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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참된 믿음을 말하다
권진호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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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25일 (수) 03:09:50
최종편집 : 2017년 10월 25일 (수) 07:51:38 [조회수 : 1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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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참된 믿음을 말하다

 

권진호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I.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500주년, 이 시간을 축하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들이 있다. 종교개혁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의 문화, 사회, 정치 분야에 영향을 끼친 ‘세계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사건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 즉 칭의론에 있기 때문이다. 칭의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사건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칭의는 인간 스스로 깨닫거나 종교적인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핵심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가르침이 루터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해되고 비판받고 있다. 즉, 한국 교회의 문제를 루터의 ‘오직 믿음’을 가르친 결과로 보고 이제 선행을 강조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한다. 또한 믿음만 강조한 루터의 한계를 넘어서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여 종교개혁을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이 내포하는 바는 루터의 칭의론에서 지시하는 ‘믿음’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분하지 않으며 선행으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본질과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며 루터 신학의 핵심인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른 믿음과 선행은 무엇인가? 필자는 루터의 신학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소위 1520년 종교개혁 작품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를 다루고자 한다. 이 작품은 루터가 ‘그리스도인 삶에 대한 요약’으로 간주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철저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II.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배경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의 모습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서술한 작품이 드문 탓이다.

루터는 면죄부관행을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공포함으로 로마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당시 면죄부판매 책임자였던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95개 논제를 로마에 전했고, 로마 교회는 루터에 대한 소송절차를 시작하였다. 루터가 1518년 카예탄의 심문을 받고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을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로마 교황청은 우선 1520년 6월 15일 파문위협교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로 루터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런 위협은 루터에게 통하지 않았고, 교황청은 1521년 1월 3일 교서 “로마의 교황에게 어울리는 것”(Decet Romanum pontificem)을 통해 루터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로마의 파문 위협과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던 시기 중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두 가지 이유에서 저술하였다. 첫 번째는 전략적인 고려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작센의 귀족 밀티츠(Karl von Miltitz)가 루터의 일을 놓고 로마 교황청과 루터 진영사이에서 중재하려는 시도와 관련된다. 밀티츠는 루터에게 자신의 견해를 가능한 한 논쟁적이지 않게 작성하여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서술의 필요성이다. 루터는 파문의 위협과 그 결정 과정 중에 경험한 긴장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루터 자신으로 하여금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복음의 본질에 대한 집중적 서술의 필요를 느낀 것이다.

1520년 10월 10일, 교황의 파문위협교서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난 후, 루터는 교황에게 보내기로 한 개인적인 서신에 작은 글을 함께 보내기로 밀티츠에게 약속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였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칭의론이다. 이것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서 시편과 바울서신들을 강의하면서 줄곧 숙고해온 주제이다. 루터는 인간의 죄와 의에 대해 학문적으로 숙고하는 동시에 이 시기에 출판된 비텐베르크의 설교들과 논고에 자신의 새로운 통찰들을 덧붙였다. 죄와 의라는 주제를 다룬 루터의 첫 논고는 1518년 말에 나온 “세 종류의 의에 관한 설교”와 1519년 초에 나온 “두 종류의 의에 관한 설교”이다. 루터는 1520년 초에 “선행에 관하여”라는 작품에서 ‘믿음에 의한 의’라는 주제를 다시금 다루었다. 루터는 십계명에 대한 해석에서 오직 믿음으로 제 1계명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으며, 믿음만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그 밖의 모든 행위를 선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라고 설명하였다. 1520년 가을에 루터는 동일한 주제를 다른 어조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다루었다.

 

III.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1. 신학적 인간 이해

 

믿음과 행위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동시에 요약이며, 또한 루터 신학의 중심 요소이다. 믿음과 행위(무엇보다도 이웃사랑)는 루터에게 있어 인간이 하나님 및 이웃과 갖는 기본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인간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존재이고, 이로부터 이웃사랑에 대한 동기가 생겨난다는 것이 기본구조이다. 루터는 믿음과 이웃사랑에 강조점을 바꿔가면서 강조할 뿐 항상 성경에 일치하여 주장하는데, 한편으로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웃사랑을 통한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이웃사랑은 루터가 기독교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행위의 본질이 무엇이고 이 두 요소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루터의 인간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을 갖고 있다.

루터는 인간을 철학적-인간론적 관점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점에서 관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그리스도인)은 고후 4:16의 속사람과 겉사람, 갈 5:17의 영과 육의 개념에 근거해 영적인 본질과 육적인 본질로 되어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본질에 따라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이고, 세상 앞에서 육적인 본질에 따라 육적, 외적, 옛 사람이다. 여기서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은 구원받은 영적인 본질이고, 육적, 외적, 옛 사람은 죄된 본질에 속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본질은 사실 서로 분리됨 없이 연결되어 있으나, 분명히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우선, 믿음은 그리스도인을,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세상 속에 사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육적, 외적, 옛 사람으로서 이웃을 섬긴다. 인간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여 생긴 믿음은, 인간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체인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새사람과 대조되는 옛사람은 두 가지 종류로 이해될 수 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구별은 한편으로 서로 다른 두 존재방식이라는 이원론의 의미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동일하게 구성하는 두 측면의 병존이라는 이분법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루터에게는 두 가지 이해가 다 가능하다.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된 인간은 죄인된 옛 사람과 전적으로 대조된다. 하지만 동시에 새 사람은 이 세상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이 세상의 외적, 육적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새 사람은 한편으로 점점 계속하여 옛 사람과 거리를 두고,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외적, 육적 존재는 믿음에 의해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그러므로 루터는 신약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인간을 한편으로는 점차로 극복되어야 할, 믿음 이전의 인간의 실재로,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의 중립적인 장소로 이해한다.

루터에게 구원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영적 본질, 즉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에 해당한다. 루터는 또한 하나님 앞에서 유효하고 하나님과 관련을 갖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인 본질(인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내적, 새사람의 중심은 영혼(마음/양심)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은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이 작용하며 다스리는 영역을 인간의 내적 영역인 영혼으로 보았다. 그곳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의 삶이며, 믿음이 작용하는 곳이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여 칭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런데 영혼의 구원, 즉 새로운 사람은 인간론적 구성으로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용을 통해 발생한 사건의 결과이다.

 

2. 영적, 내적, 새 사람: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

 

1)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a)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규정된다

루터는 “의롭고 자유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으로 본다. 그럼, 어떻게 영적, 내적, 새로운 사람이 되는가? 루터는 영혼을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에서 규정한다. 첫째, 영혼은 외적인 것(의식주, 명상, 심지어 영혼의 노력들)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외적인 것은 영혼을 구원하지도, 의롭게 하거나 악하게 하지도 못한다. 이는 믿음이 없는 자가 의식주와 같은 외적인 것에서 번성할 수 있고, 반대로 믿음이 있는 자가 외적인 것에서 고난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둘째, 영혼이 의롭게 되고 구원받기 위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요 11:25; 마 4:4). 영혼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만 있으면, 영혼은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꾸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영혼은 어떤 것으로도 도움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서는 “생명, 진리, 빛, 평화, 의, 구원, 기쁨, 자유, 지혜, 힘, 은혜, 영광,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러한 말씀으로 살고 이러한 말씀에 의해 규정된다. 말씀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규정한다면, 영혼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b) 말씀의 바른 사용은 오직 믿음이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롬 1:1-6). 그런데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혼이 설교를 믿으면) 영혼을 먹이고 의롭게 하고 자유케하고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함으로 의롭고 참되고 바르게 되며 모든 죄가 용서된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이다”(롬 10:9; 롬 1:17)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모든 계명을 간단하면서도 온전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영혼의 구원은 행위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즉,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통하여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영혼을 다스리고 의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인데, 말씀이 인간의 내적인 영혼을 규정하고 믿음 안에서 의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 구원의 원인이며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에, 행위는 구원사건에서 전적으로 배제되며 믿음은 영혼 구원의 도구로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객관적인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관적인 조건은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heart)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롬 10:10의 말씀처럼, 믿음이 영혼을 다스리고 의롭게 한다. 영혼은 외적인 행위나 경건 훈련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영혼은 오직 믿음 또는 불신앙에 의해 구원받거나 저주받을 뿐이다.

 

c) 하나님의 구원방법: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홀로 명령하시고 홀로 성취하신다

루터는 성경에 그렇게 많은 행위와 율법들이 규정되어 있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숙고한다.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과 약속(또는 율법과 복음)으로 나눈다. 먼저, 계명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 가르쳐 주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는다. 오히려 계명이 주어진 이유는 “계명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여 선에 대한 무능을 깨닫고 자신의 능력에 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계명을 통해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자이고 자신 안에 의롭게 하고 구원받게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되어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고자 한다. 이때,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이 돕는다. “네가 율법을 성취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욕망으로부터 자유하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 평화, 자유, 그리고 모든 것이 너에게 약속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은 행위로는 성취가 불가능하며 하나님 약속에 대한 신뢰, 즉 오직 그리스도에 믿음을 통하여 간단하고 신속하게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계명의 성취를 믿음에 의존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질 것이고,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계명이 요구하는 것을 선물로 주며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그렇게 하여 계명과 성취 모두 하나님에게만 속하도록 하셨다. 루터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선행은 “하나님만이 스스로 명령하시고, 또한 하나님만이 홀로 성취하신다”라는 명제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수동적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는 믿음으로만 참여할 뿐이다.

 

2) 믿음의 능력: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결과

a) 믿음은 영혼과 하나님 말씀을 하나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참되며 의롭고 모든 선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믿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영혼은 말씀과 전적으로 하나가 되고 심지어 완전히 동화되어 약속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약속의 모든 능력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영혼은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의롭고 거룩하며 참되고 화평하며 자유하게 되고, 모든 선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루터는 여기서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매달릴 수 없으며 영혼 안에 거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에 비교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오직 믿음과 말씀만이 영혼 안에서 지배하기 때문이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쇠가 불과 하나 되어 벌겋게 달아오르듯이, 영혼은 믿음을 통해 말씀에 동화되어 말씀처럼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넘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롭게 되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b)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i) 최고의 예배로서의 믿음

믿음에는, 믿는 대상을 지극히 큰 존경으로 숭배하며 믿음의 대상을 진실하고 존귀한 존재로 여기는 일이 뒤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그분에게 진실하고 의로우시다고 높여드리는 것에 비교할만한 다른 존경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진실하고 바르고 의로운 존재로 여기는 것이며, 이것은 영혼이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돌려드리는 것, 바로 ‘최고의 예배’인 것이다. 이 예배에서 영혼은 하나님이 옳다고 시인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최상으로 만드시고 계획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영혼이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지 않겠는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계명의 완전한 성취는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혼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도 영혼을 존중하시며 믿음을 보시고 영혼을 진실하고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결국, 믿음은 진실 그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삼상 2:30).

 

ii) 믿음은 행위의 주인이다: 계명의 성취로서의 믿음

믿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보물이다(막 16:16). 믿음은 율법을 쉽고도 신속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루터는, 믿음만이 모든 계명을 성취하며 어떤 행위 없이도 의롭게 만드는 근거를 십계명, 특히 제1계명을 예로 설명한다.

루터는 십계명 가운데 제 1계명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첫 계명을 지키는 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게 하는 관건이고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열쇠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 1계명 “하나님만을 경외하라”(출 20:2)는 오직 믿음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러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진실하시며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명성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다른 존재들을 제외한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간의 마음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고백하는 마음의 믿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믿음에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전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는 마음이 순결하지 않으며, 마음의 순결함 없는 행위는 올바르거나 순결하지 않다.” 결국, 십계명 중 첫 계명은 행위가 아닌 오직 마음, 순전한 믿음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 그래서 루터는 믿음을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들의 성취”라고 부른다. 믿음으로 첫 번째 주요계명을 성취하는 자는 또한 다른 모든 계명들을 확실하고 쉽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믿음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성하는 주체인 것이다. 루터는 행위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행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행위 자체는 죽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행위들을 수행하는 ‘자발적인 행위자’와 ‘행위의 주인’인데, 바로 마음의 믿음이다. 믿음이 행위의 주어, 즉 행위자인 것이다. 따라서 행위에 앞서 먼저 믿음을 통하여 계명이 성취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행위가 뒤따라 올 수 있는 것이다.

 

c) 믿음은 영혼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의 직무에 참여케 한다

i) 믿음은 영혼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화되게 하여 모든 은혜로 충만하고 자유하고 구원받도록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루터는 믿음을 통한 영혼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나타내기 위해 에베소서(엡 5:31-32)와 중세의 결혼신비주의를 결합하여 사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혼의 법적인 관계, 즉 각각의 소유물의 공유인데, 세 단계로 설명된다.

① 루터는 엡 5:31에 근거하여 결혼의 내적인 결합을 신부인 영혼과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연합에 적용하여 설명한다. 연합은 곧 소유의 공유를 뜻한다. 믿는 영혼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며, 그리스도는 영혼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여기서 루터가 특히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소유와 영혼의 소유의 대조적 특징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영혼이 소유한 죄, 죽음, 지옥과 저주와 대조된다. 그러나 믿음의 중개를 통해 영혼의 소유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소유는 영혼의 것이 된다. 루터는 이것을 ‘놀라운(즐거운) 교환’이라 부른다.

② 루터는 교환의 기독론적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파멸에서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소유물(의, 생명, 구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죄와 죽음과 저주라는 파멸의 세력들에게 굴복할 수도 없었고 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파멸의 세력들을 완전히 저주하였다.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파멸 사이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승리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로서 영혼의 신랑이 된다. 이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혼반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신랑의 구원의 소유물은 신부에게 주어져 신랑과 신부의 공동재산이 되는 것이다.

③ 루터는 또한 약혼의 비유를 사용한다. 영광과 부요함이 가득한 왕의 결혼식에서 신분의 한계는 철폐된다. 부유하고 사랑이 많은 신랑 그리스도는 불쌍하고 죄 있고 무시 받는 창녀를 신부로 취한다. 영혼은 비록 창녀 같은 존재였지만 믿음을 통하여 생명의 말씀 안에서 목욕하고 정결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것으로 치장된 신부가 된다. 그녀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놓여졌고 그리스도 안에 삼켜졌기 때문에, 죄가 그녀를 추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이제 신랑으로부터 풍족한 의를 가지게 되어, 비록 모든 죄가 그녀에게 놓여 있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죄에 대항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내가 믿는 나의 그리스도는 죄를 짓지 않았고, 그의 모든 소유물은 내게, 그리고 내 소유물은 그에게 속해 있다.”

 

ii) 믿음의 특권: 왕직과 제사장직에 참여

루터는 믿음의 특권, 즉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믿음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믿는 영혼에게 ‘즐거운 교환’을 통해 선사하는 것에 대해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장자이기에 제사장 및 왕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왕직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나라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듯이(요 18:36), 의와 진리와 지혜와 평화와 구원과 같은 영적인 것들을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두 가지 본래적 임무, 즉 우리를 위한 중보와 변호, 그리고 성령의 살아있는 가르침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행한다.

그런데 왕과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직위는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결혼을 통해 즐거운 교환이 일어나,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며 왕인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왕이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만물 위에 높이 올려져 영적인 관점에서 만물의 주인이다.” 영적으로 만물의 주인이라는 것은, 어떤 것도 그를 해칠 수 없고 오히려 굴복되어 그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고 기여한다는 의미이다(롬 8:28; 고전 3:22-23). 그리스도인의 권세와 능력은 고난에서 면제되는 이 땅 위에 속한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될수록 더 고난을 겪고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권세란 “약함 가운데 온전해지는 능력”(고후 12:9)이다. 즉 영적인 권세와 통치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믿음을 통해 유익이 되며, 심지어 십자가와 죽음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고 돕는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의 직무를 지닌다. 이 직무는 왕의 직무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오직 제사장직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을 자신과 동등한 제사장으로 삼았기에, 그리스도인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아바 아버지라”라고 부르며 중보하고 전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제사장직의 영예는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갖는 두 직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직분은 왕의 권세를 가지고 모든 것, 즉 죽음, 생명, 죄 등을 지배한다. 반면, 제사장의 영광으로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저들이 기도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저희 기도를 들으사 구원하시리라’(시 145:19-20)고 쓰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직분이 이러한 영광에 이르는 것은 분명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3) 믿음과 설교

a) 믿음은 설교를 들음에서 나온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복음(롬 1:1-6)에 관한 설교에서 믿음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행위를 단지 역사적으로 혹은 삶을 위한 모범으로 제시하거나, 인간의 법률을 가르치거나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설교들을 비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설교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존재와 행한 모든 일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며 굳세게 하는 설교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왕이며 제사장이고 만물의 주가 되며,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께 열납된다는 사실이 바르게 선포될 때, 참된 믿음이 생기고 유지될 수 있다.

믿음의 본질. 루터는 ‘붙잡는 믿음’(fides apprehensiva)을 믿음의 본질적 속성으로 본다. 믿음은 믿는 대상과 서로 함께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확고하게 신뢰하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을 붙잡고 자신의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루터는 ‘붙잡는 믿음’만이 그리스도를 진정하게 믿는 믿음이며 그 외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라고 보았다(fides historica). 믿음이 의롭게 하는 이유는 “믿음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붙잡고 소유하기 때문이다.”

바른 설교의 열매는 마음(heart)이 기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죄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의 덕분에 모든 죄는 삼키운바 되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으로서의 믿음은 강력하여 어떤 것도 이 연합을 파괴할 수 없다. 그래서 믿는 자는 바울처럼 죽음과 죄를 조롱하며 담대하게 승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5:55-57).

 

b) 설교 방법: 회개와 믿음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모두 설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속해 있으며, 상대적 관계 안에서 각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 율법을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을 두렵고 놀라게 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와 생활의 개선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즉시 은혜의 말씀과 용서를 약속하는 말씀을 함께 설교해야 한다. 이는 믿음에 관해 가르치고 믿음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나오고, 믿음과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나온다(롬 10:17). 루터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설교의 필요성을 그리스도가 “회개하라”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는 믿음의 말씀을 첨가한 사실에서 찾았다. 루터는 설교에서 회개와 믿음이 생기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주는 위협과 두려움으로 낮아져서 자기를 인식하게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위로를 받으며 높여진다.”

 

3. 새 사람의 삶: 세상 앞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1) 선행의 의미와 필요성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주장에 직면하여 우리는 인간의 행위가 루터의 신학에서 어떤 가치와 역할을 하는 것인가 질문할 수 있다. 만일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구원한다면, 무슨 목적으로 선행이 명령된 것인가? 행위는 구원과 관련해서는 전혀 의미가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앞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또한 세상의 관계속에서 살고 그 가운데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터에게서 행위의 필요성은 인간이 육신과 결합되어 있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위가 시작된다.

속사람은 의롭고 자유하고 구원받았지만, 이러한 구원은 루터에게 있어 육체를 근거로 오직 이웃에 대한 섬기는 사랑으로 실현된다. 육체는 의롭게 된 사람에게 삶의 성화를 위해 필요한 장소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인은 믿는 자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자발적으로 기쁨을 가지고 값없이 섬겨야 하는데, 이러한 사랑의 섬김은 항상 육체로 섬기는 것이다. 이웃사랑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뒤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삶 속에서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한다. 그리스도인은 게으르게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과 철야와 여러 근신의 노력들을 통하여 육신을 단련시키고 굴복시켜 육신이 속사람과 믿음에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 즉, 영혼은 하나님에 일치하고, 육신은 영혼에 일치되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성령의 역사와 거룩하게 되어야 할 육체사이의 중간적 매개물이라고 볼 수 있다. “속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일치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속사람은 ... 모든 좋은 것들을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제 그의 유일한 과제는 기쁨을 가지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자발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2) 선행의 종류

루터는 선행을 자기 자신의 육신을 (속사람에게) 복종시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눈다. 첫째, 선행은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사람(믿음)과 겉사람의 일치이다. 겉사람은 속사람에게 종속되어야 하고 속사람과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의 욕망과 정욕에 빠지지 않고, 욕망을 속사람과 일치하게 형성한다. 둘째, 선행은 사심없는 이웃사랑이며 인간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실현하는 것이다.

 

a)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육신을 영혼에 복종케 함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기 위해 선행을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되고 기쁨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랑하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육신 안에서 저항하는 의지, 즉 세상을 섬기고 자신의 것을 추구하는 의지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영이 그 의지를 억압하고 제한하려고 한다(롬 7:22-23; 고전 9:27; 갈 5:24). 루터는 “로마서 서문”(6-7장)에서 옛 사람을 죽이고 육신을 제어하는 것을 믿음의 과제로 설명한다. 여기서 루터의 중요한 신학 주제인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등장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 안에는 죄와 정욕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죄된 육신을 제어하고 정욕을 죽이며 육신이 영에 순종하도록 전 생애 동안 육과 싸워야 한다. 물론 그 안에 남아 있는 죄는, 믿음 이전의 죄와 다르다. 이제 죄는 죄와 싸우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정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육신에 대한 행위들은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믿음만이 의롭게 하기 때문), “육신을 순종하게 하여 그 모든 악한 탐심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의롭고 정결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육신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탐심에 따라 게으르게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육신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많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결국 선행이란 육신을 순종시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믿는 자의 행위는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심만을 바라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b) 이웃에 대해: 기쁨과 자발적인 이웃사랑

그리스도인들은 육신 안에서 살 때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산다. 아니,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참되고 자유하게 섬기기 위해” 육신을 순종케 한다(롬 14:7-8). 이웃에 대한 행위의 동기는 오직 이웃을 섬기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행위들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해지는 구조로 정해져 있다.

이러한 이웃사랑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넘치도록 부유하게 모든 것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갖고 있는 잉여분의 행위들과 삶을 통해 이웃을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으로 섬기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둘째, 사랑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고 의이고 구원이기 때문) 그리스도가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을 위해 행하고 주신 것처럼 똑같이 이웃에게 행하고 주어야 하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제2의 그리스도(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의 아버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값없이 도와주신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행하신 일들 때문에 우리의 이웃을 값없이 도와야 하며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하는 자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이유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행하신 것처럼 이웃에게 행하기 때문”으로 보았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열매로서 이웃 사랑을 한다. 믿음으로부터 주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고, 이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자발적이고 진정한 기쁨으로 섬기는 마음과 내적인 동기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삶의 실천이 이루어진다. 루터는 이러한 이웃사랑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선사된 모든 것을 깨달을 때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롬 5:5)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웃사랑의 원리: 선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인에게 흘러왔고 지금도 흘러오고 있는 것처럼, 그 선한 것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로 흘러간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즐거운 교환’을 그리스도인과 이웃과의 ‘즐거운 교환’으로 확대한다.

 

3) 행위에 대한 바른 판단과 적용

①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함을 받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선행의 본으로서 값없이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선행을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더 이상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나태하게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와 구원을 위해 행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루터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자유가 정숙주의가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② 모든 행위들에 대한 바른 판단은, 어떤 행위든지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거나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 중 하나여야 한다. 루터에게 선행은 자기 자신의 육신을 죽이는 일(=속사람과 겉사람의 일치)과 이웃에 대한 자발적이고 사심 없는 사랑(그리스도의 모범을 뒤따름)일 뿐이다.

③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행위가 행해질 수 있지만, 행위 자체는 죽은 것이며 그래서 그 자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찬양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행위들을 수행하는 행위의 주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바로 마음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먼저 계명을 성취하며, 그 후에 행위들이 뒤따라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를 통해 계명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눈먼 것일 뿐이다.

④ 믿음을 통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은 불필요한 잉여물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선행은 자신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값없이 기꺼이 베풀어 다른 사람의 형편이 나아지도록 해야 한다.

⑤ 행위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마 7: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행위는 사람의 본질을 인식하는 수단이 된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독립적인 변수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을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지만,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방법은 행위가 외양에 불과하고 표면적이기 때문에 속임과 오류의 위험이 있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순서를 바꾸고 칭의를 선행에 근거하도록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⑥ 그리스도인은 선행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한 칭의를 거부한다. 오히려 진정한 선행을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악하여 행위에 대한 잘못된 생각(행위를 의와 결부시키는 ‘레비아단’)을 갖는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오히려 이러한 생각을 거룩한 의지라고 보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인식할 수도, 몰아낼 수도 없다. 여기에 습관이 추가되면 잘못된 본성을 강화시켜 치료가 불가능한 악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진정한 믿음(‘잘못된 생각의 파괴자’)만이 행위에 잘못된 생각인 리워야단을 극복할 수 있다.

 

4. 믿음과 행위의 관계

1)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한다

루터는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사람의 본질(인격)과 행위의 관계로 설명한다. 믿음이 사람의 본질을 의롭게 하며, 그런 후에 성령과 사랑이 그 사람에게 주어져 그는 기쁨을 가지고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위의 선함은 행위 자체를 근거로 판단되지 않는다.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되는 것은, 오직 행동하는 사람의 본질(인격)이 이미 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위 때문에 사람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행위를 받으신다. 사람의 본질이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인 논증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마 7:18)이다.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악한 행위가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인격이 선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선행을 한다. 인간이 선행으로 자신의 본질(인격)을 선하게 하려는 시도는 불경한 것이다. 사람의 선하거나 악한 본질은 행위에 의존되지 않고 오히려 행위의 선함과 악함을 결정한다. 다시 말해 행위는 도덕적인 가치에 따라 규정되지 않는다. 루터에 따르면 사람은 행위에 근거해서 규정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사람의 본질로부터 보여지고 판단된다. 그래서 루터의 윤리는 ‘물질적’(material)이 아니라 ‘인격적’(personal)이다. 선과 악은 행위의 서술어가 아니라 사람의 본질(인격)의 서술어이다. 행위 자체는 중립적이다. 행위가 선하고 악한 것은 결국 사람 자체의 선과 악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질문은 “어떻게 선행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선하게 되는가?”였다.

 

2) 믿음이 행위를 규정한다

믿음과 선행의 관계도 사람의 본질과 선행의 관계와 동일하다. 영혼의 믿음과 불신앙의 여부가 행위의 선과 악을 결정한다. 만약 행위가 믿음 안에서 행해진 일이라면 선한 것이고, 불신앙 가운데 행해진 것이라면 악한 것이다. 순서가 거꾸로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이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루터는 믿음을 갖지 않은 자의 선행은 (오직 믿음만이 구원에 필요하기 때문에) 의롭게 하고 구원을 얻는데 무익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악한 행위가 그 불신앙인을 악하고 저주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이 악하고 저주받은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선하거나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 혹은 불신앙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는 행위로 시작하지 말고 믿음으로 시작하라고 루터는 권면한다.

 

3) 성례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성례’(구원의 선물)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기본적인 모범이 된다. 이 두 가지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가 이해될 수 있다.

영혼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게 되고, 육신은 영혼의 지배와 복종케함에 따라 영혼과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과 영혼의 일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구원의 선물이 전해지는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고, 영혼과 육신의 일치는 모범인 그리스도를 뒤따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영혼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인간이 이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가 아닌 오직 말씀을 들음에서 난 믿음이다. 또한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성례(선물)를 통해 의롭고 자유하며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뒤따르도록 그들을 부르며 역사하신다. 이에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듣는 자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 즉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efficax est per dilectionem)(갈 5:6)이라는 중요한 명제로 설명한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유명한 명제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즉 구원에 있어서 믿음으로는 불충분하여 사랑을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아서 모든 것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제 기쁨과 사랑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이웃을 섬긴다고 주장한다(빌 2:1-4). 구원 받기 위해 믿음에 더해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사랑을 통해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IV. 나가는 말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의 자유”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산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그 자신을 넘어 위로 올리워져 하나님에게로 인도되고, 사랑을 통해서 다시 그 자신 밑으로 내리워져 이웃에게로 낮아진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결합체이다. 믿음과 사랑은 들숨과 날숨처럼 서로 함께 속해 있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에 부여된 권리, 특히 사랑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명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확히 구별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뿐만 아니라 세상 앞에서(coram mundo),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coram hominibus) 산다. 영혼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으며(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영혼은 육신을 복종시키며 기쁨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을 한다(세상/사람들 앞에서). 물론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사랑 안에 사는 존재이지만,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 열매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결국,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는 선행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선행을 강조한다. 그런데 참된 선행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므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오해는 루터의 주장 안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행위는 그 믿음의 열매이다. 선행은 믿음에 더해져야하고 요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행위 없이 믿음만이 구원을 이루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루터가 “로마서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은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자 능력이기에 끊임없이 선행과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믿음이 불충분하여 선행으로 보충되어야 한다고 아직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루터가 이솝우화를 통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한 마리의 개가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하천을 건넜다. 개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속아, 그것을 덥석 물으려고 입을 열었고, 실제 입에 있는 고기 조각뿐만 아니라 물에 비친 모습도 동시에 잃었다.” 믿음과 믿음이 주는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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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 (122.35.176.192)
2017-10-25 23:43:06
루터에 대한 설명보다는 현대적인 해석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단순히 설명하는 것은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을 텐데요. 루터를 공부하자는 것인가요, 특히 감리교회 교리는 루터의 것하고는 다른데, 그런 것이라도 부각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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