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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까지 누리겠다구?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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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2월 01일 (목) 00:39:33
최종편집 : 2018년 02월 01일 (목) 00:42:43 [조회수 : 7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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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by Heinrich Hofmann​. Riverside Church, New YorkCreated: 1 June 1889…

 

“덧없는 영광을 얻으려고 우리의 탁월한 행위들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생각에 맞서: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 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잠언27:2)1)

 

• 우리들의 자화상

미국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교회에는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mann, 1824-1911)이 1889년에 그린 그림 ‘그리스도와 부자 관원’이 걸려 있다. 물론 이 그림은 공관복음서(마19:16-22, 막10:17-22, 눅18:18-23)에 공히 소개되고 있는 일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등장인물은 넷이다. 중앙에는 예수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부자 청년이 보인다. 왼쪽에는 헐벗은 노인과 상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있다. 건물 한 귀퉁이 기둥 위로 종려나무 잎으로 엮은 지붕이 보인다. 노인과 여인이 있는 좌측 상단에는 노을 빛 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산들이 조그맣게 배치되어 있다. 예수의 시선은 젊은이를 향하고 있는데, 그 눈빛이 자못 따뜻하다. 하인리히 호프만은 아마도 예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보셨다는 마가복음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수의 시선과는 달리 그의 두 손은 왼쪽에 있는 노인을 가리키고 있다.

장식이 많은 화려한 옷차림에 멋진 모자까지 쓴 젊은이의 표정이 시뜻하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기 위해서인지 예수의 시선을 애써 회피한다. 슬그머니 뒤로 뻗은 오른손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듯하고, 등 뒤 허리께에 얹힌 왼손은 차마 드러내 말하지는 못하지만 예수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예수의 두 손과 젊은이의 두 손의 방향은 묘하게 어긋나고 있다.

화폭의 좌측에 있는 뺨이 홀쭉한 노인은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어깨 밑에 목발을 짚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듬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는 그의 궁색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낡아빠진 누더기 옷은 그의 가녀린 상체를 감싸주지도 못한 채 아래로 흘러내렸고, 드러난 종아리는 왠지 슬퍼 보인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오랫동안 감내해온 세월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다. 검은색 상복을 입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인은 어쩌면 과부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삶의 희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인다. 여인은 갈망하는 눈빛으로 예수와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랫동안 이 그림을 들여다보노라면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임이 자각되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인물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느낌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그리고 가장 부유한 도시에 사는 뉴욕 사람들은 그 그림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까?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이 젊은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를 두고 마태는 ‘어떤 사람’, 마가는 ‘한 사람’, 누가는 ‘어떤 관리’라고 소개함으로 그의 이름을 익명의 어둠 속에 방치한다. 그는 성경에서 꽤 유명하지만 무명이다. ‘어떤‘이라는 관형사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둘이다. 하나는 그가 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어떻게 그런 부를 누릴 수 있었을까? 이런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하자.

 

• 어떤 절박함이 그를 몰아댄 것일까

부자인 그가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예수를 찾아왔다. 니고데모처럼 밤중에 슬그머니 찾아온 것이 아니다. 마가는 그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말한다. 어떤 절박함이 그를 그 자리로 내몬 것일까? 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 ‘영생‘에 대한 관심이 그를 예수 앞으로 이끌었다.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고 살 수도 있었을 그가 어찌하여 영생에 대해 묻는 것일까? 신학적 궁금증을 풀기 위한 질문이었다면 굳이 무릎까지 꿇을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젊은 날에 안락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일까? 그림자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삶의 실상과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성인(주후 480-543)은 화려하고 무절제한 로마의 귀족문화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로마를 떠나 수비아코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몇 년 동안 기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를 번민케 했던 것이다. 그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가치를 찾아 은둔생활을 했다. 이 부자 젊은이도 그런 마음의 헛헛함과 조바심에 쫓기고 있었던 것일까?

예수는 이 젊은이를 진지하게 맞아주셨다. 스승이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르치는 자이다. 중뿔나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가르치려는 태도를 취한다는 말이 아니라, 진지한 질문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질문 속에 이미 답이 있다. 예수는 그의 질문부터 교정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예수님의 응답은 말꼬투리를 잡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선함을 드러내고 상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관습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는 그런 관습적인 태도를 수용할 생각이 없다. 당연의 세계, 관습의 세계에서는 진리가 움터 나오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선함 그 자체일 수 없다. 다만 선한 삶을 지향할 뿐이다. 한 존재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바르지 않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은 경배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기 마음을 붙들어 맬 닻줄과 같은 존재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바람을 누군가에게 투영하여 그를 이상화한다. 우상이 된 사람들은 그것을 즐긴다. 우상이 되는 순간 권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 정현종은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우상화는 죽음이니/우상화하지 말라/위대하신 누구이든/우상화 법석 속에서는/우상도 시체요/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제발 우상화하지 말라//그저 좋아하고 그저/사랑하고 사뭇/찬탄은 하리로되/神格은 우습지./우상은 癌이요/우상화는 에이즈요/하여간 전면적인 죽음이니,/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하나밖에 없으면 말할 나위없이/전면적인 죽음이니―“(하략)2)

예수는 우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말한다. 그도 익히 알고 있을 계명을 가리킨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10:19).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10계명에 이르는 여섯 가지 계명이 언급되고 있다. 마가는 제10계명을 ‘속여 빼앗지 말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긍정적 서술로 변주하고 있다. 누가는 제10계명을 아예 생략하고 있다.

어쩌면 젊은이는 영생이란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뭔가를 행함으로 영생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예수는 그런 생각을 꾸짖지 않고 그의 이해 수준에 맞게 응대하신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좋은 삶의 출발점이다. 타자를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은 참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10:20). 그 젊은이의 말에 자부심이 스며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연 그는 정말 그 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 그 계명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았던 것일까?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는 그를 대견하게 보셨다. 충분히 방종에 빠지지 쉬운 삶의 조건을 갖췄건만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진력한 그의 노력을 가상하게 보신 것이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10:21)

이 젊은이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 곁을 떠나갔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였을 것이다. 영생에 대한 질문은 재산 문제 앞에서 슬그머니 스러지고 말았다.

 

• 언급되지 않은 계명

마침내 우리는 이 이야기의 핵심에 당도했다. 이 이야기의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언급하지 않으신 다른 계명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젊은이는 과연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제1계명과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제2계명이 특히 중요하다. ‘다른 신’은 일차적으로 이방 종교의 신들을 의미하겠지만, 출애굽의 맥락 속에서 보자면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제국의 종교는 대개 강자들의 편익을 위해 복무했다. 위계질서로 세분된 제국은 하층민들의 희생 위에 선 체제이다. 착취와 억압의 일상에 신음하면서도 그들은 불의한 체제를 전복할 꿈을 꾸지 못한다. 자기들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신이 그렇게 살도록 허락한 것이라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신은 각자의 운명을 그렇게 품부하는 절대적 존재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교묘한 거짓말이다. 강자들의 호의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제계급들이 만들어낸 허구의 신화일 뿐이다. 그들은 신의 뜻을 빙자하여 체제의 모순을 숨기는 역할을 한다. 단적으로 말해 제국의 종교는 강자의 이익에 복무한다. 꼭 제국의 종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가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에 발밭은 거짓 선지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미3:5a).

제1계명이 말하는 ‘다른 신‘은 약자들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신들을 의미한다. 반면 야훼는 고난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 존엄한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의 삶에 개입해서 그들을 자유의 새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부유한 젊은 관원은 나름대로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인간됨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 어려서부터 치열하게 노력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약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아직 그는 진정한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사58:6)이라고 말했다. 주린 자를 보고도 심정이 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이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젊은이는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나름대로 잘 지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신상을 만들어 섬기지 않았으면 된 것 아닌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은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문제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들은 일쑤 우상으로 변질되곤 한다. 우상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간다. 부자 젊은이는 나름대로 좋은 신앙인 혹은 좋은 사람이라면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그러한 ‘좋음’의 기반이 하나님과의 깊은 결속이 아니라 재산이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예수의 말은 그가 한사코 직면하려 하지 않았던 진실 앞에 서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산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이다. 주님이 젊은이에게 요구한 것은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자선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그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그 젊은이에게 재산이 아닌 그의 존재 전체를 요구했다. 재산이 주는 안전감에 기대어 살아온 젊은이가 진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익숙하고 편리한 세계와의 결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삶은 이처럼 엄정한 결단을 요구한다. 13세기 페르시아 시인인 루미는 한 요리사가 국자로 콩을 누르며 하는 말을 들려준다.

“뛰쳐나오려 하지 말아라.내가 너를 괴롭히는 줄 알겠지만 사실은지금 너에게 맛을 들이고 있는 중이다.바야흐로 너는 양념에 버무려져 쌀밥과 함께인간의 고귀한 생명으로 되는 것이다.네가 밭에서 빗물을 받아 마실 때이렇게 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하여라.”3)

안타깝게도 이 젊은이는 뛰쳐나가고 말았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 받는 인류와의 연대이고,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아픔으로 경험하는 것이고, 그들과 친밀하게 접촉하면서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 접촉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은 누구에게나 있다. 재산일 수도 있고, 가문에 대한 헛된 자랑일 수도 있고, 사회적 편견일 수도 있고, 지위나 지식일 수도 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영생의 길에 접어들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 엇비슷한 기독교인

일제시대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잠든 영혼을 깨웠던 김교신 선생은 신앙을 택하려거든 극상품의 신앙을 택하라고 말한다. 기왕 믿으려면 참을 향해 비약 돌진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특실을 버리고 삼등열차를 타는 것과 같다.

“주일마다 달마다 정해진 액수의 연보를 바치고, 술․담배 끊고 이서방과 비겨도 못한 것이 없고 최서방과 겨누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자족하는 신앙은 보통실의 신앙, 즉 삼등 열차적 믿음이다.”4)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 아닌가?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이런 상태에 처한 이들을 가리켜 ‘엇비슷한 기독교인’(almost christian)이라 칭했다. ‘비슷하다’는 것은 진짜는 아니라는 말이다. 평생을 엇비슷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우리로 하여금 참된 신앙을 향해 비약 돌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유대인 랍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젊은이가 대장장이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아주 유능한 대장장이의 도제가 되어 온갖 필요한 기술을 다 익혔다. 풀무질하는 법, 화젓가락 잡는 법, 큰 망치 쓰는 법, 모루 치는 법, 담금질하는 법 등을 모두 배웠다. 도제로서의 수련기간이 끝나고 그는 왕궁의 대장간에 고용되었다. 그러나 취업에 대한 기쁨은 잠시였다. 불 피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도구들을 다룰 수 있는 그의 기술과 지식이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5)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어느 교파 청년연합회 신입생 환영회에 와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탁이 하도 간곡해서 어려운 시간을 쪼개서 가서 설교를 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혼자 생각했다. 이 친구들이 강사료랍시고 봉투를 내밀 텐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정답게 맞아주었고, 예배도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무도 따라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늑장을 부리는 데도 아무도 나와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데 화증이 솟아났다. '이런 버릇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구. 도무지 예의가 없네.' 저녁에 기도를 하는 데, 그 일이 자꾸 생각이 나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순간 주님이 말을 건네 오셨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니?"
"제가 지금 화가 안 나게 됐습니까?"
"이상하구나, 너는 애당초 강사료를 주면 돌려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었니?"
"그랬지요."
"그러면 일이 제대로 된 거 아니니? 번거롭게 돌려줄 필요가 없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그래도 그렇지요. 누군가 나와서 '죄송합니다. 강사료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인사만 했더라도 저는 아주 기분 좋게 돌아왔을 겁니다."
"내가 보기엔 너를 화나게 만든 건 그 청년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너의 허영심인 것 같구나."

차마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기대했던 것인가? 그럴 생각이 없었노라고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기 욕망에 해맑게 충실한 사람보다 나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돈을 바라는 마음과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바라는 마음이 어금지금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아니면 지위를 이용해 한 밑천 톡톡히 잡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일찌감치 눈을 떠서 큰돈을 벌게 된 것일까?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그러한 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떠한 형태로든 로마에 부역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들은 부의 위험성을 가르치는 데 온통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과정도 참 중요하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비트코인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일확천금의 꿈이 빚고 있는 현실이다. 상향평준화된 욕망으로 인해 사람들은 저마다 불행하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근면과 성실이라는 지난 시대의 덕목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된 영혼들은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믿지 않는다. 그럴 시간도 마음도 없다. 금수저들은 부모의 재력도 능력이라고 말하고, 흙수저들은 무능력한 부모를 탓한다.

 

• 어떤 영생을 바라는가?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 젊은이는 정말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킨 것일까? 남의 것을 몰래 빼내지 않았다고 하여, 남의 것을 속여 빼앗지 않았다고 하여 계명을 지킨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요셉은 서른 살에 바로에게 발탁되어 애굽의 칠년 흉년을 잘 대비함으로 지혜자로 인정받았다.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많이 나자 그는 곡물을 성에 저장해 놓았다가, 일곱 해 흉년이 지속되는 동안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팔았다. 거기서 얻어진 부는 바로의 궁에 차곡차곡 쌓였다. 돈이 떨어진 이들은 자기들을 가축을 넘겨주고 먹을 것을 얻어야 했고, 급기야는 자기들의 토지와 몸까지도 넘겨야 했다(창47:18, 20). 요셉은 애굽의 토지법을 바로 제정해서 땅에서 나는 소출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도록 했다. 요셉의 지혜는 결국 전제주의 국가를 강화하는 일에 복무하고 말았다. 인간 지혜의 무상함이 이러하다. 적절한 법 절차에 따랐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존 웨슬리는 ‘돈의 사용‘이라는 설교에서 진실한 관리인으로 살기 위해서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적시하고 있다. 첫째,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라는 말은 아니다.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생명을 희생시키거나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환경을 파괴하는 일, 영혼을 파는 일, 이웃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일은 한사코 피해야 한다. 둘째,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저축하라“. 그는 재물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생활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쓰지 말라고 말한다. 우아한 미식주의, 값비싼 의복, 필요 없는 장신구에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은 기독교인의 태도로 합당치 않다. 셋째,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주라”. 자신과 가족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사용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하지만 여분의 것들은 기회가 있는 한 다른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6)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부합하는 삶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로마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생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때에, 그 부자 젊은이는 영생의 문제에 골몰할 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의 보화보다 지상의 재화를 더 가치 있게 여긴다. 그렇기에 그는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 곁을 떠난 것이다. 영생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결국 지상의 행복이 지속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영생은 바로 이 땅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하늘 혹은 영원은 공간 너머 저기, 혹은 시간 너머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곁에 다가서려는 마음속에 있다. 영생은 시간의 지속이 아니라, 삶의 층위 변화이다.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열리는 신비의 세계이다. 어느 눈 밝은 스승은 그 젊은이가 돌아가 세운 것이 바로 교회라고 말했다. 물론 공의와 공평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오늘의 교회 현실을 지적하기 위한 말이지만, 쉽게 웃어넘길 수 없다. 돈이 주는 안락함과 영생을 함께 누리려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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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안티레티코스>,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5년 11월 30일, p.189
2)정현종,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년 5월 8일, p.18
3)루미, <루미 詩抄>,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선우, 1999년 6월 1일, p.139
4)김교신, <조와弔蛙>>, 동문선현대신서84, p.78
5)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84쪽
6)<웨슬리 설교전집3>, 한국웨슬리학회편, 대한기독교서회, 2006년 5월 30일, p.285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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