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어렴풋이 남아는 있으나 더 이상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마도 내용은 틀림없이 상당히 각색된 채로 기억에 남아 있을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이제 소개할 ‘나와 너’에 관한 내 기억 속의 이야기 같은 것이 바로 그렇다. 탈무드에서였을까? 정말로 더 이상은 그 기원과 출처를 기억해낼 수 없는,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옛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기억에 남아 있다.

한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를 한다. 남자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문을 열어줄 것을 청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나 여자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남자는 간절한 구애를 계속한다. 그러나 결과는 늘 같다.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남자는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남자에게 또 다시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마침내 남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당신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여자는 마침내 문을 열고 남자와 뜨겁게 포옹한다.

기억 속의 이야기는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선 사랑을 아름답게 들려준다. 아니, 이 이야기는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선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란 본디 그런 성질의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상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인 상태, 사랑의 정체는 아마도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반대편에 놓인 증오는 결국 나와 너의 경계를 뚜렷하고도 날카롭게 가르는 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 너는 나와 다르다는 생각, 너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모든 미움의 씨앗이고 정체다.

많은 이가 아무 생각 없이 타는 전철 한 번 타기 위해 엄청난 무게의 전동휠체어와 몸을 리프트에 곡예처럼 맡겨야 하는 장애인들이 최근 벌어진 리프트 추락 참사에 항의하기 위해 단체로 지하철 타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위한 이 몸부림에 대해 불편을 끼친다고 욕을 퍼붓는 비장애인들에 대한 기사를 우리는 동시에 읽는다. 최근 난민에 관한 사회적 논란의 바탕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찬반에 대한 각각의 옳고 그름에 앞서 나와 다른 너에 대한 증오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이 사태에 대해 누군가 이런 식의 촌철살인의 글을 남긴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없는 게 아니라 차별할 인종이 아직 없었던 것뿐이다.”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다.” 보육의 문제가 첨예한 국가의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스웨덴은 이 구호 아래 하나로 뭉쳤다고 한다. 나의 아이, 너의 아이가 아니라 모두가 나의 아이라는 이 생각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저 옛이야기와 닮아 있다. ‘나’ 앞에 있는 ‘너’에 대하여 ‘나인 너’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남인 너’로만 대하는 한, 우리는 결코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사랑의 궁극인 성육신의 신비란 우리가 되신 하나님, 즉, “나는 너이며, 너는 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