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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영화방 <가자가자 신군>9월 7일(목요일) 저녁 7시이며,장소는 당당뉴스, "나비야, 청산가자" 주최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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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8월 30일 (수) 00:00:00 [조회수 : 4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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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8월 영화방을 쉬어서 죄송하구요,9월에 함께 볼 영화는 하라 가즈오 감독의 <가자가자 신군>입니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제목으로 유명합니다.

 8.15가 지났지만 지난달에는 영화를 직접 보는 대신 '영화가 있는 방'에 올려진 FTA 관련 KBS특집을 보는 것으로 대체했구요, 9월에야 8.15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갖기로 한 것입니다.(이날 오시기전  이 안내글이 올려진 "나비야, 청산가자 카페(http://cafe.daum.net/nbychungsan) '영화가 있는 방'에 올려진 FTA 관련 '다시보기' 창을 한번씩 보시고 오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FTA관련해서는 별도의 토론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가자가자 신군> 이 영화는 직접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던 오쿠자키의 행적을 쫓아가면서 전쟁에 협조했던 부대 간부들에게 자성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굉장한 감동이 있습니다. '나비야 청산가자'는 환경영화와 함께 이 영화처럼 평화를 생각하는 영화도 계속 함께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막이 없어 제(살구나무)가 변사 역할을 할 작정입니다. (목소리는 좋지않지만^^ 여러역할을 천의 목소리로 연출할 방침임.)

  날짜는 9월 7일(목요일) 저녁 7시이며, 장소는 당당뉴스입니다.

 

   
▲ ゆきゆきで 神軍 가자 가자 신군
장소를 제공해주시고 늘 스스로의 실천으로 우리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시는 당당뉴스 이필완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당뉴스 찾아오시는 길=서대문 네거리에서 마포쪽 300m 지점 우측 경기대 입구길로 들어섭니다.

 이 길로 150m 들어오면 인창고 4거리이며 사거리 코너에 24시간 이지마트가 있는 데 이 건물 2층에는 볼가 카페가 있고 3층에 당당뉴스가 있습니다. 전화 393-4002

 <9월 영화방모임>

함께 볼 영화 :  가자 가자 신군
일            정:   2006. 9. 7(목) 저녁 7시
장            소:   서대문 당당뉴스 사무실 (02-393-4002)
특 별   출 연:   변사(살구나무님^^;)
약           도:

* 영화에 대한 보충설명 첨부합니다   

  감독 :  하라 가즈오 (原一南) 
  발간 :  1987년 
  런닝타임 : 122분
  장르 : 다큐멘터리

 사소설(私小說)이 역사를 구성한다.

   
  하라 가즈오의 다큐멘터리 <가자가자, 신군>은 2차대전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에 의해 피해자가 된 한 일본인의 궤적을 그린 작품이다.  2차대전의 종전 말기 남태평양의 뉴기니아에서 고립된 일본군은 패전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 고민하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패전후 돌아와 본 고국에서는 이제까지 귀축양미를 떠들어대며 대일본제국의 위대함을 떠들던 이들이 미국의 전쟁책임 군사재판에서 풀려나고, 그 수족들은 미군정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이제까지 신이 땅에 재현했다고 믿고 있어 의심치 않던 천황이 신년축사에서 "나는 신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는것을 들었을 때, 빈농의 자식으로 중산층의 자식으로 저멀리 버마와 인도와 뉴기니아, 레이테 섬으로 파병되었던 황군의 경험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작품의 근간은 86년 천황을 배알하는 행사에서 누군가 군중속에서 천황에게 빠찡고 알을 던진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2차세계대전 시기에 뉴기니아 전선에 파병되었던 오쿠자키 겐조라는 이로, 자신의 전쟁경험, 굶주림과 상관의 강요에 의해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을 이렇게 되도록 만든 천황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것에대한 반대의사로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서 다큐멘터리는 출발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감독인 하라 가즈오와 함께 예전의 전우들과 상관들을 찾아다니며 일부분의 진실이나마 찾으려 하고 그 과정이 카메라에 담긴것이 가자가자 신군이다.

 당시 일본은 패전 이후 천황이란 신적 존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미군정의 의도에 부응하기 위해서 천황 스스로가 자신은 신이 아님을 선언하게 하는 "천황의 인간선언"을 46년 신년사에서 낭독케 했다. 그것은 이후 반공 정책의 병참기지로서 일본을 운영코자 하는 미국 행정부와 국무부의 의향에 맞게 천황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당시 내각을 주도했던 일본 육군출신의 도조 히데끼에게 1급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씌어 교수형시켰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영화 '프라이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올려보고자 한다.  - 이 과정에 대해서는 30시간짜리의 다큐멘터리 동경재판을 볼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90년대 말 일본에서 개봉한 <프라이드>는 도죠 히데끼의 전범재판 과정을 담으면서 2차세계대전을 (대)일본(제국) 스스로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과정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정작 보지 못한 상태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기에, 단순히 감정적 문제로서만 파악되어서는 안될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부 일본 우익들의 선전용 선동영화가 아닌 현대 일본의 시스템 구조와 일부 엘리트 일본인들의 속마음을 일부나마 드러내주는 영화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쿠자키는 묻고 싶어한다. "스스로 인간이라고 선언해 버린 천황 페하, 당신은 그럼, 그때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것인가? 우리는 신이 우리를 보호한다고 믿고 저 멀리 이역만리 뉴기니아에서 당신의 이름을 건 군대(皇軍)로 싸웠고, 옆에서 동료가 죽어도, 비록 인육을 먹게 되어도 당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왜 당신은 이제와서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는가? " 라는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천황이 자신들을,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속인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경멸해 마지 않는다.

 하라 가즈오와의 인터뷰에서 가즈오 감독은 오쿠자키가 일본인의 심성에 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천황이라는 존재를 넘어서는 관념으로 신(神)을 들고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일본의 신도적 관념으로서 자신 스스로에게 신이 강림했었단 표현으로 오해되기 쉽다고 본다 - 자기는 신이 파견한 군대라는 것은 지금은 인간으로 격하된 천황에 대한 반어법이자 경멸의 표시이자, 근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사람의 피해자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 이는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가 되어간다. 오래전 읽었던 박상연의 소설 DMZ에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젊은이들은 조건반사적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 비록 이데올로기는 무너져 내려도 조건반사는 남는다는 것이 분단국가의 아픔이라 할만하다.  -

 오쿠자키와 같은 일본인 또한 천황이라는 일본 국가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조건반사적으로 경애를 표현하지만, 한편으로 전쟁중과 패전후의 경험은 이런 감정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그는 애증이 점철된 아래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그리고 근대 일본 제국주의의 한 국민으로서의(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고자 진실을 찾는 여행을 떠나며 그것은 현대 일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시스템의 전단계가 어떻게 왜곡되어 있었고, 미국이라는 일본국의 종주국에 의해 변형되었는가를 추적해왔던 하라 가즈오 감독의 의도에 부합되어 가는 것이다.

  작품의 초반 오쿠자키 겐조는 자신의 죽은 동료의 무덤을 찾고 그의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를 듣는다. 거기에는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있는 자식에게 들려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겨져 있고, 그것은 이 작품이 애써 표현하고자 하는 것, 즉 일본인 스스로도 제국주의의 피해자가 되었다는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전우의 묘소에 참배하고서 이후 천황전쟁책임 사과라는 팻말과 휘장을 가득 실은 차를 타고서 거리에 나가 천황의 부도덕성과 사죄를 촉구하다가  일본 경찰들과 공무원들에게 저지당한다. 그 과정을 감독은 핸드헬드로 그대로찍기만 하며, 그것은 천황이라는 한 개인을 정점으로 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은 표면적으로는 변했어도 내면으로는 아무것도 전전과 변한것이 없음을 보여주려 함이다.
 이후 자신의 예전 같은 소대원들을 찾아다니며 의문사한 두명의 전우들에  대한 진실을 캐나가는 과정에서 오쿠자키는 감정에 복받쳐 옛전우와 주먹다짐을 하기도 하며,죽은 동료의 유족과 함께 옛상관들을 찾아다니며 진실, 오로지 진실만을 보여달라고 애기하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애기할수 없다거나 유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옛상관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는 이들은 과연 그때 뉴기니아에서는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의문이 늘어나게 된다.
 결국 오쿠자키외에 두명의 일반 사병, 그리고 장교들과  하사관들만 돌아왔던 그 때의 진실은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다른 사병에게서 의문사한 두 전우가 장교와 하사관들에 의해 즉결처분되었으며 그 인육을 먹었다는 고백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쿠자키는 속임수도 불사하고 - 중간까지 동행하던 유족들이 마지막에는 포기하자 오쿠자키는 자신의 아내와 또 한명의 노인을 끌어들여 유족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고백을 강요한다. - 오로지 단 하나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증거찾기에 고심한다.
 
 결국 마지막 사병의 증언을 마지막 장면으로 오쿠자키는 그 다음날 자신에게 인육을 강요했던 상관의 집에 총을 들고 쳐들어가지만 마침 상관이 없어서 그 동생을 총으로 쏘았던 일때문에 실형을 선도받고 이 다큐멘터리가 개봉된 시점에서 구속되고 만다. 이후 그의 부인이 오쿠자키의 석방을 탄원하는 장면을 끝으로 작품은 끝나고 오쿠자키는 12년 실형을 선도받고 수감되었다.

 작품속에 드러난 오쿠자키의 행동은 마치 연기를 하듯이 과장되고 카메라를 대상으로 애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기록영화의 기본적 구성체인 거리 두기 그 자체를 거부하며 카메라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만이 아닌 그 기록의 진위 자체에 대한 판결문이 될수 있음을 오쿠자키는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다.

  1996년 이땅에 서울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소개된 <가자가자 신군>은 이제까지 반사회적 표현물에 대한 첫번째 해금의 조치로서 상영된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 다큐멘터리로서 근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내부적 비판을 가장 처음으로 받아들였다는것은 근대 식민지 경험에 대한 한국인들의 어찌할수 없는 문제의식을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제 2회 인권영화제에서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문제가 될만한 편중된 일방적 제목으로 시각으로 의역되어서 상영된 이 작품이 한국적 시각으로 보는것이 아닌 극히 일본인 스스로를 위한 작품임을 명심하면서 보는것이 한국인 관객들의 또하나의 숙제가 될것으로 생각된다.


관객들과 대화하는 하라 가즈오 감독


참고로 남겨둔 것은 당시 연세춘추에 게재되었던 영화평기사이다.

영화평, 하라 카지오의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오쿠자키의 카메라는 진군한다 <연세춘추 '99.9.22>

  태평양전쟁의 패전에 임박해서 일체의 지원이 끊긴 뉴기니아 전선의 잔류병들은 견디기 어려운 처참한 상황에 빠졌다. 굶주림과 말라리아, 이어지는 동료들의 죽음은 잔류병들을 극심한 공포속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극한 상황 아래에서 일본군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파다하게 퍼져있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병사로서 뉴기니아 전선에 파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귀국한 오쿠자키는 과거 독립공병대 36연대 웨이웍 잔류부대에서
패전후에 2명의 병사가 대장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 다소 엉뚱하지만 집요한 추적작업을 벌인다. 살아남은 상관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진상을 밝힐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참혹한 전쟁의 책임이 일본의 천황에게 있다며 전쟁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천황을 고발하러 일본 각지를 누비고 다닌다. 이 과정에서 오쿠자키는 살인, 폭력, 살인예비 혐의 등으로 수없이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그리고 진상을 밝히겠다는 집념으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차위에 진상규명과 천황에 대한 고발에 관한 문구를 써서 달고 전국을 다니며 무관심한 일본국민들의 양심을 일깨우기위해 노력한다.
오쿠자키가 동반하여 다니며 제작한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에서 하라 카즈오 감독은 오쿠자키의 행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일본인들의 위선과 애써 자신들의 치부를 외면하려는 일본의 정서를 드러내어 고발하고 있다. 오쿠자키의 등 뒤에서 그와 동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의 카메라는 두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먼저 카메라에 노출된 사람들의 태도에서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떳떳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반응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아무리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해도 이미 관객은 카메라에 노출되는 그들의 태도에서 진실을 읽어내고 있는것이다.
이를 통해서 오쿠자키의 진상규명을 대하는 사람들의 진실과 의도를 읽어낼수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롱운 반응은 추적과정에 동참하는 카메라의 참여이다. 인물들의 시선이나 행동을 통해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속에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관객이 단순한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또 다른 오쿠자키로서 영화속에 참여하고 있는것이며 이는 실제의 오쿠자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관객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해 내고 있다. 경찰에게 제지당하는 장면이나 옛 상관을 찾아가서 추궁하는 장면에서 이런 점은 잘 나타나고 있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오쿠자키가 추적하는 뉴기니아 전장의 진상규명과 함께 위선에 가득찬 일본인들의 양심에 관한 진상규명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추가 글> - 이번의 글은 역시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두사람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 가자가자 신군에 나타난 여러 인간군상들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서 같이 추가시킵니다.
 
  요코이 쇼이치와의 대담을 거부한 오노다 히로오
                                                     에모리 요코 지음

  요코이 쇼이치(1915)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괌도에 파견되었다가 1972년 1월에 섬 주민들에게 발견될때까지 무려 28년동안을 정글에서 숨어산 사람이다.
  오노다 히로온(1922)는 육군 나카노 군관 학교에서 고정첩자 훈련을 받고 1944년 필리핀의 루방섬으로 파견되었다가 그후 1974년 3월 발결될때까지 무려 30여년 동안이나 특무소위로서 [환영(환영)의 대동아전쟁]을 고독하게 수행해 온 인물이다.

  요코이씨는 괌도의 타로로호라는 작은 하천에서 새우를 잡고 있다가 현지의 젊은 형제에게 들키고 말았다. 형인 사람이 엽총을 겨누면서 "누구냐 움직이지 마라!"고 소리쳤다. 그때 요코이씨는 땅바닥에서 몸을 쪼그려 얼굴을 파묻고는 절을 하듯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잡으면서 이렇게 애원한 모양이다. "도와주시오, 내게는 처자가 있소, 부탁이요"
후에 요코이씨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발이 땅바닥에 얼어붙어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모두 잊어버린 그저 겁에 질린 한 인간일 뿐이었다."  
 한편 오노다씨는 루방섬의 산중에서 스즈키 노리오라는 일본인 청년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자, "나는 군인이기 때문에 상관의 명령이 있어야만 귀국할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예전 상관인 다니구치 요시미소좌의 명령을 받고 하산했다.
한 사람은 목슴을 구걸하면서 "부끄러워 하면서"귀국했고, 또 한사람은 군인으로서 가슴을 당당히 펴고 귀국했다. 당시 취재를 하면서 나는 두사람의 고독한 전투 자세가 매우 대조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괌도에서의 요코이씨 기자회견은 지금까지도 매우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요코이씨는 휠체어를 타고서 헝클어진 머리로 회견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추울 까닭이 전혀 없는데도 몸을 벌벌 떨었다. 내가 "요코이씨 춥습니까" 하고 소리쳤더니, "우우.. 춥지 않다"고 했다.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요코이씨는 미국인 2세인지 3세인지 모르는 사람이 일본인 기자를 사칭하면서 자기한테서 무엇인가를 캐내려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귀국후의 생활방식도 아주 대조적이었다. 두 사람에게 대담을 요청했을 때의 일이다. 요코이씨는 흔쾌히 승낙해준데 반해 오노다씨는 거부였다. 이유는 총검때문이었다. 오노다씨의 총검은 번쩍번쩍하게 닦여져 있었다. 그렇지만 요코이씨의 총검은 녹슬어서 사용할수가 없었다. 오노다씨는 천황페하로부터 받은 물건을 녹슬게 하는 그런자와는 대담할수 없다고 거절해 왔던 것이다.
 교육을 받지 못한 소집병과 직업군인이라는 차이도 있다. 오노다씨에게는 역시 장교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철없는 이야기를 할수 없다는 마음이 있을것이다. 반면에 요코이씨에게는 자신은 어차피 졸병이니까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서인지 비교적 인간의 약점 비슷한것을 주르르 내보여 숨어살면서 겪었던 고통과 눈물 등을 서슴없이 말해 주었다.
  요코이씨는 귀국후 당분간은 내핍생활 평론가로서 여기저기서 강연 의뢰가 들어와 아주 잘 지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강연의뢰도 없어져서 도기를 구워서 생활한다는 이야기 였다. 그는 아무런 소속도 없이 스스로 부지런히 일하면서 소시민적 생활을 보내고 있다. 참으로 길모퉁이의 할아버지처럼 되었는데, 지금이 가장 요코이씨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든다.
  오노다씨는 브라질에 건너가 목장 경영으로 성공했는데, 우익계 단체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고 있는것 같다. 최근에는 때때로 귀국해서 서너 차례의 강연을 한후에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는 모양인데, 가슴을 당당히 편 군인다운 모습이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것 같다.

 에모리 요코씨는 저널리스트, 당시 <아사히 신문>기자로 두 사건을 취재함.  

1992년 월간조선 별책부록 <일본의 실력>에서 발췌

* 자료/廣92 블러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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