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무덤들 사이를 거닐면서

하나씩 묘비명을 읽어 본다.

한두 구절이지만

주의깊게 읽으면 많은 얘기가 숨어 있다.

그들의 염려한 것이나

투쟁한 것이나 성취한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태어난 날과

죽은 날짜로 줄어들었다.

살아 있를 적에는

 지위와 재물이 그들을 갈라 놓았어도

죽고 나니

이곳에 나란히 누워 있다.

죽은 자들이 나의 참된 스승이다.

그들은 영원한 침묵으로 나를 가르친다.

죽음을 통해 더욱 생생해진 그들의 존재가

내 마음을 씻어 준다.

내 목슴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남하고 다투거나 그들을 비평할 필요가 무엇인가.

-임옥당-

우리 동네 어귀에 200년이 넘는 아담한 공동묘지가 하나 있다.

케롤은 함께 차를 타고 살 때면 차 유리창을 내리고

"Hi! Everybody!" 외치며 손을 흔들곤 한다.

나는 그런 그녀의 죽은자들을 향한 친밀감과 순진성을 사랑한다.

 "삶을 이해하려면 우선 죽음부터 이해 해야 한다." 는 전해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티베트 구도자들은 공동묘지에 몇 년간 살며

명상으로 수행을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울쩍할 때면 가끔 지나가는 길에 공동묘지 옆에 차를 세우고

묘비문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산책을 즐기는 묘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또, 부활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때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번쯤 들리곤 한다.

명상이니 수행이니 하는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무 생각없이 공동묘지를 몇십분간 걷고나면 왠지 마음이 후련하고 정화된 느낌이 든다.

미대륙 백인 이민자들은 동네가 형성되면 만들 중심지에 교회를 짓고

그 바로 옆에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무덤은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공동묘지 주변에 고급 주택들을 짓고 산다. 매일 곁에 있는 죽음을 바라다 보고

피부로 직접 느끼면서.

젊은 시절에 배움을 얻었던 고 함석헌 선생님은

"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 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지만 죽는 것은 자기자신이 만들어가는 운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100%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에 한 고등학교 선배님이 한국에 다녀 오셔서

"한국에 있는 동기동창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에 묘비에 어떤 말을 남길것인가 하는 문제로

열띤 고민을 했다" 시며  나에게 "어떤 말을 남기겠느냐?" 고 물으셨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아무도 읽지 않은 묘비명을 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그것도 부질없는 탐욕입니다." 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는 날과 죽는 날이 내것이 아닐진데 묘비명을 남겨서

 무삼하리오.

04/01/2018

버지니아 숲속에서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