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또 말합니다. 유업을 이을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고, 아버지가 정해 놓은 그 때까지는 보호자와 관리인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 크리스마스 이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탄절 이후 채 한 주일이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재빨리 성탄의 기쁨을 잊고 다른 일에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대림절을 지나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소서, 알몸으로 오시는 주님’ 하고 기도했습니다. 머물 곳 없는 그분의 거처가 되어 드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짐은 여전히 유효한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탄절 전야 메시지를 전한 후에 드린 기도에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먼저 베들레헴의 아기로 오시는 주님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무관심을 뒤흔들고, 우리 눈을 열어 고난당하는 이들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당하는 이들을 멀리 하려 합니다. 그들과 연루되는 순간 안락한 삶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들이라면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돕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의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65)

우리 눈을 열어 달라는 기원에 이어 교황은 주님의 다감함이 우리의 무딘 감각을 깨워 우리 마을과 역사, 그리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모든 이들 속에서 주님을 알아보게 해달라고 빕니다. 주님은 지금 낯선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이미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려 하는 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질 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한 주님의 혁명적인 다정함(revolutionary tenderness)이 인정의 황무지로 변한 이 냉랭한 세상에서 희망과 다정함의 사절이 되라는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주시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혁명적 다정함’이라는 표현이 제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가슴에 모신 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단호하게 견지하는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모질어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성탄절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이러한 소명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빕니다.

•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연약합니다.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또 작은 물결이 일어도 뒤집히는 종이배처럼 위태롭습니다. 교회생활은 하고 있지만 저 깊은 진리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익숙한 생활을 반복할 뿐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 합니다. 저는 삶이 습관이 되고 있음을 자각할 때마다 시편36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을 늘 되뇌곤 합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시36:5-6)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런 품성, 곧 한결같은 사랑, 믿음직함, 의로움, 공평함, 자비로우심을 닮아가야 합니다. 온전히 미치진 못한다 해도 그 목표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이들을 일러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갈3:29) 혹은 ‘유업을 이을 사람’(갈4:1)이라고 말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은혜를 덧입고도 그런 풍성함을 한껏 누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02장 3절 가사가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두려움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몸에서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기면 물은 두둥실 우리 몸을 띄워줍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 몸에 자꾸 힘이 들어가게 하고 결과적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이처럼 불확실한 삶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세상 쪽으로 자꾸만 잡아당깁니다. 은총보다 중력의 영향을 더 받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 믿음이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갈4:3). 바울은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한 사람으로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고전13:11)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일을 반복하며 지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유치한 교훈‘이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세상의 원소들’(elements of the world)입니다. 개역성경은 그것을 ‘초등학문’이라고 옮겼고, 공동번역은 ‘자연숭배‘라고 옮겼습니다. 세상의 유치한 교훈이라는 번역은 조금 과한 의역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표현을 통해 바울이 경계하려던 것은 이방 종교의 가르침과 철학, 그리고 율법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에 솔깃해하고, 또 종노릇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적으로 말해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신들의 노여움을 살지 모른다는 두려움, 혹은 관습을 따르지 않을 때 주어질 불이익 혹은 소외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거짓 종교는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길들이려 합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세세히 규정하고 그것을 어기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주입합니다. 두려움이 주입되면 사람들은 자기 삶의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권위에 굴종하게 됩니다.

김보통의 에세이집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문학동네, 2017년 9월 22일)에 나오는 일화가 떠오릅니다. 어렵게 대기업에 입사했던 그는 4년 동안 회사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점점 소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뭘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대책 없는 그의 결정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특히 한 선배는 울타리 근처를 서성이는 어리석은 양을 타이르는 어른 양처럼 그를 타일렀습니다.

“저 울타리를 넘으면 늑대가 너를 물어갈 거야. 그러니까 답답하더라도 이 울타리를 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울타리 안에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때 되면 밥 주고, 밤이면 재워주고, 혹시라도 늑대가 나타날까 이렇게 밤낮으로 지켜주니까.”(p.33)

하지만 그는 세상이 “울타리를 둘러친 이유는 내가 세상풍파에 상처받는 것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내 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 깨달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거짓 종교는 사람들을 자기들만의 교리나 가르침의 틀 속에 가둬두려 합니다. 명분은 그들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합니다. 방황과 회의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은 우리를 위선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배신당할 것을 알면서도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신 분이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진실한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종처럼 살아가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도록 하려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율법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떨쳐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합니다(갈3:24a).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율법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명심해야 할 삶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삼가야 할 것이 무엇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도 아이를 기를 때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꾸짖었습니다. 자유의 한계도 알려주고, 남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놓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의 책 제목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때 다 배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싸우고, 속이고, 욕심 부리고, 거칠게 말하고, 멸시하고, 따돌리며 삽니다. 알면서도 살지 못합니다. 앎과 삶의 불일치,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런 불일치가 괴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처신을 합리화하기 시작합니다.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모른 척 눈감아 줄 때도 있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는 가차 없이 물어뜯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차마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자국이 제법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류의 아픔을 당신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세상의 아픔 가운데 주님과 무관한 아픔은 없습니다.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의 아픔을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녹여내셨습니다. 그러나 선의를 가장한 채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려는 성전 체제 혹은 불의한 권력과는 철저하게 싸우셨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해 돌을 던지고, 거친 욕을 하고, 기존 체제를 뒤집어 엎도록 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일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저항하셨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으로 그들의 위선과 어둠을 폭로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영혼의 자유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아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10:28)

• 자녀로 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당당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에 접속된 이들을 일러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들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한 손에는 상償을, 다른 손에는 벌罰을 들고 우리를 지배하는 폭군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롬8:15)

예수의 영을 모신 사람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평화를 만들고, 생명을 풍요롭게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아들과 딸이 아니라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그는 집을 떠났던 동생이 환대받는 것을 보고, 서러움과 분노가 폭발하여 말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눅15:29-30)

탕자는 어쩌면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맏아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눈치나 살피고, 시뜻한 표정을 짓고 살았습니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을 타락이라 합니다.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회한과 후회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어떠하든 주님은 우리가 참 자유인이 되어 살기를 바라십니다.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자유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그리스도의 손과 발로 살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새해가 우리의 희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