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운동을 하는 동호회에 새로운 회원이 가입하셨다. 50대 후반의 이 신입회원은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으신지 회원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 자주 말을 거셨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이 신입회원이 끊임없이 사람들의 나이를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괜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말을 건 대부분의 회원들이 그분보다 명백하게 나이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이로 우세를 취하려는 대단히 한국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나이를 통한 우월감을 드러내는 일이 많다. 나이가 많은 것이 자랑이라도 되는 양, 나이를 먹으면 지혜와 인격과 권위가 시간과 함께 저절로 쌓이기라도 하는 양 나이가 많다는 사실 하나로 유세를 떠는 모습이 전혀 드물지 않다. 그리하여 싸움의 마지막은, 그것이 말싸움이든 주먹다짐이든 늘 ‘너 몇 살이야’로 끝나기 십상이다. 물론 이 말을 뱉는 사람은 당연히 싸움에서 불리하게 된 나이가 많은 쪽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오륜(五倫)의 하나로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도리는 엄격한 차례가 있고 복종해야 할 질서가 있음을 이른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유학을 중국보다 더 신봉하는 우리나라는 이 말을 이데올로기처럼 다듬어 내면화시키고 모든 분야에 적용해왔다.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후배는 선배의 말을 들어야 하고, 손아래동생은 손위형제나 자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말의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序, 즉 나이의 차례요 서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 어린 사람을 동료나 벗으로 보지 못하고 지도하고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지도와 가르침의 강박 아래서 끊임없이 이 가르침을 시전하려고 한다. 남성이 끊임없이 권위적인 태도로 여성에게 가르치듯 설명해주려는 태도를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비판하는 요즈음, 나이 많은 이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태도는 가히 에이지스플레인(agesplain)이라고도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나이를 두고 유세하는 이러한 태도가 진정 우리나라 유교의 고유한 전통이었을까? 뜻밖에도 한국 유교사상의 중심이었던 퇴계 이황의 태도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퇴계 이황이 자신보다 무려 26살이나 어린 고봉 기대승과 나누었던 서신들은 나이를 초월한 존중과 존경을 보여준다. 나이만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국립대학 총장의 자리에 있던 이황이 이게 갓 과거에 급제한 청년에게 보인 존중과 배움의 자세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견문이 좁은 제가 박식한 그대에게서 도움 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서로 친하게 지낸다면 도움 됨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첫 만남 이후의 두 번째 편지에서부터 이황은 깍듯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한참 어린 사람의 지식과 지혜에 존경과 예를 표한다. 이러한 태도가 깊이 배어있으니 이 편지의 말미, “오직 이 시대를 위해 더욱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라는 말은 결코 꼰대의 충고가 아니라 나이 어린 동료에 대한 연륜 깊은 애정의 충고로 들린다. 서신을 통한 두 사람의 진지한 학문적 논쟁과 애정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어디 세상에서뿐일까, 교회 안에서도, 교단 안에서도 나이를 통한 에이지스플레인은 너무도 만연하다. 언제까지 존경은 늘 어린 사람의 몫이고, 가르침은 늘 나이 든 사람의 몫이어야 할까?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존경과 가르침이 나이를 초월했으면 좋겠다. 퇴계와 고봉 같은 이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신하의 직언을 듣지 않는 왕은 어리석다. 그보다는 가난할지라도 슬기로운 젊은이가 더 낫다.” (전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