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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인가?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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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1월 10일 (금) 08:53:41 [조회수 :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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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그분과의 관계가 구원의 사안이다. 구원의 책인 것이다.

구원과 관련하여 종교개혁에서 ‘오직 믿음으로’를 외쳤다. 성경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있다. 엡 2:8~9, 딛 3:5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사람의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개혁자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술도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 다 바울 사도의 진술들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진술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구원과 무관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했다. 여기에서 ‘너희’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1:6). 그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했다. 이 구절은 전혀 다른 두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신자에게 나타날 수 있는 두 가능성에 관한 진술이다. 위의 성구들은 사는 것과 구원이 직결되어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다.

두 경우는 표면적으로 명백하게 상충하고 있다. 전자는 주고 후자는 부차적인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혁자들의 주장은 그러한 관점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개혁자들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는가?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전 3:16)고 진술했다. 어떤 성구도 하나님의 감동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성구를 주로 생각하고 어떤 성구를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겸손하게 그 말씀들을 받아야 한다. 해석은 두 내용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를 부차적으로 만드는 해석이 아니라 둘 다 같은 비중으로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석이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할까? 문맥을 바르게 고려하여 각 성구들을 해석하면 가능하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라고 말하게 되는 성구들은 문맥을 잘 살펴보자. 엡 2:8~9, 딛 3:5 등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던 사람이 과거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자가 된 것에 관한 진술이다. 구원얻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가 죽음이다. 그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 사람은 원래 그 상태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그 상태에서 불러내셨던 것이다. 그 방편은 복음이 들려질 때에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은혜이다(행 16:14). 그 은혜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한다.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단절된 관계에서 회복되었다. 구원 얻었던 것이다. 이는 당사자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믿음으로’인 것이다.

성경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 구원만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관계가 회복된 신자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있다(딤후 4:18). 영원한 구원이다. 영원한 구원이란 단어는 성경에 단 한 차례 나온다(히 5:9).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다(벧전 1:4). 곧 영원한 구원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영원한 구원도 믿음으로다.

오직 믿음으로인가? 오직 믿음이라면 믿음이 아닌 다른 무엇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단 한 차례 영원한 구원이란 표현이 나오는 히 5:9을 보자. “~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구절에서는 순종과 영원한 구원이 직결되어 있다. 영원한 구원이 순종과 직결되어 있다면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 것이다.

마 7:21, 롬 8:13, 갈 6:8 등은 모두 이와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특히 히 12:14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성화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벧전 1:5에서 믿음은 신자가 되는 것과 관련되지 않고 신자가 된 후에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신자에게 삶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의 사안이다.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베드로 사도는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 유업을 바라며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유업을 잇게 된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생각해보자. 하박국서와 아브라함을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사용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이 삶에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각각의 시점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도 새 언약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이신칭의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 순종한다.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분이 로마교회에 원하시는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른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 뜻을 어기는 삶에 대해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하신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는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다. '믿음으로'이다. '오직 믿음으로'를 말한다는 개혁자들의 관점은 로마서를 잘못 읽은 결과이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믿음과 순종이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고 바꾸어도 의미는 변화가 없다. “아들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하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라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관계 단절인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은 신자에겐 과거에 이미 발생한 일이다. 오직 믿음으로이다. 신자에게 미래의 일인 영원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가 아니다. 믿음으로이다. 또한 순종으로이다.

앞에서 언급된 성구들 곧 표면적으로 상충하는 듯한 성구들은 실제론 전혀 상충하지 않는다. 각각은 다 문자적으로 성립한다. 진리인 것이다. 칼빈주의에선 전자를 주로 삼고 후자를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이다. 벗어나야 한다. 알미니안주의에선 반대의 경향이 있는데, 역시 잘못이다 벗어나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이어서 많은 기념 행사가 있었다. 과거의 관점을 되풀이하는 상황이다. 이젠 종교개혁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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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99.XXX.XXX.49)
2017-11-19 21:45:30
칼빈이나 루터가 성서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종교 개혁은 없었겠죠.
요즘 신자들의 고민이 뭐냐하면 바로 성서예요.
성서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버렸는데,
여기에 준한 신학은 거의 쓰레기가 되어 버린거죠.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이러한 경향은 인식하지 못하고,
목사들끼리 신학이 어떻다고 떠들고 다니죠.
이제는 성도들한테, 성경에 대한 성서고고학, 그리고 비평학적인 점을
좀 더 명확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설정이 가능합니다.
종교개혁, 칼빈 루터가 성서 비평, 그리고 고고학을 알았다면,
그들 성격에 아마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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