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하나님과의 독대, 1대1의 대화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8년 07월 11일 (수) 23:35:22
최종편집 : 2018년 07월 11일 (수) 23:43:44 [조회수 : 84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구한 것을 이루어 받는다면 다 좋은 기도인가

 

필자는 기도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독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심 놀란 적이 있다. ‘하나님과 독대라니 그런 교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젊은 목사가 아니라 은퇴한지 몇 년이나 지난 분이었다. 그러나 이유를 물을 그런 분위기가 아니어서 까닭을 모른 채 헤어지긴 했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독대’란 다른 누구도 끼지 않고 단둘이 만나는 것을 말하는데, 옛날에는 함께 하는 사람 없이 혼자서 임금을 뵙던 일을 가리켜 그렇게 말했으니, 기도를 이와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 같은 표현에 거부감이 드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지금도 보통사람들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위치의 사람을 혼자서 만나는 것을 가리켜 ‘독대’라 하기도 하니 더욱 그렇지 않나 싶다.

이 시대의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지만, 원한다 해서 일반인들이 따로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높으신 하나님과 독대를 한다는 말에 ‘교만’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러니까 기도를 가리켜 ‘하나님과의 독대’라 한 것을 ‘교만’이라 한 것은 성삼위 하나님에 관한 이해부족으로 빚어진 과오의 소산이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동시다발적으로 얼마든지 ‘독대’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과도 동시에 개별적으로 만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전주에 있는 필자가 기도를 통해 독대를 하는 같은 시간에 서울의 누군가와도, 제주도의 누군가와도, 그리고 일본의, 미국의, 영국, 독일의 누군가와도 독대를 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과 독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 은총을 입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은혜라는 말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나를 콕 찍어 선택해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에 가능한 은혜가 ‘독대’라는 말이다. ‘기도’라는 말이다.

누구 하나 도와 줄 사람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기대어 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그것도, 모르는 것도 못할 일도 전혀 없으신 하나님께서 대상이시니 그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에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라 약속까지 해 주셨으니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과 독대하고 기도로 구하면 정말 다 이루어 주시는가. 그리고 이루어 주셔야만 좋은 기도인가. 흔히들 기도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기도하고도 이루어 받지 못한 것들은 수도 없이 많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4:2-3)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가.

기도하며 전도한다 해서 그 대상이 다 예수를 믿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도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인가. 물론 전도 같은 일에도 불순한 생각이 끼어들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복종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데도 별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일까. 무엇이 부족해서일까. 무엇이 잘못되어서 일까. 이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인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르려는 순수한 행위에 대해 그 결과와 상관없이 칭찬하실 것임이 틀림없다. 이뤄 받는 것만이 좋은 기도는 아니라는 말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좋은 기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기도 후에 당사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말해 준다. 아무리 구한 것을 이뤄 받았다 해도 세속적인 상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악화되었다면 좋은 기도가 아니다. 기도하여 물질을 얻었는데, 그로 인해 물질만능적 사고가 더욱 심해졌다면 불행한 일이다. 반대로 아무것도 기도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해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격으로 털끝만큼의 변화라도 일어났다면 그것은 좋은 기도이다.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세습의 장본인 “김삼환 목사는 하나님과 독대를 많이 했다.”

 

명성교회는 부자 세습이 이루지기 직전에 광성교회 소유의 수련원을 51억 원에 사들였다. 공시지가인 34억 원에 매물로 내놓았는데도 수년 동안이나 팔리지 않았던 것인데 그보다 17억 원이나 더 주고 산 것이다. 그러니 광성교회로서는 당연히 횡재를 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 광성교회 김창인 원로목사는 김하나 목사가 자기 아버지 김삼환 목사로부터 물려받은 명성교회 취임식에서 설교를 했다. 그는 그 설교를 통해 “김삼환 목사는 하나님과 독대를 많이 했다”. 아들인 “김하나 목사도 하나님과 친밀하게 독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리 말한 김창인 목사는 김삼환 목사가 정말로 하나님과 독대를 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교회를 세습하기 이전의 이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습 직전에 그랬다면 그것은 하나님과가 아니라 사단과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과 단둘이서 만나 영적인 교통을 했다면 교회세습과 같은 그런 큰 죄를 지을 리가 없지 않은가.

김창인 목사라고 그런 것을 몰랐을까 싶다. 일반교인들도 웬만하면 알 수 있는 것을 교계에서 내로라하는 그가 몰랐다면 누가 그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겠는가. 정말 모르고 한 말이라면 그의 명성은 허울뿐인 게 분명하고, 알고도 그리 말했다면 물질 때문에 영혼을 사단에게 판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파이프라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역시 ‘하나님과의 독대’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단둘이 만나든, 여럿이 함께 만나든 만나면 대개는 서로 의사소통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너무 커 보통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마치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귀를 쫑긋 세우고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말을 조용조용 하기도 한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생각이 통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크게 소리를 내어 하는 통성기도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용조용한 어조로 하는 기도를 즐겨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고 묵언으로 해야 기도의 깊이가 더해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에 장단점이 있을 것이니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좋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도가 다른 사람의 기도에 방해가 된다면 안 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갈수록 귀가 어두워지시는가

 

통성기도는 길선주 목사가 1907년에 평양 부흥회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라 하니 그 역사는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통성기도는 많은 교회에서 뿌리를 내려 활발하게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필자는 그 장점을 알지 못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기피자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아직 젊었던 시절의 한때 초라하고 작은 2층 건물의 그 2층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출석교인 100명 안팎의 작은 교회로 대로변에 있었고 도로 반대쪽에는 인가가 있어 기도 때문에 새벽에 잠을 잘 수 없다는 항의가 잦았다. 새벽기도뿐 아니라 철야기도 같은 때면 필자도 기도소리로 귀가 먹먹해져 고통스러웠다.

필자는 목사님께 기도소리를 좀 낮추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가 핀잔만 듣고 말았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제약을 받는대서야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저 자신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다 했더니, 그러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소리로 하면 된다 했다.

통성기도를 비난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에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한 필자이니 그 진가를 알 리 없고, 그러니 그에 대해 비난을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되지 못한다. 단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가치를 훼손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 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 뿐이다.

통성기도를 ‘주여! 주여! 주여!’하고 세 번 외치는, 소위 ‘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필자로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삼창(三唱)’의 ‘唱’은 ‘노래’라고 하는 뜻과 ‘(노래를) 부르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외치다’ ‘주장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다’라는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삼창’이라 하면 대개가 ‘만세삼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주여 삼창’이라는 명칭도 이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이 그런지 어떤지는 단언할 순 없지만, ‘주여 삼창’에서 ‘만세삼창’이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해괴한 일이다. 설령 해괴하다는 표현이 지나치다 해도, 또 하나의 틀을 제시함으로써 기도에 있어서의 운신 폭을 좁히는 것만으로도 재고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아닌가. 어떻든 ‘통성기도’가 됐건 ‘주여 삼창’이 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개인적로 하는 것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도 ‘통성기도’여야 한다 고집하고, ‘만세삼창’을 하듯이 하는 ‘주여 삼창’을 주장할 것인가.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59:1)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봐야 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독대 방법

 

기도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라 하나님께 비는 행위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아니다. 그것만이라면 기도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염치없는 행위가 된다. 우리 인간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교제가 기도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며, 충성과 헌신과 복종의 다짐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같은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릎을 꿇고 하라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가. 매일 장시간을 그렇게 했다가는 무릎이 배겨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세의 기도만을 원하시겠는가. 그러는 것보다는 마음의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중요하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목소리는 또 어때야 하는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렘33:3)는 말씀을 통성기도의 근거로 대기도 하는데, 묵언으로 하는 기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부르짖을 수가 있다.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은 기도 중에도 내면에서는 몇 십, 명 백 명이 하는 합창소리보다 웅장한 찬양이 울려 퍼질 수 있고, 열정의 질풍노도가 일어날 수도 있다.

안간힘을 쓰며 하나님의 목이라도 조르듯이 졸라야만 간절한 기도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리고 청산유수처럼 거침이 없이 하는 것이 잘하는 기도요, 따발총 소리처럼 쏟아내야 은혜로운 기도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정말 그런가.

수년 전 일이다. 필자는 병원 응급실로,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의 문병을 간 적이 있다. 필자 말고도 이미 십여 명의 사람이 와 있었다. 환자 가족 중 한 사람이 옆의 노인에게 ‘목사님, 기도 좀 해 주세요’라 부탁했다. 이미 은퇴를 한 분인 것 같았다.

다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동안이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나님 아버지…” 하고는 다시 한참을 있다가 띄엄띄엄 기도가 이어졌다. 온 영혼이 다 실린 듯한 기도였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목사라는 사람이 기도를 참 답답하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런 기도였다.

기도가 끝나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한 젊은 사람이 앞으로 나와 기도를 시작했다. 청산유수에 따발총 소리 같은, 자신감 넘치는 기도였다. 앞에 한 노인 목사의 기도와 비교라도 해 보라는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 목사임이 틀림없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교제라고 전술했는데, 말을 주고받는 것이 대화이고, 교감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교제가 된다. 그런데 왜 기도를 한다며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구하고 마는 경우가 많은가.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하기야 마귀의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는 사람이 많고,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변조하여 듣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함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소리를 하나님이 음성으로 잘못 들은 것인지를 간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들은 것이 성경에 부합되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부합되지 않으면 마귀의 음성으로 여겨 버려 버리면 된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변조되어 들렸다 해도 그것이 성경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겨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도하는 중에 성경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사색을 해도 나쁠 것이 없고, 내면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가도 좋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 같은 기도로 하는 교제가 하나님과의 바람직한 관계형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 구하지 않는다 해서 모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구하라 하신 것은 당신과 당신의 자녀인 우리와의 관계를 위해서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하거니와 기도는 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이고 교제가 기도이니, 그를 통해 사랑을 고백해도 좋고,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려도 좋다. 무엇인가를 보고해도 좋고, 찬양을 한다면 더욱 좋다. 원하신다면 목숨이라도 내어 놓겠습니다 하고 각오와 결단을 다지는 것은 필수이다. 대화이니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말씀과 뜻을 포함한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 됐건 그에 대한 사색으로 기독인으로서의 인격을 길러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독대 방법이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4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예향마을이장 (222.105.146.139)
2018-07-12 08:43:49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잘도 독대를 한다 하시네... 그러니 엉뚱한 소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음이구나.

"대화이니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지 말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말씀과 뜻을 포함한 신앙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 됐건 그에 대한 사색으로 기독인으로서의 인격을 길러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독대 방법이다."

김삼환 목사는 그렇다 치고 임종석님은 하나님과 독대 해본적이 정말 있는가 묻고 싶다. 정말로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되묻고 싶은 것이다.
리플달기
9 4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