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
“악형의 위험을 보고도 더욱 신앙인으로”-감리교 각 지방의 3.1운동 피해 상황과 교회 신앙형편(1919년11월)-
노종해  |  rochai@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8년 03월 14일 (수) 00:55:29
최종편집 : 2018년 03월 17일 (토) 04:12:23 [조회수 : 159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악형의 위험을 보고도 더욱 신앙인으로”

-감리교 각 지방의 3.1운동 피해 상황과 교회 신앙형편(1919년11월)-

 

노 종 해 목사 (전 감리교사학회 총무. CMRC)

 

한국 감리교회는 1919년 당시 북감리교회의 10개 지방과 남감리교회의 7개 지방이 있었다. 여기서는 1919년 연회 때 각 지방 감리사 보고서를 근거로 3.1독립운동과 피해와 교회 상황을 정리해 보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감리회 연회록은 입수치 못해 북감리교회의 상황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감리교회의 영문(英文) 연회록에는 독립운동에 관하여 보고가 거의 없다. 1919년9월3일부터 원산에서 모인 남감리교 연회록에는 송도학교 보고서에 독립운동이 보고되었을 뿐이다. 각 개체 지방의 보고서는 선교100년 부흥운동 상황을 중심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는 남감리교회의 각 지방 감리사가 선교사들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일본제국 통치에 따라 “독립소란”(Independence Disturbance)이라 보고하였고, 오히려 부흥운동에 방해가 되었다고 보고하여 3.운동에 대해 소극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cf Minitutes of Korea Annual Conference of the MECS 1919, pp55-68.)

그러나 북감리교 감리사 보고서도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보고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이후의 교회형편을 보고한 것이라는 제약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보고되어 있고, 각 지방의 3.1운동 참여와 그 피해 및 교회형편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1. 경성지방 감리사 보고와 3.1.운동

 

   
▲ 제12회 조선연회록(1919) 표지

 

   
▲ 제12회 조선연회록(1919)의 경성지방 감리사 최병헌 보고

경성지방 감리사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독립운동 이후의 지방과 교회형편을 보고하였다.

 “조선독립으로 인하여 교역자 중에 피수되어 고초를 당하므로 교회 사업이 건둔하오며, 간신히 후보자를 대리하면 미기에 또 피촉 되고 청년학생들은 탐정의 기찰과 수색의 심함을 인내치 못하여 하처로 도망하였는지 부지하오며 강도자가 무하오니 실로 답답한 사정인데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예배에 인도자가 없으므로 교우들이 기도를 하고 폐회한 사도 있으며...”

최병헌 감리사는 정동교회, 종로교회의 실례를 소개하고 있다. 정동교회는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뿐만 아니라, 김진호 목사(배재학당 교목)와 정득성 전도사도 감옥에 갇히고, 배재, 이화학당 학생들이 수감되거나 흩어져 봄부터 가을까지 저녁예배는 아예 정지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종로교회(중앙교회)는 김창준, 박희도 두 전도사가 모두 체포, 수감되고 임원들과 청년들이 흩어져 교회문서를 기록할 분도 없음을 보고하였다.(“경성지방 감리사 최병헌 보고“, 미감리교 조선연회록 1919. pp69-70.)

 

2. 인천지방 감리사 보고와 3.1운동

 

인천지방 오기선(吳基善) 감리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상황을 보고하였다. 즉, 피촉자 131명, 입감자 52명, 면소 26명, 기소 28명이 목사라 했다. 또한 지방의 어려운 형편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다. 즉 병, 소요, 조해, 풍해, 진해라 하였다.(“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 보고”, (조선 연회록 1919. p70.)

 

3. 수원지방 감리사 보고와 3.1운동

 

   
▲ 수원지방 감리사 노보을 보고/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 보고

 

수원지방 감리사 노보을(魯普乙) 선교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교회형편을 보고하였다. 노블 선교사는 “교회사업이 3월1일까지 진보하였으나, 3월1일부터 조선독립운동이 시작된 후로 교회를 심방하기에 불능한 것은 선교사들이 회당을 심방한 후에는 순사의 조사가 심하여 9월1일까지 교회시찰하기가 곤란하였다”고 보고하였다.(“수원지방 감리사 노보을 보고”, 조선연회록 1919. p71.)

피해상황으로는 목사 3명, 인도자 13명이 수감되었고, 교인 13명이 일본병사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교역자 52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남양교회, 제암교회, 오산구역의 7개 교회가 일병(日兵)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근방 329가옥이 불탔고 1,600명이 거처할 곳이 없어졌다고 보고하였다.

 

   
▲ 수원지방 감리사 노보을 보고

 

참사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용할만한 통지에 의하면 신자와 불신자를 합하여 82명이라고 보고하였다. 파괴된 교회 3개처는 “갱축”(更築)하고, 3개처는 건축 중이라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72.)

제암교회의 경우 일경에 의해 피살된 자는 23명이며, 그 지방 신자 334명 중에 173명은 피살 혹은 피수되었다고 보고했다. 이런 극심한 상황 중에서도 교인들의 신앙이 더욱 독실해진다고 보고하였다. 즉,

“악형과 총검의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엄은 언제든지 올 터인즉,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주 예수께 충성하겠다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 말라 일병이 또 올라 두렵다 함으로 이것이 어렵습니다”고 보고하였다. (조선연회록,1919. p72.) 여기서 한국교인들의 애국애족 구구에 있어 순교자적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4. 천안지방 감리사 보고와 3.1운동

 

   
▲ 천안지방 감리사 우리암 보고/수원지방 감리사 노보을 보고

 

천안지방 감리사 우리암(禹利岩) 선교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교회형편을 보고기를, “구미동(龜尾洞)교회는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곤란하였는데, 여 학교 교사와 생도가 수개월 징역하고 조일 출석하였다”고 보고했다. 또한 “천안 북구역은 회당 3개소 기도실 1개소인데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수개월 예배를 정지할뿐더러 주재 목사(담임목사)가 만주로 떠나 목사 없는 곤란을 당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래도 “지난 번 예배시작 일에 120명이 참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보고했다.(“천안지방 감리사 우리암 보고”, 미감 조선연회록,1919. p75.)

유관순 성도가 일으킨 만세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천안 동구역은 본 지역에 중심 되는 병점시장에서 지난 4월1일에 장날을 이용하여 모든 사람이 시위운동을 열심히 하는 동시에 일 헌병에게 20여 인이 참혹한 경장(景壯)을 당하는 중에 신자가 3인이었으며, 그 중 제일 참혹난언(慘酷難言)한 것은 교우의 가족이 당한 사실이외다. 주인 부부는 참살을 당하였고, 그의 자제는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고생 당하였고, 그의 여식은 3년 징역의 선고를 받았고, 그의 유자(幼子) 2명의 헐벗고 가련한 모습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외다.”(조선연회록,1919. p75.)

그러나 이러한 고난 중에도 신앙상태는 전진 중에 있다고 하였다. 즉, :큰 환난을 당하였으나 신자들이 소무퇴보(小無退步)하고 일향전진(一向前進)하여 교무(敎務)를 처리하는 중이외다“고 보고하였다.

음성구역에 대해서도 보고하였다. 즉, “음성구역은 모든 환난을 참고 금일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주께 영광을 돌리느니라”하였다.

또한 연기구역은 가장 늦게 설립된 신설교회로 신자도 많지 않지만 열심히 서로 권하여 안장호 목사가 4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 동안에도 끊이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76)

 

5. 공주지방 감리사 보고와 3.1운동

 

공주지방 감리사 테일러 선교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교회형편을 보고하였다. 즉, 주일학교 25개교를 신설할 목적으로 일하던 중 “정계변동이 기하여서 더 확장할 수도 없고 도리어 퇴보 하였나이다”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마을이 흥분되는 형편은 독립운동의 소요로 인하여 예배를 정지하지는 아니하고, 교인에 다수가 피수되었으나 독신(篤信)하는 남녀 교우들이 교회를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만 위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에 있는 동포를 위함이외다”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78)

 

6. 해주지방과 3.1운동

 

해주지방 감리사 문요한(文約翰) 선교사가 보고하였다.

“1년간 평양과 해주지방을 시찰하다 조선독립운동의 상태에 의한 소요사건과 기타의 사정으로 순행은 1차 만이었고, 대사경회와 지방교역자회에 3차 참석했다”고 보고했다. 문요한 선교사는 해주지방 14개 구역에 14명의 교역자가 있었으나, 독립운동사건으로 7명이 피수되어 7구역으로 나누어 7명의 교역자가 담당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81.)

 

7. 평양지방과 3.1운동

 

   
▲ 평양지방 감리사 문요한 보고

 

평양지방 감리사 문요한(文約翰) 선교사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피해와 교회형편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즉,

“본 지방회를 개(開)하려 할 때에 조선 목사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최하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이는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교사, 주일학교 교사의 합계가 160명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3월 1일에 이 운동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그 영향이 있다’”(조선연회록,1919. P81.)

문요한 선교사는 평양지방의 목사가 28명인데, 그 중 14명이 금고 되고 4명은 사직하였다고 보고했다. 집사목사 안수 받은 10명도 금고 되고 1명이 신병으로 휴직해 연회 때에는 2명만 남았다고 했다.

평양성내 5개처 회당에서 담임목사 6명이 금고 되어 여러 회당에서 본처 전도사인 1명과 교회임원이 합력하여 교회 사무를 처리해 나가는 형편이라 하였다. 평양 1구역만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데, 전도사를 파송하면 1주간도 못되어 또 금고 되므로 예배를 정지하는 지경에 이른 곳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일은 실패되지 아니 하였나이다”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82.)

 

8. 영변지방과 3.1운동

 

영변지방 감리사 변조진(邊兆鎭) 선교사는 한편으로 눈물이 나고 한편으로 감사하다고 하며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였다.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대사경회가 정지되고, 10월로 연기 되었다가 다시 정지되었음을 보고하였다.

또한 3월 이후 조선독립운동사건으로 인하여 목사와 전도사가 없는 곳은 영변, 태천, 신창이며, 독리 복원, 운산이며,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은 복원, 운산이며, 수금(囚襟)된 이는 목사 2명, 전도사 2명, 속장 1명, 전도부인 1명, 학교교사 2명, 학생 5명, 남녀교우 3명인데 근일 출옥된 이는 7명이며, 피신자수는 목사 1명, 전도사 1명이다“고 보고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86.)

 

9. 원주지방과 3.1운동

 

원주지방 감리사 모리스(模理是) 선교사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간략히 보고하였다. 즉, 본지방은 금년 춘기 이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하여 계삭회와 지방회를 열지 못하였다“고 보고했다.(조선연회록,1919. p78.)

강릉지방의 이익모(李益模) 감리사는 독립운동에 대하여 아무 보고가 없다.

이상에서 각 지방의 3.1운동을 감리사 보고를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가 있는 전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교회지도력이 마비되고 교회가 파괴되거나 불태워졌어도 교인 스스로가 교회를 지키며, 혹독한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신앙이 더욱 돈독해졌음을 알 수 있다.

셋째는 목사나 전도사 뿐 아니라 교회임원과 교인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감옥에 갇히거나 피살되거나 도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서 더욱 체험적 신앙을 가지고 구휼금으로 고난에 동참하며, 민족구국과 동포사랑, 형제사랑을 갖게 되었음도 알 수 있다.

넷째, 실제로 독립운동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는 그 지역에 타종교나 사회단체가 있으면 연합하여 거사하였고, 없을 때에는 기독교 단독으로 주민들과 함께 거사하였다. 이때 여선교회들은 태극기를 그리고, 학생 청년들은 연락책을 맡으며, 교회지도자들은 그 지역의 지도자 되어 만세운동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으켰다. 이상의 감리교 각 지방 감리사의 보고는 이러한 실제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10. 나가며-감리교회 3.1운동 피해 조사와 구휼(救恤)활동

 

감리교회는 1919년 11월 6일부터 11일까지 기독교 측 민족대표의 서명 장소였던 정동교회에서 12회 연회로 모였다. 이 연회에서 우선 3.1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있는 인사를 조사하는 재감인 조사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정진수(鄭鎭洙), 김종우(金鍾宇), 임진국(林鎭國) 목사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재감인 조사위원인 김종우(金鍾宇) 목사가 조사하여 보고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919년, 제12회 조선연회록. p30-31.”를 근거로 작성하였음.

 

상기 조사표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난 후 조사된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이보다 더 많은 수가 수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보고와 재감자수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앞장선 분들이다. 또한 상기 표에서 어느 지역이 적극 참여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그 순서로 보면 평양, 영변, 해주지방과 서울지방 순임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감리교회는 독립운동으로 인해 재감된 사람들과 고통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도 돌보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을 구휼 구제하는 예산을 연회원과 그 가족에게는 매월 40원씩 지급하였고, 유급 교역자에게는 매월 20원씩, 교인들에게까지도 매월 5원씩 지급하였다는 사실이다.(참고, 1919년 조선연회는 교역자 봉급 총액을 월 70원으로 결의하였다. p28.)

연회에서는 재감자와 그 가족을 돕고 위로하기 위하여 재정을 출판부 금액 중에서 2,000원, 성탄헌금 중에서 1,000원, 선교부에 청구할 금액 3,000원으로 도합 6,000원으로 예산을 세웠다. 구휼 구제금은 감리사와 재정위원에 위임하여 지불하기로 하였고, 성탄헌금이 2,000원 미만이면 반액만 쓰기로 반복기 선교사의 동의로 가결하였다.(조선연회록,1919. pp30-31.)

당시 감리교회의 뜨거운 형제우애 정신은 치하위원 보고에도 나타나 있다.

“금년 3월 이후 조선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연회원 몇 사람은 지금까지 재감 중이고, 평신도들은 고난당하는 이가 많으니 회원일동은 동심 합력하여 이 일을 당하는 이와 그 가족을 위로하오며 속히 출옥하셔서 평강한 복을 향수하기를 주님께 간구하나이다.”(조선연회록,1919.p34)

 

노종해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3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