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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한국(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한 재고
한정애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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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25일 (수) 03:00:30
최종편집 : 2017년 10월 25일 (수) 03:04:37 [조회수 : 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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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한국(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한 재고

 

 한정애 (협성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

   
 

 

I. 들어가는 말

 

루터가 1517년에 95개 논제를 내어 놓은 후에 1518년과 1519년에 주요 공개학술토론회들을 거쳤다. 그 후 ‘오직 은총’이라는 문구에 대한 비판에 대처하기 위해 1520년 3월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5월에 ‘선행에 대하여’를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회의 문제들에 대하여 정치가들도 나서서 함께 해결해야 함을 강조하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같은 해 6월에 쓰기 시작하여 8월에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출판했다. 이에 이어 교회의 문제점들을 나열하는 내용이 담긴 ‘교회의 베벨론 감금’을 10월 초에 저작했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그리스도적 자유에 대한 문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 문서들이 16세기 루터의 대개혁을 위해 중요한 문서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친숙해진 ‘루터의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레포마치오’ (reformatio)를 잘 못 번역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에 ‘개혁’ 혹은 ‘대’개혁이라는 말이 더 나을 듯하다.

세계적으로 개신교회에서 각 교단 마다 매년 루터의 개혁을 기념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지역과 도시들이 루터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날짜를 기념일로 지키며 축제와 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루터가 태어난 11월 11일이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발표된 6월 25일 아니면 20번째 성삼위일체주일 (2017년에는 10월 29일 주일)이 제안되기도 했지만 18세기에 이르면서 루터가 95개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공고했다고 하여 그날을 기념일로 지키기 시작한 선제후국 작센의 풍습이 전 독일에 퍼져나가게 되었고 독일 동부의 주들에서는 그날을 공식적 휴일로 지키고 있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11월 1일이후의 첫째 주일에 지키기도 하지만 결코 카톨릭교회의 축제일인 11월 1일 만성일 (모든 성자들의 날, 죽은 영혼들의 기념일)에는 종교개혁을 기념하지 않는다. 서부 독일에서는 10월 31일이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기념축제와 예배가 있는 교회들도 있으며 연합예배로 축제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후의 첫 주일에 기념예배가 축제된다. 종교개혁 축제에 초빙되는 강사들 중에는 알려진 설교자나 감독 혹은 정치가, 신학자들도 있으며 그 분야가 다양하다. 때로는 카톨릭 교회 대표들을 귀빈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카톨릭 교회 비숍이나 신부에게 설교를 부탁하기도 한다. 한국과 무척 다른 모습이다.

종교개혁 축제 시에서 모은 헌금과 기금은 성서출판 사업, 디아스포라 개신교인들, 국내외선교 등 종교개혁 사상과 어울리는 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오늘의 한국개신교회의 상황과 16세기 마르틴 루터 시기의 교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것은 적어도 뜻밖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개신교회들이 16세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일어났던 개혁의 결과로 생겨났으므로 당연히 그 당시 교회의 문제점들을 다시 발생시키지 않아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16세기의 교회의 문제점들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증언했던 마르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1521년 5월 26일에 보름스 (Worms) 국회에서 보름스 칙령 하에 황제로부터 정죄되었으며 1521년 1월 3일에 이미 교황으로부터 파문되었던 루터의 개혁적 문서들과 가르침들이 금지되었다. 이것이 1526년 슈파이어 (Speyer) 국회에서 각 제후들의 의향에 따라 적용되도록 변경되었지만,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국회에서 보름스 칙령이 또 다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을 때, 종교개혁을 따랐던 6명의 제후들과 14 제국 도시들의 대표들에 의해 프로테스타치온 (‘Protestation’ (protestari)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파생: 증언하다, 표현하다, 입증하다 ...)) 문서가 생겨났으며 여기에서 그들이 마르틴 루터의 파문과 그의 개혁적 가르침과 문서들에 대한 금지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를 따르는 교회를 소위 개혁적 교회 (혹은 개신교회, ‘reformatorische Kirche’)로 칭하게 되었다. 이 용어는 스위스 종교개혁에 의해 생겨난 개혁(파)교회 (‘reformierte Kirche’ = ‘개혁된 교회’)와는 다른 의미의 것이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공개적으로 표현되고 입증 (‘protestari’)된 그러한 문제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내에서 결코 다시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 현재 그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교회들을 프로테스탄트 교회나 ‘복음(적) 교회’ 혹은 ‘개신교회’ 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프로테스탄트주의자들의 사상을 수용하며 생겨난 개신교회들에 의해 선교된 한국개신교회들이 16세기 당시에 제기되었던 문제들과 흡사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실제로 뜻밖의 일이다.

 

 

II. 루터의 성서 이해를 위한 ‘이해 보조 수단’ (Interpretamente)

 

성서가 실제로 큰 다양성을 나타내며 통일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서로 다른 성서들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성서 이해를 위한 이해 보조 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루터가 여기에서 몇 가지를 숙고하며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 보조 수단들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기준들 중 하나가 바로 약속과 성취에 관한 사상이다. 즉 성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서의 중심이며 구약에서 바로 예수가 약속되고 신약에서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활동과 그의 운명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

그 다음에 성서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하나의 이해 보조 수단은 성서에 표출된 본질적인 내용 즉, 성서의 중심 내용이자 교리로서의 칭의론의 원칙이다. 성서 내에 모든 것이 칭의에 대한 가르침이며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 속에서 개진된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죄인이 의롭다 칭함 받음으로써 칭의가 완성된다. 율법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보여주며 죄를 깨닫게 하고, 복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복음이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은 것을 통하여 실현된 죄 용서를 약속한다. 이렇게 루터가 칭의론의 원칙과 성서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원칙과 약속과 성취의 원칙을 가지고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쉽게 하는 이해 보조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 이 이해 보조 수단을 가지고서만이 총괄적으로 성서를 타당하게 이해하고 성서의 통일성을 확실히 하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루터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이 규준들을 가지고 ‘오직 〜로만’이라는 원칙들 즉, 근본에 있어서 칭의론의 원칙으로서의 ‘오직 은혜로만’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원칙으로서의 ‘오직 그리스도로만’ 그리고 계시가 바로 오직 성서에만 나타난다고 하는 자료 원칙으로서의 ‘오직 성서로만’을 아직 말할 수 있다. ‘오직 칭의로만’, 그리고 성서의 중심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약속-성취라는 서로 다른 원칙들을 통하여 루터가 성서 독자들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 보조 수단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 결과로 어느 누구나 성서를 타당하게 이해할 수 있게 보장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만인사제직의 바탕을 만들고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꼭 필요했다.

 

1. 칭의론 (justificatio)의 원칙: ‘믿음으로만’(sola fide) -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받아주시고 고쳐주시는 은혜로 가까이 오시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해방시켜주신다는 사상을 루터가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고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게 된다. 회개가 천국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회개할 수 있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즉 하나님이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이다. 은혜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선행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선행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선행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경험하기 때문에 선행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드러나는 공로나 공적 사상이 성서가 바탕이 되어 생겨난 개신교회의 원류와 어울리지 않는다.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개방적이었던 스콜라 신학자 아벨라르 (1079-1142)는 믿음이 사랑의 실천을 불러일으키며 이것이 하나님의 칭의를 얻게 한다고 함으로써 성육신을 통해 주어진 은혜가 대속의 차원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모범을 통하여 개개인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이웃 사랑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모범을 보고 자신 속에 이웃 사랑을 스스로 일깨운 자의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하여 구원이 완성된다. 구원의 역사에 인간이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 내에도 잔재해 있는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인 공적 (功績) 사상이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사상과 다름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의 구원론이나 은혜론은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러한 구원 이해에 마주쳐 루터가 특별히 강조한 바울의 칭의론이 대두된다.

복을 받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공적 사상과 연결된다.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려고 한다. 선행, 헌금, 고행, 기도 등이 자신의 공적으로 이해된다. 그것들이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효력이 있다는 생각이 오늘의 한국교회 내에도 팽배해 있다. 이러한 생각이 16세기 유럽교회에서보다 한국교회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듯하다. 16세기 유럽교회에서는 사후의 고통을 줄이고 또 구원을 얻기 위해 면죄부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차이 나게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현재의 삶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비는 이기적인 기도를 하며 헌금을 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다 이웃 사랑의 바탕에서 열매로 맺어지는 참된 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율법주의적 생각 속에서 목적 성취를 위한 순수하지 않은 외적 선행을 일삼는 그리스도인들도 다수이다. 어쨌든 16세기의 유럽교회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필요하다고 했던 비성서적인 사상이 오늘의 한국교회 내에도 곳곳에 퍼져 있다. 인간의 거룩한 행위와 공적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 것이 16세기 유럽교회 개혁의 대상이었다. 은혜가 인간의 선행을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성서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이용당하고 있던 16세기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유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루터가 윤리적 ‘선행’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종교개혁사에서 루터의 1520년에 발표된 소위 ‘3대 논문’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1517년 10월 95개 논제를 발표한 후 선행에 대한 이해가 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1520년 5월에 이미, 소위 3대 논문 (8월, 10월, 11월 출판)이 출판되기 이전에 선행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한 논문 ‘선행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이 글은 ‘오직 믿음만으로’ (sola fide)라는 가르침을 강조하는 루터가 선행과 실천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믿음과 실천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기독교 윤리적’인 논문이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1463-1525)의 동생 요한 (프리드리히의 사후 1525-1532년까지 작센의 선제후)에게 헌정하는 글 ‘선행에 관하여’ (Von den guten Werken)를 쓰며 왜 이 문서가 꼭 출판되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문제 가운데서 가장 큰 선행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어 있기 때문이옵니다. 선행에 있어서는 다른 어느 것에 있어서 보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만과 농간이 부려지며, 또한 순진한 사람들이 잘못 지도받기 쉽사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 속에 이리들이 숨어 있는 양의 옷을 주의하여 살피라 (마 7:15)고 명령하신 것이옵니다. ... 선행처럼 각양각색의 불순물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사옵니다.

 

루터는 선행을 칭의와 관련시키는 자들에 의해 오해 받고 있음을 의식하며 여기에서 양의 옷 속에 숨어 있는 이리들을 가려내듯이 선행에 관한 오해들을 지적해내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는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만 필요하다고 피력한다. 그리고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믿음과 이것에서부터 가능해지는 선행이 가장 선한 것이라고 한다. 루터는 그가 중요시한 은총과 믿음이 올바른 선행과 상반되어 부딪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인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들을 행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더 나아가서 신앙인은 시편 1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연히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기’ 때문에 행위는 그 자체로 인해서가 아니라 신앙으로 인하여 선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행위의 근원으로써 행위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고 확신했다.

칭의 교리로 인하여 영혼 구원을 위해 선행으로서 이행되었던 구제와 기부문화가 점점 약해지는 위기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선행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정의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루터가 선행이 더 이상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하게 되는 사랑의 행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임을 확신한다면 그 행위가 선하다고 한다.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마음 가운데 확신한다면, 비록 그것이 짚 한 오라기를 집어 올리는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위는 선한 것이다. 만일 확신이 없거나 의아한 생각이 든다면 비록 그것이 죽은 자들을 다 살리고 그가 그 자신을 불사르게 하는 일(고전 13:3)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은 선하지 않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가르치는 말이다. 곧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고전 14:23).

여기에서 루터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며 그의 이해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그의 칭의론과 자유의지 및 선행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이제는 선행과 공적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서 이웃에 유익을 주기 위한 행위이며 믿음의 열매임이 강조되었다. 행위는 이제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로 이해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기증문화도 생겨났다. 이렇게 칭의와 믿음이 있는 곳에 선행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디아코니아 행위가 있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사회봉사와 사회참여가 따르게 됨을 루터가 새로운 선행 이해로 제시했다.

루터의 선행과 실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으로 인하여 당시의 제국도시들과 귀족들 사회에 기부 문화가 칭의론 교리에 의해 중단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이해를 바탕으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제는 헌금이나 기증이 더 이상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의한 이웃 사랑으로서의 참된 사회봉사이자 사회참여로 이해되며 동시에 진정한 선행 실천 (caritas)으로 정의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지니는 공공성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그가 끼친 영향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학 밖의 학자들과 문화 창조자들이 루터의 삶을 신학적인 범위를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루터 상으로 만들어 내게 했다는 평가들이 있다.

 

2.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원칙: ‘그리스도로만’ (solus Christus) - ‘은혜로만’ (sola gratia)

 

루터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과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고 또 극복하셨다고 말했다: 성서의 핵심이 바로 이것과 연결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며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인간이 되셨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로만’이라는 어구가 중요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진리가 분명해진다. 이를 바탕으로 성서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해석을 위한 척도도 그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루터의 성서 해석 규칙에 따르면,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서 전체가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서 내의 갈등들과 모순들이 없어지거나 혹은 중요치 않게 된다. 그래서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교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중심을 알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을 성서로 이해하면 온 성서 말씀이 이해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며 성서의 중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히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주셨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은 소위 성공이나 물질적인 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것임을 루터가 성서를 통해 재발견했다. 그래서 그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도 입을 다물지 않고 이 소식을 전했다. 이 진리를 감추려고 했던 교황과 황제가 그에게 경고했을 때에도 자기의 신앙을 고백했다. 1521년에 열린 보름스 (Worms)국회에서 재판을 받으며 곧 화형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떨며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여기에 섰나이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발표한 내용들을 철회하지 않았고 오늘까지 이 기쁜 소식의 재발견이 온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0년대부터 로마카톨릭 교회까지도 이 기쁜 소식을 재발견했고 루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개혁이 아직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성서를 통해 발견한 내용의 바탕은 예수의 회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선포 (마 4:17)가 위협하거나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즉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라는 초청이다. 위협도 강요도 아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를 발표했을 때, 이 문서에서 사제를 통한 죄용서와 면죄부의 유효성에 대한 내용을 다루며 예수가 선포하는 회개가 결코 의무적인 성례전적인 참회나 사제가 선언하는 죄 용서를 의미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제2논제). 이렇게 95개조 논제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그 후에 루터가 그를 적대하는 사람들의 오해를 의식했기 때문에 그 이듬해인 1518년에 ‘95개조 논제 해설’(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통해 95개조 논제들에 대한 설명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천국으로 초청하는 예수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하는 바울 대신에 단지 이들에 관하여 성서 전체를 일그러뜨리며 글을 쓴 신학자들의 의견을 읽으며 오류를 범하고 있던 16세기의 유럽 카톨릭 교회를 강력히 비판했다 (제3논제 해설).

 

3.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가 오직 성서에만 (자료원칙): ‘성서로만’ (sola scriptura)

 

루터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교인들이 도움을 받지 않고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제들이 교인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해석해주었다. 이때 교회의 교리를 아주 중시했으며 성서 해석을 위해 교리가 척도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교리가 옳지 않다면 성서해석이 올바를 수 없음이 당연했다. 이 문제점을 루터가 직시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가 오직 최우선의 자료인 성서 내에 나타나는 본질적인 내용과 관계가 없음을 본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가난의 문제도 그러했다. 중세교회가 부유했고 사제들이 부자들이었기 때문에 성서 내에 나타나는 내용을 올바로 알려주지 않았고 예수가 가난을 택했음을 감추었다. 한국개신교회에도 예수의 삶을 모방하여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자들이 많다. 루터가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난을 선택했다. 그가 에르푸르트 (Erfurt) 시에서 가장 엄격하게 가난을 강조하며 요구하고 실천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리고 나서 로마 바티칸에 가서 그곳의 부와 부패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성서를 최우선으로 본 다른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면죄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면죄부 이론을 앞세우며 로마 교황청이 잘못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했을 때 루터가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95개 논제 첫 조항에서부터 나타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점인 당시 카톨릭 교회의 ‘회개’ 이해와 면죄부 (면벌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카톨릭 교회가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원죄만을 사해주는 것이라고 가르쳤고 예수의 죽음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원죄만을 없애준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짓는 일상의 죄에 있어서는 교회의 성례전 (세례, 성만찬, 고해성사 등의 7가지 은혜의 수단)과 면죄부 구입을 통하여 죄 값을 줄일 수 있으며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성만찬을 통하여서는 예수님이 다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이러한 잘못된 교리와 면죄부를 비판하며 성서의 원래의 의미를 해석해줌으로써 16세기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었을 때 교회 직분자들을 통해 어떻게 회개하고 벌을 받으며 또한 사면을 받거나 마음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정들이 교회사 초기부터 존재했지만 8세기에 들어와서 공개적인 회개가 감소되고 아일랜드-스코틀랜드의 수도원 (켈트족 교회)에서 유래된 개인적 회개가 확산되면서부터 중세의 면죄(벌) 제도의 기반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11세기에는 아직 면소(免訴, absolutio), 소생 (甦生, relaxatio), 사면 (赦免, remissio), 용서 (venia), 선물 (condonatio) 등의 용어들의 사용과 함께 위로와 해방과 화해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 후 13세기가 되어 면죄(벌) (indulgentia)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것은 개인적 회개를 통하여 사제들로부터 주어지는 위로와 용서와 해방이 현세와 연옥에서 감수해야 할 형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사고 하에 감형이나 형벌 제거를 위해 사제들이 기도를 통하여 영적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점차적으로 규정에 따라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속력 있고 권위 있는 법적 제도로 이해되었다. 이것이 16세기 개혁 물결의 실마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면죄부 제도나 이에 대한 교리가 성서와는 결코 관련이 없는 내용임을 루터가 인식하며 바로잡기에 나선 것ㅇ 16세기 개혁의 시작이었다.

면죄(벌)부와 직관되어 있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 (Albrecht von Brandenburg)가 23세가 되던 1513년에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Erzbischof von Magdebur) 및 할버슈타트 (Halberstadt) 주교구의 행정관이 되었다. 그가 또한 추가로 교회법으로 한 군데 이상의 주교 직위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금지법을 어기고 1514년에 마인츠 (Mainz)의 주교 및 선제후의 위치도 차지했다. 이에 더해 1518년에 추기경의 직위도 소유했다. 이렇게 불법으로 여러 직위들을 차지할 수 있게 해준 교황 레오 10세 (Leo X)가 새로이 공고한 면죄(벌)부 판매를 시작했다. 1517년에 이것을 도미니크수도회의 수사로서 막데부르크 (Magdeburg) 지역에서 면죄(벌)부 판매 설교자로 활동하며 유명했던 요한 텟첼 (Johann Tetzel)을 통하여 추진시켰다.

이렇게 금지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직위들을 장악할 수 있게 해준 교황에게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Fugger) 가문의 은행에 진 부채를 면죄부 판매에 대한 이익 배당으로 갚아 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은 규정에 따라 로마로 보내야만 했다. 이것으로써 당시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가 실로 교황에게 뇌물을 주고 여러 성직들을 사들이며 ‘시모니’를 범하는 성직매매를 한 ‘성직자’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 논제를 작성하게 한 직접적인 주요동인들 중 하나였다. 이러한 면죄(벌)부 판매 행위가 1562년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금지되었고 1567년부터 파문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한국개신교회의 시모니 문제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교회가 이 부분에서 분명히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교단장 선출에 있어서 선거 제도가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카톨릭 교회에 이러한 격언이 있다: ‘엄청나게 큰 야심이 없는 사람이 결코 교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야심을 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 결코 교황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이기주의자를 교회의 수장으로 뽑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선 바로 모든 개인적인 야심적 목표들을 포기한 성숙한 지도적 인물이 추기경 의회에 의해 선택된다는 의미이다.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격언으로 여겨진다. 한국개신교회가 야심으로 가득 찬 이기주의자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체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전통 속에서 생겨난 면죄부 제도를 사용하여 부를 늘려가는 카톨릭 교회가 성서를 관리하며 감독하는 것을 루터가 신뢰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가 오히려 성서가 교회를 감독해야 함을 강조하며 요청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성서를 읽는 것을 원했다. 이것이 그가 성서를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게 했고, 혹여 오해하지 않을지에 대해 염려하여 성서 읽는 것을 금지했던 중세 교회와 아주 다른 길을 갔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서를 읽고 카톨릭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에게 더 중요했다. 이것이 루터가 ‘성서로만’이라는 어구를 중시하게 만든 이유이다.

성서를 중시했던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철학적인 것이다. 루터 이전 몇 세기 동안 많은 스콜라 학자들이 신앙에 대해 깊이 있게 철학적으로 사유했다. 12세기까지 대다수의 학자들이 인간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정확히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성서와 교리를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성서와 교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들이 다양했고 어느 것이 진리를 말해주는지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몇몇 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성을 바탕으로 사유하며 숙고하는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연구하자고 했다. 이렇게 자연과학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며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가 물론 스콜라 신학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낼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확실하고 명백하게 깨달을 수 없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께 다다를 수 없고, 반대로 특히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루터가 하나님이 성서 속에 자신을 계시하고 인간이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연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음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렇게 최고의 진리이자 최고 권위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오직 성서 속에만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최고 권위로서의 성서로 돌아간다는 것은 근본에 있어서 철학사적으로 설명된 것이기도 하다.

루터는 성서의 명확성 (‘claritas sriptura’)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성서의 의미가 어느 누구에게나 명백히 이해될 수 있고 교회의 성직 계급을 통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서가 자체적으로 해석되고 (‘sui ipsius interpres’) 비숍들을 통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주장했다. 이렇게 루터가 실제적으로 성서 원칙이 생겨나게 했다. 오직 성서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교회의 성직 계급을 통한 해석 없이 전통을 제외한 성서 자체가 교회의 최고 권위라고 했다. 그리고 성서는 ‘규정하는 규범’ (‘norma normans’)으로, 전통과 후에 생겨난 모든 지식들은 ‘규정된 규범’ (‘norma normata’)으로 표현하여 성서의 권위와 전통의 권위를 구별하는 원칙을 발전시켰다. 즉, 최고 권위로서의 성서 자체를 교회의 신앙고백서들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규정하는 규범으로서의 성서가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하여서 전통 없이 성서만을 교회의 최고 권위로 세웠다. 그것과 반대로 전통은 성서를 척도로 평가하고 전통이나 신앙고백이 성서에 상응하는지에 대해 면밀하게 숙고하기 위하여 성서와 연결시켜 표현하고 성서에 종속시켜 해석했다.

 

 

III. 만인사제론 (만인제사장론):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제이고 교황이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1520년 8월 출판)에서 만인사제론을 발전시키며 이렇게 서술했다:

 

... 우리는 다 세례를 통하여 사제로서 성별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이다’ (벧전 2:9 이하)라고 말하고, 또 계시록에 ‘당신은 당시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 (5:10) 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

세례의 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성별된 사제이고 주교이고 교황이라고 자랑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 동일하게 사제들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자신을 드러나게 하여 우리의 동의나 선택 없이 우리가 다같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누구나 공동체의 의사와 명령 없이 감히 떠맡으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직무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부정행위로 인하여 파면을 당한다면 그는 그 직무를 갖기 이전과 똑같이 될 것이다 ...

평신도와 사제, 군주와 주교,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는 실제로 직무와 일에 관한 차이 이외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 ‘신분’에 관한 차이는 전혀 없다. 마치 모든 사제들과 수사들이 똑같은 일을 맡지 않는 것처럼 비록 그들이 다 같은 일에 종사하지는 않으나 그들은 다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곧 그들은 참 사제들이며 주교들이며 교황들인 것이다. 이것은 ... 로마서 12장 (4절 이하)과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며,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이다. 곧 우리는 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한 몸이며, 다 서로에게 대하여 지체들이다. ... 그러므로 지금 사제나 주교나 교황과 같이 ‘영적’으로 불리어지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과 직무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의 집행을 맡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크리스찬들과 아무 차이가 없고 우위에 있지도 않는 것처럼, 세속적인 관헌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

 

이것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이 권위를 기준으로 해서 입장을 취할 수 있음을 루터가 확신했다. 그가 여기에서부터 만인사제론 (모든 신자들의 보편사제론)을 발전시키며 성직자들과 로마 카톨릭교회 전체가 자신들과 보통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에 세웠던 여러 가지 담들이 부당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들이 파괴되어야 함을 1520년에 그의 논문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피력했다. 루터가 거기에서 원칙적으로 만인사제직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세례를 받고 ‘기어 나오는 자’는 누구나 이미 참으로 사제며 주교이며 교황임을 말했고 교회 당국과 교인 사이에 근본적인 차별을 볼 수 없음을 강조했다.

중세 내내 위 디오니시우스 문서 (5세기 말 – 6세기 초)를 통하여 여러 차원에서 교회의 위계질서가 확고해졌으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지려면 교회의 위계질서를 통한 중재가 있어야 한다고 하며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성직자의 중재가 강조되었다. 이렇게 성직자의 거룩함과 신비적 행위가 중시된 것이 중세의 교권주의를 더욱 더 강화시켰다.

이것이 루터가 강조한 성서적 교회론을 바탕으로 하는 만인사제론에 상충하는 현상이었다. 성직주의와 교권주의의 영향 하에 교회공동체의 본질이 사라졌던 16세기의 상황에서 성서를 바탕으로 만인 사제직에 대해 설명하고 강조했던 루터의 개혁적 사고가 현재까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성서적인 교회공동체 이해와 교회론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목사도 성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안수 받은 성도로서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섬기는 종 (minister)의 직분을 받아 임명된 성도라는 의미이다. 모두가 다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맡은 바 사명들이 다 다르지만 다 같이 중요하고 귀하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잊고 있었던 중세 말기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마르틴 루터의 성서적 사상이 서로 상충되었다.

루터는 그 논제들에서 당시 많은 제후들과 시민들이 불만스러워 했던 로마-카톨릭 교회의 재정적 실행을 우선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면죄(벌)부 제도 속에 나타나는 잘못된 회개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으려 했다. 이를 위해 그의 95개 논제 제1조를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마 4:17) 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해서 제2조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당시의 회개 이해를 수정한다. 그리고 제6조에서는 교황이 감히 주제넘게 행사해온 사면 권력에 대해서도 교황의 사죄권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 이렇게 루터가 당시 교회의 소위 ‘최고 권위’와 맞서게 되었다.

그 후 151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가 준비한 라이프치히 공개학술논쟁이 열리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 교수 그리고 비텐베르크 (Wittenberg) 대학의 다른 교수들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Andreas Karlstadt, 필립 멜란히톤)과 잉골슈타트 대학의 교수 요한네스 에크 (Johannes Eck) 사이에 1519년 6월 27일에서 7월 16일까지 신학적 논쟁이 펼쳐졌다. 다루어진 주요 주제들 중에는 교황직의 위치와 교회 교리의 권위,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자유 그리고 면죄(벌)부가 있었다. 루터가 1518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미 교황청의 권위와 대면하여 거기에 굴복할 것을 거부하며 도주했고, 그 다음 해에 라이프치히에서 에크를 대면한 순간이었다. 이 논쟁에서 아직 약하디 약한 모습을 한 루터가 풍만한 자태와 당당한 음성과 웅변술을 지닌 요한 에크와 마주했다.

에크가 루터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교황과 교황청의 권위를 부인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콘스탄츠 공의회 (1415)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취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 받고 화형 당한 얀 후스 (Jan Hus)가 실로 ‘복음적이었다’고 루터가 말하도록 에크가 민활한 작전으로 루터를 유도하며 모퉁이로 몰아갔다. 루터가 교황이 틀릴 수 있고 잘못 생각할 수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공의회도 틀릴 수 있음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에크가 교황과 공의회의 교리적 권위를 거세게 방어하며 루터가 주장한 오류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의 신학자들이 교황의 수위권이 성서적으로 설명될 수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음을 강조했다 (‘성서만으로’, sola scriptura). 이에 대해 요한네스 에크가 같은 해에 그의 문서 ‘베드로의 수위권’ (De primatu Petri)에서 교황권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대해 확고하게 방어했다. 그리고 그가 교황으로부터 루터를 대적하기 위한 소송을 얻어내기 위해 1520년에 로마로 갔고, 교황 레오 10세 (Leo X)가 그 해 6월 15일에 교황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Exurge Domine)를 공포했으며 에크가 독일로 돌아온 후 이것을 출판했다. 그 교서에서 루터의 41개 명제들을 금지하며 그의 문서들을 소각시킬 것을 명했고, 그가 60일 이내에 자신의 의견을 취소하지 않을 경우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루터가 이미 교회의 총체적 권위와 위계질서를 겨냥하는 시비를 건 셈이었다. 그가 당연히 여기에서 그러면 어느 권위를 인정해야만 할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어디에 과연 권위가 있으며 누가 옳은지에 대한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 후에 그가 최고의 권위가 바로 성서에 있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 당시의 로마-카톨릭 교회가 성서를 위험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성서가 매우 다양하고 자체 내에 긴장과 갈등이 흐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일리가 있고 그래서 올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 하는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요하다. 이는 성서를 잘못 해석할 경우 당연히 이교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분명하게 성서를 최고의 권위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그 해석을 위한 척도를 제시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솔라 (sola) 사상’ (오직 ∼으로만)과 연결되었다. 그 어떤 공의회 소집이나 성서 해석을 위해서도 더 이상 실질적으로 교황청의 권위나 교회 위계질서가 필요하지 않음도 이와 연결시켰다.

오늘의 한국개신교회 내에 이러한 위계질서가 그 바탕이 되어 있다면 이것이 실제로 루터 당시의 로마-카톨릭 교회와 유사한 점이다. 위계질서 속에서는 권력의 오용이나 진리에 어긋나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이의 제기 하기가 어렵다. 자신을 소위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강자’에게 종속시키며 침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루터에 따르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수 없다. 이러한 개혁적 사상을 한국교회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냉혹한 위계질서 속에서 주로 ‘선배’와 ‘윗사람’이 결정권을 행사할 지위를 가지고, ‘아랫사람’이 거의 순응한다. 이로 인하여 당연히 정의와 그리고 특별히 만인사제직에 대한 이해가 해를 입는다.

루터가 강조했던 만인사제론에 의하면 ‘평신도’와 ‘성직자’라는 용어 자체에 이미 어폐가 있다. 한국개신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임을 실질적으로 느끼기가 어렵다. 이것이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구분이 뚜렷한 로마-카톨릭 교회와 유사하다.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소위 ‘평신도’ (Laie, lay(wo)man)가 아니라 전문가이고 신학자이며 성경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평신도’나 ‘성직자’라는 용어 자체가 부적당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각자 받은 은사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전문가들이며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중요하다. 모두가 다 ‘동일’하고 ‘같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다 귀중하고 각각 주어진 기능을 발휘하는 능력가이자 전문가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독일 마르부르크 (Marburg) 대학교의 조직신학자로서 루터연구가인 한스-마르틴 바르트 (Hans-Martin Barth) 교수가 한 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만인사제직 이해가 더 이상 아래, 위가 없다는 권력 갈등 문제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엄밀히 서로 섬기고 서로에게 사제가 되는 것, 즉 서로에게 영적 상담자가 되고 서로 조언으로 도우며 비판도 해주는 그러한 형제자매 간의 사랑과 정직함이 있는 교회 상을 함의한다. 권력 행사나 권위 오용의 자리가 없는 교회이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만인론사제론 (만인제사장론)의 재발견일 것이다. 교인 모두가 다 귀중하고 교회가 형제와 자매들의 공동체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교회가 결코 목사에게 속해 있는 종교 기업체가 아님을 아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에게로 가서 그가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는 모두가 함께 자기 몫을 하며 기여할 수 있는 곳이며,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순례하는 곳이다.

 

IV. 최고 권위인 성서 읽기와 교육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당시에 주민들의 90%가 읽을 수도 없었고 쓸 수도 없었기 때문에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내용적인 원칙들을 세운 것을 제외하고서 이제 루터가 모든 사람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일반 학교들을 세울 것을 요청하는 것이 시급했다. 그리고 성서가 최고 권위이고 단순히 교회의 권위에 기댈 수 없다면 각자가 스스로 성서를 읽을 책임이 있고 각자가 스스로 성서를 잘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하며 이를 위해서 읽는 것을 배우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 때까지는 대체로 두 가지의 학교 제도가 있었는데 수도원 학교와 대성당 학교가 그것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실제로 몇몇 공동체들의 설교자들의 교육을 주선하는 다른 학교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수도원 학교들과 대성당 학교들이 교육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 두 양상의 학교들이 수도원의 후진들과 성직자들을 양성했으며 전반적으로 부유한 귀족들이나 부유한 도시 시민들만 학비를 지불하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시골 인구가 80%나 되었지만 학교는 없었다. 따라서 이제 루터가 교회와 제후들이 라틴어 학교를 세우도록 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바로 모두가 학교를 다니며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 성경을 읽기 위해 라틴어까지 배우도록하기 위하여 교회공동체들도 교회 라틴어 학교를 세우고 국가가 대부분의 주민들을 위해 라틴어학교를 세우도록 요청했다.

마르틴 루터가 그의 글 ‘시의회 의원들에게 그리스도교 학교를 건립 운영하도록 호소한 글’, (1524)에서 시의회 의원들에게 학교들의 쇠퇴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 우리는 독일 전역에서 얼마나 학교들이 파멸되고 실패하고 있는지를 경험하고 있읍니다. 대학교들은 쇠퇴하고 있으며 수도원들은 몰락하고 있읍니다. 이사야의 말처럼 (40:7-8) 풀은 마르고 꽃도 시듭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숨결이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 위에 불고 복음을 통하여 그 위에 뜨겁게 비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 기관들이 얼마나 비기독교적이며 오직 인간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전념하고 있는지 밝히 드러나고 있읍니다. ... 이 이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기꺼이 그의 자녀들을 교육받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루터가 여기에서 이제까지의 교육 기관들이 사회적 지위와 재산 및 생계유지 수단을 가지고 싶어 하는 개개인의 육신적인 탐욕을 채워주는 장소들로 존재했지만 이제 말씀을 통한 새로운 개혁적 물결에 의해 상황이 달라졌음을 서술했다. 성직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또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지위가 아니기에 육신적인 이기심에서 자녀들의 교육을 중시했던 부모들은 더 이상 수도원 학교나 성당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고 자녀들의 교육을 중시한 부모들은 적어도 그러한 부패한 학교들에 입학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있었던 그 당시에 루터는 학교 건립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만일 대학교들과 수도원들이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운영되고, 젊은이들이 연구하고 생활할 어떤 다른 곳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떤 소년도 결코 공부하지 말고 그저 멍청한 대로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극히 참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멍텅구리들의 당나귀 마굿간인 악마의 훈련소들이 음부에로 빠져 버리든지 기독교 학교로 전향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진지한 목적이요, 기도며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시의회 의원들에게 그리스도교 학교를 건립 운영하도록 호소한 글’, 1524)

 

루터는 시편 78:5-6절 (“여호와께서 ...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 알게 하고 ...”)을 인용하며 교육의 필수성을 진지하게 강조했고 이것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임을 확신했다. 마르틴 루터의 교육의 필수성에 대한 이해와 개혁안이 헤센 정부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1527년에 헤센의 수도원들이 세속화되었고 이에 따라 헤센의 필립 (Philipp von Hessen)이 그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혁하고 새로운 대학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동년 5월 30일에 마르부르크 (Marburg)에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가 설립된다. 헤센의 방백(方伯)이었던 필립 I세가 대학교의 보편성과 자율성 및 경제적 자립을 위해 필요한 뒷받침을 해주었고 이렇게 마부르크 대학교는 1541년 7월 16일에 황제 카를 5세를 통하여 제국의 완전한 승인을 받게 된다. 헤센의 필립의 목적은 백성의 문맹퇴치였다. 이를 위해 소년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소녀도 역시 적어도 성경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가져야 한다는 의지였다. 그는 1539년에 슈트라스부르크 (Strassburg)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 (Martin Bucer1491-1551)의 도움도 받아 사회적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들이 교육규정 (치겐하이너 교육규정, Ziegenhainer Zuchtordnung)에 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바탕을 마련했으며 그의 후계자들이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새 길을 열어주었다. 여기에서도 마르틴 루터의 개혁적 사상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었고 이것이 교육개혁을 담당하는 정치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루터는 1530년에 뉘른베르크 시 평의원으로서 종교개혁의 진전을 위해 여러모로 전력을 다 했던 그의 친구 라차루스 슈펭글러 (Lazarus Spengler)에게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 부모의 의무에 관한 설교’ (1530)를 작성하며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든다:

우리의 영주들이 ... 학교에 보내는 것이 얼마나 ... 마땅한 일입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를 부모들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 또한 그 부모들의 유익을 위하여 – 또한 그에게 충분한 보수가 허락되는 한 직책을 위하여 그를 훈련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계속해서 장학 재단 설립에도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며 평화와 행복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설교를 끝맺는다:

정부는 유망한 소년을 발견할 경우에 학교에 보내는 일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아버지가 가난하다면, 교회의 재정이 도움을 주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자들은 장학재단을 세운 저 몇몇 사람들처럼 이 사업에 관심과 뜻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V. 나가는 말

 

루터에게 온 그리스도인들이 최고의 권위인 성서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그를 1521년 5월부터 바르트부르크에서 은신하면서도 그해 가을부터 혼자서 신약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11주 만에 완성시키게 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에 이미 여러 가지 번역들이 존재했지만 이 번역은 적어도 에라스무스에 의해 발행되었던 헬라어 신약 성서에서 번역된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 더 높은 가치를 지니며 원래의 의미에 훨씬 더 가까운 번역서이었다. 이것은 물론 루터가 아주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나 이해하기가 쉬운 번역이었다. 루터가 번역에 있어서 민중의 입을 바라보아야 함을 말한 것과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항상 시장 아낙네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귀 기울여 듣고 생각을 얻어 대중에게 친숙한 번역을 하기 위해 바르트부르크 성 아래 있는 아이제나흐 (Eisenach) 시로 내려갔다.

바르트부르크에 피신해 있는 루터에게 성서 번역 작업을 하도록 비텐베르크에서부터 격려한 사람은 필립 멜란히톤 (Philipp Melanchthon)이었으며 루터가 11주 만에 혼자서 초역을 완성한 후 이것을 1522년 3월에 비텐베르크로 가져왔고 거기에서 자신보다 그리스어 지식이 뛰어난 멜란히톤과 함께 인쇄를 목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하여 소위 ‘9월 성경’이 완성되어 출판되었다. 그리고 루터가 1522년부터는 번역 그룹을 형성하여 구약 번역 작업을 하여 1534년에 외경과 함께 신구약 번역이 완성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바로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 수단’들을 제시했음을 위에서 (III.)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 외에 가정에서도 교육할 것을 요구하며 지원했다. 그래서 집안에서의 실질적인 교육을 위하여 소 교리 문답서를 썼으며 그 후에 대 교리 문답서도 저작했다. 그가 실로 가정과 부모들이 스스로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달하여 자녀들이 성서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서를 읽고 그 도움을 빌어 성서를 올바로 해석도 할 수 있게 교육하도록 도구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부모들의 교육이 교리 문답서의 다섯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행하여지게 했다. 십계명의 해석, 신앙고백문의 해석, 주기도문의 해석 그리고 두 가지 성례전들인 세례와 성만찬의 해석이 중요한 주제들이었다.

20세기에 칼 홀의 루터 이해에 의하여 마르틴 루터의 사상이 거의 전적으로 신학적 차원에서 좁게 해석되었고 또 그것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여러 차원에서의 루터 연구들을 통하여 루터와 종교개혁이 포괄적인 개혁을 가능하게 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루터의 개혁적인 공공 사상이 드러나는 만인 사제직, 선행 실천 및 교육 이해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루터 사상의 공공성은 그의 개혁 사상이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개개인의 종교적 또는 신앙적 차원뿐만 아니라 온 사회와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친 것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루터의 세계 이해와도 연관된다. 즉 이 세계가 전적으로 다 하나님의 것임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두 왕국론’도 분명히 그의 공공 신학적 사상을 가능하게 했음을 다분히 보여준다. 정치계에 호소하는 그의 전반적 개혁안이었던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루터의 개혁 사상이 신학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공공성을 보여준다. ‘근세 민주주의의 초기 역사’를 이룬 그의 만인사제직을 보아도 그러하다. 그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기도 하다.

그의 선행에 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칭의와 실천적 선행의 상관관계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이 자신의 영혼 구원을 꾀하는 이기주의의 발판이 아닌 이웃 사랑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카리타스 (caritas)와 디아코니아 (Diakonia)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루터는 그의 문서 ‘선행에 관하여’를 통하여 칭의론의 잘못된 이해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봉사와 기증문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루터가 성서를 바탕으로 하여 남녀 모두를 위한 교육을 위해 교육 개혁적인 사상을 시의원들을 향해 호소하며 펼쳤다. 당시 몰락해가던 수도원 학교들과 성당 학교들을 보며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고 학교 건립이 시급함을 피력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 라차루스 슈펭글러에게 사회 전체을 위해 그리고 개개인의 보수가 허락되는 직책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설교문을 헌정했다. 또한 이 설교문에서 장학재단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결국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에게까지 유익하고 또한 평화와 행복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에서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까지도 유익을 끼치며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보았다. 이미 그리스도교화 되어 있던 유럽에서의 루터의 개혁 사상이 한국(감리)교회가 그대로 모방해야 할 대상이 아닐지라도 그것에 대해 재고하며 16세기 유럽 교회의 상황과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 대해 깊이 있게 비교 분석하고 숙고하며 재조명하는 것이 ‘루터500주년 포럼’의 의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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