 잡아 대접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강탈해다가 나그네를 대접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2)

'마땅히'라는 말이 눈에 띈다.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 당연하다는 뜻을 내포한다. 다윗은 자기가 지배하는 땅에서 그런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그 이야기가 다윗을 빗댄 이야기인 줄 다 알지만 다윗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기 성찰의 회로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우리 눈은 바깥은 잘 살피지만 자기 속은 잘 살피지 못한다. 나단은 다윗을 향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엄하게 말한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나단은 좋은 말을 고르기 위해 우물쭈물 하지 않는다. 비수처럼 예리하게 다윗의 허위의식을 찌른다.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없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섰다.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 김찬호 박사는 직언의 목적은 단순히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변화시키거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의도로 하는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고 방어막을 치기”에 급급한다. 누가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나?

“현재의 자기를 미완의 존재로 여기면서 끊임없이 완성해간다고 생각하면, 직언이 감사한 선물이 된다. 반면에 취약함을 감추려고만 하면 불손한 참견이나 성가신 지적으로 여겨진다. 권력욕이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또는 자존감이 너무 낮으면 그렇게 반응한다. 과도한 자기애 그리고 허약한 정체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 관건이다.”3)

나단은 다윗의 죄목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 남의 아내를 빼앗은 죄, 여호와를 업신여긴 죄. 범죄에는 형벌이 따르는 법, 나단은 다윗이 받을 벌도 열거한다. 그의 집안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자각하고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다윗의 위대함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권력이 자기 근원을 잃고 지배의 욕망으로 변질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온다. 예수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을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4) 하고 가르치셨다. 어쩌면 진정한 영성이란 특권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싹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부사리처럼 남을 자꾸 들이받기보다는 “당신이 그 사람이오”라는 나단의 비수같은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삶은 조금 맑아질지도 모르겠다. 권력을 인격의 등가물로 여기는 속물들이 넘치는 세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꿰뚫린 당당한 이들이 일어나야 한다. ('권력 중독에서 벗어나기' 中에서)


1) 바츨라프 하벨, <불가능의 예술>, 이택광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6년 6월 1일, p.296; 박영신 교수의 '해제' 중에서.
2) 삼하12:5-6
3) 김찬호, <눌변>, 문학과지성사, 2016년 6월 20일, p.80
4) 눅22: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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