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년 11월 30일 (목) 00:49:44 최종편집 : 2017년 11월 30일 (목) 00:51:08 [조회수 : 7509]
조진호
목사로서 받아야 할 정규 교육을 마치고 안수를 받아 목회의 현장에 나왔지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며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 규칙을 정했는데 ‘교회력’과 더불어 ‘배움력’ 속에서 살며 매 학기마다 적어도 한 과목씩은 제대로 배우자는 것이었지요. 첫해에는 농사를 배웠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행동과 말일지라도 그에 따르는 거룩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몸에 새긴 매우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정성스럽게 살아야겠노라고 다짐했었지요.
지난 봄 학기에는 매일 독일어 뉴스를 들으며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더불어 국제적인 감각도 많이 익힐 수 있었습니다. 매일 다섯 개 정도의 뉴스 꼭지에 하루건너 북한과 관련된 뉴스가 실렸는데,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것 보다 한반도의 현 상황이 국제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동네 목사님들과 함께 이제 막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신 한수현 박사님을 모시고 바울과 바울서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고향땅이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 사회는 사람을 안주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음악가나 학자나 외국서 공부를 마치고 갓 귀국했을 때가 가장 거침이 없고 절정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의 수업은 신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수업보다도 재미있고 유익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텍스트만 가지고도 자신의 바울 신학을 펼쳐 내는 모습이 마치 귀국 연주회 무대 위에서 마음껏 기량을 뽐내는 연주자처럼 멋져 보였습니다. 박사님 덕에 저는 우리의 신앙적 편견과 교권주의, 성장주의적 건물목회 패러다임에 갇혀 있던 바울을 완전히 펼쳐진 구속사적 연표 위에서 다시금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잊고 있었던 음악 한 자락이 생각났습니다. 구스타프 홀스트(Gustav Holst,1874–1934)의 ‘성 바울 모음곡/St Paul's Suite (Op. 29, No. 2)’입니다. 홀스트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영국 가곡들을 많이 남겼지요. 그는 에드워드 엘가, 랄프 본 윌리엄스와 함께 영국 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룬 작곡가입니다. 특히 왕립 음악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본 윌리엄스와는 평생의 친구로 지냈는데 그들은 영국 전역을 여행하며 민요선율을 채집했고 그 선율들을 그들의 음악에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뮤지컬과 팝음악이 세계적인 힘을 얻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자기 민족의 선율을 사랑한 클래식 작곡가들의 선구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성 바울 모음곡’은 사실 제목과 달리 사도 바울과는 별 연관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음악의 주인공도 아니지요. 이 곡의 제목은 런던 서쪽 햄머스미스에 위치한 ‘성 바울 여학교/St. Paul's Girls' School’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홀스트는 1904년부터 1934년, 생을 다할 때까지 그 학교의 음악교사였습니다. 훗날 관현악 모음곡 ‘행성/The Planets, Op. 32’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 하버드에서 초청 강의까지 했음에도 그는 끝까지 그 학교의 교사로 남았음은 그가 그 학교와 음악교사의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아마 청소년 시절이 감성적으로 가장 풍부하고 음악을 잘 흡수할 수 있는 때임을 홀스트는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음악교육이 초등학교 수준에서 머물고 청소년들을 대중음악으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큰 민족적 비극인지 이 땅의 어른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1912년 홀스트는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모음곡을 작곡했습니다. 여학교였기 때문에 현악기가 대부분이었고 홀스트는 그 곡을 현악 합주를 위한 것으로 작곡했습니다. 그의 삶은 어쩌면 ‘피에타 여자 고아원/Ospedale della Pietà’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사계’와 ‘미사 글로리아’를 작곡했던 비발디의 그것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이 곡은 네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13분 정도의 짧지만 강렬한 모음곡입니다. 곡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I. Jig: Vivace
II. Ostinato: Presto
III. Intermezzo: Andante con moto
IV. Finale : Allegro
‘지그/Jig’는 아이리쉬 민속 춤 음악입니다. ‘오스티나토/Ostinato’는 특별한 모티브나 프레이즈가 지속적인 반복을 이루는 형식을 말하며 ‘인터메조/Intermezzo’ 음악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간주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된 음악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적 입장에서)이방인인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과 사도 바울에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그분들에게는 아마 이 곡이 ‘인생음악이’ 될 것입니다. 앞서 이 곡이 사도바울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이는 그에 관한 작곡가의 언급이 없었고 역사적 입장에서 일반화된 말씀을 드린 것일 뿐, 제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사도바울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홀스트가 이곡을 작곡할 때 사도바울과 그의 삶을 염두하고 있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홀스트의 아버지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휘자였고 당연히 홀스트는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기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자기 의에 가득해 살던 삶,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예수를 만난 사건, 아라비아 광야의 삶, 그리고 복음전도자로서 세계를 누비는 삶.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삶의 궤적과 이 모음곡의 배열은 정확히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번째 곡은 사도 바울이 만났음직한 부활예수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담고 있으며 세 번째 곡은 아라비아 풍의 멜로디가 등장합니다. 그의 대표작 ‘행성’을 통해 익히 알 수 있듯이, 홀스트는 실재로 음악의 회화적 묘사에 매우 능했으며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아라비아풍의 이국적 멜로디의 사용은 사도 바울을 염두 한 매우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곡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 개의 영국 민요의 조합인데 ‘Dargason’은 전통적인 빠른 춤곡이며 첼로가 연주하는 ‘푸른 옷소매/Greensleeves’는 소중하고 애잔한 민요 멜로디입니다. 이 두 곡의 조합은 마침내 기쁨과 열정으로 온 세상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의 삶이 펼쳐지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곡의 마지막은 순교가 아닌 열린 결말처럼 마무리 됩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스스로 역사하듯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