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흥미로운 탈출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아 그 빼앗은 시간으로 연명하는 회색인간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눈치 챈 신비한 소녀 모모를 잡으려 혈안이다. 그러자 시간의 주인 호라 박사는 모모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기르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를 모모에게 보낸다. 카시오페이아의 사명은 모모를 잡기 위해 거리를 날뛰고 있는 회색인간들을 피하면서 모모를 안전하게 호라 박사에게 인도하는 것이다. 모모를 만난 거북이는 모모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신호하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수많은 회색인간들이 모모를 잡으려고 모든 거리에 흩어져 수색 중인데 도대체 느릿느릿 걷는 거북이는 어떻게 모모를 호라 박사에게 데려갈 수 있을까? 비결은 바로 카시오페이아의 예지능력에 있었다. 시간의 주인을 섬기는 거북이답게 카시오페이아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고작 딱 30분, 예지능력치고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지만 30분을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은 회색인간들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했다. 느릿느릿 아슬아슬하게 회색인간들을 따돌리며 마침내 카시오페이아는 모모를 호라 박사에게 데려다주는 데 성공한다.

신앙의 표현 중에 ‘섭리’라는 말이 있다. 섭리(攝理), 가늠하기 어려운 한자어 속에서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대략 하나님의 뜻, 계획, 다스림 등의 방향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해한다. 과연 사전에도 기독교에서의 섭리란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와 있다. 섭리라는 한자어를 구성하는 한자어 둘 다 ‘다스리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섭리를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심히 어려워 보이는 한자어와 달리 섭리를 가리키는 서양의 단어는 매우 간단한다. 예를 들어 섭리를 영어로는 providence라고 한다. 이 단어의 근원이 되는 라틴어 providentia를 살펴보면 이것은 다시 두 개의 단어로 나뉘는데 그것은 각각 ‘미리’ 또는 ‘앞서’를 뜻하는 ‘pro’와 ‘보다’를 뜻하는 ‘videre’이다. 이렇게 풀어놓고 보면 섭리를 가리키는 서양어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즉, 그것은 단순히 ‘미리 본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攝理)’라는 거창한 한자어와 함께 표현된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미리 보심’과 다름없다.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미리 보심이라고 이해해보면 섭리라는 말이 조금은 덜 복잡하게, 심지어 정겹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마치 반 시간을 미리 보면서 모모를 이끌었던 저 거북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과정을 미리 보시고 무언가를 마련하고 도모하신다고 생각하면 왠지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개인을 넘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에서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미리 보심 속에서 운행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희망과 위로를 좀 더 가까이 곁에 두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미리 보심을 의미하는 섭리는 은혜와도 잇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보시고 조정해놓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일 테니 말이다. 동화 속에서는 고작 반 시간의 미리 봄도 주인공의 목숨을 구하는 데 충분했다. 하물며 모든 시간과 그 경계조차 넘어 미리 보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미리 봄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든든하며, 얼마나 믿음직스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