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히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이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가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것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어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는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마음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임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짦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이브  하짐-

나는 시나 글을 읽으며 그 작가의  국적이나,  종교, 경력, 얼굴 모습, 윤관과 도덕관, 사생활 .. 등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시는 시로만 글은 글로만 읽는다.

가끔  글이나 시를 읽으며  전광석처럼 가슴에 와닿은 체험을 하곤 한다.  그런 시들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아침에 읽은 이 시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나의 삶이니까.-

사람들 만날 때도 나는 그 사람의  학력, 직업, 경력, 지위, 명예, 권력, 금력…. 등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만나는 순간  그 사람  그대로  모습으로 만나다.

 가끔 그 사람의 말이나 태도에 가슴이 뜨러워지는  경우가 있다.

에제는   거의 두달만에  케롤의  강요에 못이겨  미용실에 들렸다.  케롤이 동행했다.

“무조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세요.”   미용실에 함께  동행할 때마다 케롤이

 미용사들에게  주문하는  요청사항이다. 

그래서  내가  혼자 갈 때도 미용사들은  나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싹둑싹둑’  시원스럽게  가위질을 해 댄다.   이발이 끝내고 나서  미용사가 나에게

“ 맘에 드세요?” 하고 나의 의견을 물으면   나는 앞에 있는  거울도 쳐다보지 않는  채

 “아주 시원해 보입니다.” 하는   감탄사를 선물한다.

사실  나는 짤라야 할  머리카락 숫들이 머리에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텅 비어있는  정수리 부분를 가릴 정도의  머리카락들이 머리의 앞부분,  옆부분, 뒷부분들을

외롭게 지켜나가고  있다.  가련해 보일 정도다.  내가 남달리 이발소에 가는 것은 꺼리는  이유 중  하나다.

어제는 머리깍는 것이 귀찮다고  미용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아예  머리를 까까 중머리로 밀어버리면 어떻겠느냐?” 고  그녀의 고견을 물었다.

“짦은 머리일 수록 더 자주 다듬어 주어야 추해 보이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대답이었다.

-적고  짧은 머리일  수록  자주자주  가꾸고 다듬어야 더 아름다워  보인다.-

‘아름다움이 곧 진리다.’ 고 주장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 얽힌 이런 에피소드가 전해 온다.

타고르는  유달이 머리모양에 신경을 쓴걸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하루  간디와 함께 한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을 때의  일이다.  간디가  타고르 집에 미리 와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 오는 데도 타고르는 방안에서 마냥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조바심이 난   간디가  문을 두드리며  체비를 재촉하기도 했다. 타고르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자

간디가 “왜 그렇게 꾸물거렸느냐?” 고 짜증난 목소리로 타고르에게   물었다.

타고르 왈,

“ 타인들 눈에  아름다움을 선물하기 위해서  머리를 곱게 손질하느라고  예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고 대답했다고  한다.

-늙어갈 수록   타인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다-

지난 이주째 거의 하루종일 정원일에 몰두했다.  진달래꽃 나무들도 50 그루를  심었고

수선화도 옮겨 심었으며, 어제는 도리지 씨앗, 더덕  씨앗도  정당한 숲 속 장소를 골라  뿌렸다.

아직 잔설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서릿발이 서린 딱딱한 흙을 파서 심고 뿌리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등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육체적  운동이 되는 듯 했고,

정신도 더 맑아지고  즐겁게 느껴졌다.

놀라운 것은 숲속 잔설과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피어나고 있는 샛노란 들꽃들이었다.

그들은 연약하다. 피는 시간도  짧다. 그러나 뤌씬 더  강하다.

그래서 그런지  뤌씬 더  반갑고 아름답게 나에게 다가 왔다.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들은 짧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남아있는 시간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지난 과거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훨씬  더 아름게 살아야겠다. -

03/26/2018 아침에

버지니아 숲속에서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