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이 단어는 신앙인을 설레게 하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참 오랜만에 성지순례란 이름으로 초기교회 성도들의 발자취를 밟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목사 내외의 성지순례를 위해 기도하며 희생해 준 성도들에게 감사한다.

목사가 없는 사이 동분서주했을 것이 뻔한 장로님과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했을 성도님들의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게 모두의 바람대로 무사히 건강하게 성지를 밟고 돌아왔다. 그런데 왜 이리 허전할까. 성지를 가긴 했었던 걸까. 성지는 정말 있었던가.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다.

성지는 없다. 단언컨대 없다. 내가 밟았던 땅에 교회는 우뚝 솟아 있었다. 스페인의 여러 교회들, 특히 가우디의 작품인 성가족교회는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가히 천재가 아니면 시작하지 못했을 건물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고 마는 건물, 위대한 건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훌륭한 건물은 있었다. 건물 안에 있어야 할 성도는 없었다. 교황은 성가족교회를 빨리 마무리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조만간 완성될 것이다. 더 멋진 모습으로 성가족교회는 거기서 관광객(순례객)들을 맞을 것이다.

성도를 맞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순례객을 맞을 것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건물의 용도는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성전이 중요할까, 하나님이 중요할까. 교회가 중요할까, 성도가 중요할까. 도무지 모를 회한이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대성당을 비롯하여 바울의 참수터에 세워진 교회까지 둘러보며 든 생각은 스페인에서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단한 정성과 가공할만한 돈을 들여 치장해 놓은 건물들, 그리고 성인들과 아이콘을 찬양하는 조각들,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가.

그저 지금도 여전한 생각은 성지는 없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발자취 위에 위대한 건물들이 들어서는 호강을 누리기는 했지만 성지는 없다. 성지라고 한다면 건물이 아닐 터. 성지라고 한다면 땅은 아닐 터. 그렇다면 성지에 성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관광객(순례객)에게 입장료를 받는 건물(교회)은 많았다. 순례객들이 삼삼오오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 간혹 보이고, 천주교인들이 미사를 보는 경우도 보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관광객이 교회마다 빼곡했다. 인산인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이게 교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둘러 본 교회들 앞에서 왜 나는 심술스럽게도 한국의 사찰이 생각나는 걸까. 길을 가로질러 담을 치고 쪽문 하나 만들어 놓고 문화재관람료라는 걸 받는 사찰 말이다.

성지는 있다. 내 마음속에 있다. 성도들의 신앙 속에 있다. 내가 이번에 밟은 곳은 성스런 땅이 아니라 성스런 이들이 목숨 바쳐 사명을 감당했던 땅이다. 건물을 보며 건물만 보지 않는 자에게 성지는 있다. 성지로 찾아가야만 보이는 성지가 아니라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을 성지 되게 하자. 우리 각자가 성도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 김학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