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한 덩어리

방 한 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한 누런 호박을 바라보는 마음은 가을의 그 어떤 풍요로움보다 풍성하다. 아내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단지를 선물 받은듯이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을 본다. 시골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대여섯게 정도는 놓아 두는 그 흔하디 흔한 늙은 호박이 우리에게는 그 어떤 보화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주일 아침 예배를 마치고 지은이 아버지(한기영 성도)에게 “이따 저녁에 놀러 와요”라고 말을 건넸다. 요즈음 들어 지은이 아버지가 무척 힘겨워 하였다. 5년 전에 집을 나간 아내가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너무도 속상한 나머지 죽겠다고 농약을 마시려고 하였고 밤새 허튼 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워낙 사람이 순진하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또 그것을 치유할 방법이 없었기에 생으로 마음 고생하며 살았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와 함께 하루 나들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전등사로 초지진으로 광성포로 다녔고 맛나는 점심 한끼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씻어줄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한 달 후 다시 여행을 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딴 마음 안먹고 열심히 일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짐은 잠시뿐이었고 그의 마음은 또다시 번뇌에 빠졌다. 몇 주 전에 교회에 나오지 않았기에 집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고개를 돌리고 누워서 본채도 안했다. 일으켜 세워 놓고 성도들과 더불어 참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도중 지은이 아버지가 자신의 설움을 달래는 듯,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운 정을 느끼는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훌쩍거렸다. 그 후 지은이 아버지에게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내 주변에도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고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어리석다고 천하다고 비난만 받아왔기 때문에 지은이 엄마에 대한 갈급함도 컸었고 반대로 집떠난 그를 의지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으로 그에게 절망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짐을 조금 덜어 줄 수 있었다. 그 이후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임신을 하여 무척 고새스럽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지은이 아버지 보기에 안타까웠나 보다. 산모한테 호박이 좋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집에서 가장 탐스런 것을 가져왔다. 평상시 하던 방식으로 “사모님 호박해 잡수시겨”라고 한 마디 툭 던져 놓고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참으로 가벼워 보인다. 한 사람의 정성과 정이 담뿍 담긴 호박덩이가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만한 황금덩어리를 받는다고 하여도 이만큼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의 선물이기 대문이다.

최태육(강화서 고구리교회전도사)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