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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우리는 왜 교회를 꿈꾸는가
현승건  |  jmho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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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4월 06일 (금) 16:34:05
최종편집 : 2018년 04월 10일 (화) 01:29:22 [조회수 :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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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교회를 꿈꾸는가] (현승건 지음, 교보문고출판) 에서 발췌함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헌금으로 부담주지 않는 교회’ 이다. 헌금은 교회시설의 유지관리와 목회자의 사례, 그리고 가난한 교인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된다. 또한 전도를 위한 비용과 선교사를 위한 선교비로 지출되며 교회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이 교회의 헌금에 대해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헌금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목회자의 자기성취나 교인들의 직분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헌금은 교인들의 자발적인 호의로 바쳐지는 것이며 그에 대한 어떠한 반대급부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금이 목사의 사욕이나 사회적 성취를 위한 자산으로 변용되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 교인들의 숫자는 헌금의 액수와 관련되고 이러한 수치는 목사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교인들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헌금으로 부담주지 않는 교회’ 이다. 헌금의 종류는 오직 ‘감사헌금’ 한 가지로 정하고 오직 교인들의 자발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헌금만을 수납하도록 한다. 헌금의 관리와 지출은 집사의 권한에 맡기며 교회는 오직 필요한 만큼 집사를 선출한다. 집사는 권력기관이 아니고 봉사직이며 필요한 경우에 그리고 필요한 기간만큼 임명하여 재정에 관한 모든 사무를 일임한다. 집사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며 교인들의 복이다.

헌금은 무엇인가? 헌금은 교인의 자발적인 자기 희생의 증거이다. 교인은 자기 신앙의 확신에 따라 기쁨으로 헌금을 바친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물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보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기뻐하신다. 교인이 예배의 제단에 바칠 수 있는 최상의 헌물은 바로 교인이 경험한 신앙의 간증이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믿음을 통해 승리한 신앙의 증거를 예배의 제단에 기쁨으로 바치는 것이다. 헌금은 이러한 신앙의 간증대신에 교인이 바칠 수 있는 가장 비천한 헌물에 불과하다. [1]

교인이 하나님 앞에 바칠 것이 헌금뿐이라면 그것은 더없이 비참하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돈 뿐이라면 그 결혼은 더없이 비참한 결혼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먼저 아내를 자기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보호하고 공급해주어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 중에 재화의 공급은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모든 헌금을 오직 ‘감사헌금’ 한가지로 정한다. 십일조와 주정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 여러가지 이름의 다양한 헌금은 모두 감사헌금 한 가지로도 충분하다. 십일조가 장로와 집사를 세우는데 유력한 평가자료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직분을 내세워 헌금을 강요하고 그것이 십일조라면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는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

구시대에 유행하던 교회의 패러다임은 목사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서 교인을 모으고 나면 십일조를 거두어 장로와 집사를 세우고 권력을 위임하여 교회의 자립조직을 구성하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16세기 초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권위로 면죄부의 판매를 강요하였고, 루터는 그의 95개조 항의문을 통해 이에 저항하였다. 사람들은 교황이 루터의 건의를 받아들여 면죄부 판매를 중지하고 교회를 개선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고 화형으로 처형하려한 것은 교황의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와 같은 행위였다. 루터의 저항은 마치 교황의 목에 들이댄 비수와 같았고, 교황은 이러한 행동을 용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의사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증상에 대해 부단히 연구하고 치료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최선의 치료방법을 사용하고 좋은 약을 처방하고 성실히 간호하여 죽을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의 죄를 면하여주는 일은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여 살리는 것에 비하면 위험부담이 훨씬 적다. 죽어가는 사람을 잘못 치료하여 죽으면 의료과실이 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일에는 과실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통해 죽은 영혼을 구원받게 하는 대가로 면죄부를 팔았고, 이것은 로마 교황에게 포기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도 손쉬운 수입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황에게는 면죄부 판매를 중단하고 교회를 개선하는 것보다 루터 한사람을 파문에 처하고 화형으로 처형하는 편이 보다 쉬운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를 세울 때에 십일조를 낸 자료를 주요 평가자료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면죄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믿음의 구원에 역행한다는 구실로 성화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사다리를 부숴버렸고, 목사는 십일조로 십자가를 대신하는 면죄부로 삼았다. 그래서 교인들은 십일조를 바치고 자기 십자가를 면제받아, 순교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제자요 거룩한 성도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직원을 선출할 때 십자가의 헌신대신 십일조를 평가기준으로 삼게 되었다. 바야흐로 십일조는 현대교회의 값싼 구원을 위한 면죄부가 되어버렸고, 교인들은 성화를 외면하고 십일조로 십자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십일조는 자신의 소득 중에서 십 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친다는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서 산업의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해 나머지 지파들이 십시일반으로 돕기 위한 제도에서 시작하였다.

오늘날 교회에서 10 가정이 출석한다면 각 가정은 십일조를 내어 목회자의 생활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만약 100 가정이 출석한다면 십일조는 백일조로도 충분할 것이다. 1,000가정이 출석하는 교회라면 천일조가 되고 10,000가정이 출석하는 교회라면 만일조가 되어야 맞다. 그러나 10,000 가정이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당연히 십일조를 요구한다. 적어도 장로, 집사를 목표로 하는 교인은 십일조의 의무를 태만히 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결국 10,000 가정이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는 10 가정이 출석하는 교회 목사보다 무려 1,000 배의 십일조를 거두어, 목사가 한달에 용돈으로 1억씩 쓴다고 자랑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십일조가 교회의 직원을 추천하는 평가자료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더욱 더 이러한 잘못된 습관에 저항해야 한다.

십일조가 비록 자신의 소득 중에서 십 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친다는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소득의 십 분의 구는 어찌할 것인가? 이미 십일조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쳤으니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좋다는 것인가?

어차피 교인이 바치는 십일조에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는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보다는 소득의 전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십일조를 바치고 나머지를 마음대로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소득으로 가족들을 잘 부양하고 부모님의 용돈을 올려드리고 가난한 조카의 등록금을 보태주기를 바라실 것이다. 밀린 임금을 지불하고 빌린 돈을 갚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를 원하실 것이다. [2]

십일조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폐지한다면 교회의 운영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십일조는 교인의 의무이고 스스로의 신앙성장을 위한 은혜의 헌금인데 이를 폐지하는 것은 교인의 신앙성장을 위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십일조를 폐지한다고 해서 교회의 헌금이 줄어들지도 않을 뿐더러 교인의 신앙성장에 방해가 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헌금이 아니라 믿음이다. 교인의 믿음이 성장한다면 모든 생활에 걸쳐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게 되며 더군다나 십자가의 세례를 감당하는 제자교인으로 성장하면 자신의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 헌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신하는 제자교인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교회의 재정이 피폐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 목사는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교단이나 선교부로부터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 받고, 교회의 예배를 인도하면서 교회로부터 적절한 예배비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상담을 통한 상담비와 심방을 통한 심방비를 정해진 분량으로 받아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계비를 충당할 수 있다.

목사의 예배인도와 교사의 성경강해 그리고 상담과 심방은 모두 무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목사나 교사도 집사나 장로와 같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이다. 이렇게 해도 목사나 교사의 생활비는 집사나 장로와 비교해서 부족할 수가 있다. 따라서 목사의 부인이나 교사의 부인이 교회안에서 필요한 일을 담당하여 사례비를 받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목사는 월요일이 휴무이므로 목사의 부인도 주일에는 일할 수 있다. 교회의 공예배 시간에 영유아를 돌본다거나 교회의 카페에서 일한다거나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목사부인을 사모님이라 부르며 마치 또 하나의 목회자인 것처럼 대우하는 것이 현대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목사로 안수 받고 세움을 입은 것은 목사 자신이지 부인이나 자녀들은 평신도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목사부인을 사모님이라 부르기보다는 목사부인이라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목사가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력할 때 교회의 헌금에 좌우되지 않는 건실한 목회가 가능하다. 또한 교회의 헌금을 자신의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도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 목사의 생계는 목사 스스로 책임지고 교인들은 목사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다.

요즈음 목사의 이중직에 관한 논의가 뜨겁다. 목사의 이중직은 바람직한 교회를 전제로 한 목사의 생활자립을 의미한다. 목사가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력할 때 개척교회의 자립이 가능하며 목사가 교인의 헌금에 의존하지 않는 건실한 목회가 가능해진다. 즉, 목사의 생활자립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자 바람직한 교회를 세우는 가장 기초적인 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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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역개정, (사 1: 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2] 개역개정, (사 1: 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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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239)
2018-04-08 07:24:05
목사는 목사가 스스로 직업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목사가 직업임을 인식하고 급여를 받는 순간 꿈꾸는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이다.

목사가 직분임을 주장하며 사례를 받는 순간 목사는 무당과 같게 되며 이만희가 되는 것이다.
리플달기
지나가다 (99.225.236.86)
2018-04-17 11:16:37
직장 생활을 해 봤으면 이런 기사 안쓴다.
하나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두 가지를 같이 하라고,
대부분 목회자들이 이렇게 하다가 골병들어 포기한다.
제발 이런 기사 쓰지마라.
기냥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끔 유도해라.
아예 목회를 그만 두고, 일해서 돈 벌어 어려운 사람 돕던지,
아니면 생계비 책임져 주는 교회에서 전임으로 열심히 목회를 하던지,
교인들은 수퍼맨 목사를 기대하지만,
나이들어 보면 수퍼맨은 없다.
약발로 사는 인생이 되니까...
리플달기
요담 (175.201.121.145)
2018-04-14 11:31:09
꿈꾸는 교회이기에
이상적이긴 합니다. 다만,자비량목회라도 사례비, 심방비, 타교회 설교등 교회내 혹은 교회간에 목사에게 직접 지급되는 구조를 유지하기 보다는 교회로 귀속시켜 사용하는 것이 목회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언급하셨고 교인들이 이에 적절하게 지급해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여튼 한국교단의 현실에서는 꿈을 꾸어도 보기 힘들 것이겠지요.
리플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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