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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이 아니라면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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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1월 18일 (토) 20:36:21 [조회수 : 1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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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에게 과거에 이루어진 관계 회복인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이고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 곧 영원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다. 믿음으로이면서 순종으로다. 여기에 담긴 함의는 무엇일까?

신자에게 관계 회복의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과거에 받았다. 하나님이 조건없이 사랑하셔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모든 이들에게 예외가 없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는 말씀과 같다. 여기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요 17:3). 체험적인 앎이기에 사랑하는 것 또는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작정하신 모든 사람이 다 믿더라는 뜻이다. 복음이 들려질 때에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행 16:14).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한다. 오직 은혜이다.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또는 순종으로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또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신자 자신만의 자원으로 가능할까? 아니다.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 안에서 가능하다. 신자가 육체의 욕심대로 살지 않게 하신다. 은혜이다. 하나님 의지 곧 믿음이나 하나님께 순종은 그 역사의 결과이다. 의지함으로 또는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역시나 전적 은혜이다. 은혜를 하나님 편에서 다 책임지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잘못되었고 벗어나야 한다.

이제 진지하게 물어보자. 불가항력적 은혜로 신자가 되면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의지하기도 하고 의지하지 않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순종하기도 하고 순종하지 않기도 한다. 신자의 평생은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랄 수 있다.

의지하지 않으면 또는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의지하지 않아도 또는 순종하지 않아도 영원한 구원은 받는가? 바울 사도에 의하면 신자라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육체의 욕심대로 살면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인데, 썩어질 것을 거둔다(갈 6:8). 이런 결과는 신자가 육체의 욕심으로 성령의 역사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이다(고후 6:1).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탈락하는 것이다.

성경엔 그와 관련한 구체적인 예시들이 많다. 배교(히 6:4-6), 믿음에서 파선하고 선한 양심을 저버림(딤전 1:19), 성전 곧 교회를 더럽힘(고전 3:16), 어미와 음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결정적 범죄(고전 5:5), 윤리적 범죄의 지속(고전 6:8-11),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림(마 25:14-30, 고전 9:27), 삶에서 약자나 고통받는 자로 찾아오시는 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마 25:31-46),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것 곧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것(마 18:6-9) 등이 그 예다.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엔 은혜에서 탈락하는 일은 없다는 성도의 견인을 말씀하는 듯한 성구가 많다(요 10:27-28, 롬 8:33-39, 고전 1:8, 고전 3:15 등). 그 성구들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고전 3:15의 경우는 분파의 상태 곧 사망에 이르지 않는 범죄의 상태에서 심판이 집행될 경우에 대한 기술이다. 그 시점에선 그래도 불 가운데 받는 것같은 구원을 얻는다. 언급된 성구들은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은혜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둘은 다른 건데 일반적으론 인식되지 않고 있다.

종교개혁의 한 모토가 오직 성경이다. 오직 루터, 오직 칼뱅이 아니다. 오직 알미니우스나 오직 웨슬리가 아니다. 현대 개신교회가 오직 성경이라고 쓰곤 오직 루터, 칼뱅, 알미니우스, 웨슬리로 읽고 있진 않는가 의문이다.

다른 한 모토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지 의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선 좀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거리가 있다. 성경에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과 다른 내용으로 얘기되는 신은 우상일 수 있다. 칼빈주의에서 얘기되는 신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게 하는 분이다. 알미니안주의에서 얘기되는 신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없고 자유의지만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주는 분이다. 성경의 진술과는 다른 분이다. 현대판 송아지 우상인 건 아닐까? 그런 신을 지속적으로 전하는 건 우상숭배일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것과 관련하여서도 중요하다. 불가항력적 부르심과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경외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기에. 하나님과 친근하면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며 친근한 삶말이다. 사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마음을 두고 힘을 쓰는 신자는 교리가 어떠하든지 별 상관이 없다.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건 순종하지 않는 신자들이다. 그들에게 잘못된 교리는 피난처 역할을 한다. 거짓 안전에 빠지게 하기에. 회개 촉구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만큼 강력하지 않고 미약하다. 지금 한국 장로교계에서 보이는 어떤 목사들의 모습은 그 실예들이다.

지금까지의 진술을 들으면 뒤따르는 질문이 있다. 그럼 어느 정도의 순종이어야 영원한 구원을 받는가?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에 관해선 성경이 아무 언급도 않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우리가 알 순 없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매일 매순간 깨어 경성하라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말씀사역자의 입장에선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는 사역의 문제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말씀 전파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듣고 행하는 것이 교회에게 절실하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섬김으로서.

모든 신자는 최종심판대에서 신자가 된 이후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영원한 구원인가 아니면 썩어질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였다면 전자로, 자신의 인간적 욕심에 토대한 자기 세계를 구하였다면 후자로 결정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신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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