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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정답이 없는 삶이라 해도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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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10월 08일 (일) 00:22:27
최종편집 : 2017년 10월 08일 (일) 02:01:14 [조회수 : 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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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중에서

 

• 회탁의 거리에서

  나이가 들면 삶이 쉬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누적되는 시간의 무게만큼 삶은 오히려 무거워진다. 한때 분명해 보이던 것들이 모호하게 보이고,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만 점점 뚜렷해진다. 돌아보면 시간 속을 뭉그적거리며 기어온 흔적이 어지럽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만 비껴 서 있어도 낯익은 손님인 허무감이 저만치에 서성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아득하고 막막하다. 이상의 <날개> 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 자꾸만 떠오른다.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간 '나'는 그곳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나는 또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동이를 끌고 그 회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일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이의 눈에 세상은 '회탁의 거리'이다. 잿빛으로 흐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권태에 사로잡힌 이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잿빛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킨 채 살아가는 일상이 가끔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정을 향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투쟁처럼 생기 없는 무의미가 확고하게 우리 삶을 사로잡기도 한다. 일단의 철학자들이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존재라 말했던 것은 삶의 막막함을 달리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덴 이후 인간을 사로잡은 근본 기분은 '불안'이다. 불안은 자기와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불안은 일상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우리 앞을 벽처럼 막아선 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 낯선 질문 앞에서 우리는 휘뚝거린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인간(human-being)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being-human)이라는 데,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짓궂기는 하지만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를 본래적인 삶으로 유인한다. 16세기의 수도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여정에 올랐다가 좌절을 맛본 이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는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십자가의 성요한, <가르멜의 산길>,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3년 12월 15일, p.90)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뒷전으로 밀어내고는 일상의 일에 몰두한다. 그런 물음은 예술가나 철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폴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돌아서는 순간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한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일상의 무게

  아, 그러나 삶이 그렇게 비장하고 우울하고 사소한 것만은 아니다. 시선을 바꾸기만 하면 삶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신비하지 않은가?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이 광막한 우주 가운데 티끌에 불과한 내가 무한에 대해 묻고 생각한다는 것, 자기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 마침내 태초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삶이 비애감으로만 충일한 것은 아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갔다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말갛게 씻긴 얼굴로 떠오르는 해(박두진)처럼 기쁨과 즐거움도 그렇게 찾아온다.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지어진 세상을 보며 '좋다'고 하셨다고 말한다. 그 '좋음'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마땅히 그러한(자연) 세상 속에는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야스퍼스는 그것을 초월자의 암호라 했다. 그 암호를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은 빈곤하지 않다. 

  회탁의 거리에서 바장이다가도 길가에 피어난 풀꽃 하나에 붙들릴 때가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순수의 전조'에서 노래한대로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꽃 속에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한 순간에 영원을" 담지는 못한다 해도 인간은 늘 신비 앞에서 몸을 떤다. 함석헌 선생은 "나 자신 속에 잠자고 있던 그 우주적인 정신이 내 앞에 지금 나타난 그 대상으로 인하여 깨어나는 것"이 바로 감격이라 했다.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산을 보고 기뻐할 때는 나 자신 속에 높음을 본 것이요, 바다를 보고 시원해 할 때는 나 자신이 넓어진 것이며, 성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는 나 자신이 거룩해진 것이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은하수나 장엄한 설산만이 우리에게 영원을 직관하게 하지는 않는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눈빛만으로도 장편소설을 쓰는 연인들의 시선, 다정하게 손잡고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노인들의 발걸음, 구슬땀을 흘리며 일에 몰두하는 노동자들, 우는 이의 곁에 다가가 말없이 그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

  문제는 일상의 무게가 우리에게서 '먼 빛의 시선'을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것은 좋든 싫든 자기 외부 세계와 접촉한다는 뜻이다. 그 외부 세계는 자연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다. 외부 세계는 가끔은 친밀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대개는 무심한 얼굴로 다가온다. 아주 가끔은 적대적 얼굴로 다가온다. 외부 세계는 우리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다. 외부 세계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간극이 클수록 삶의 긴장은 더 커진다. 그 불화로 인해 깊은 좌절감을 맛보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기만을 통해 그러한 불화를 호도하려 한다. 그래야 그나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자기와의 대면을 짐짓 회피하거나 연기한다. 일이나 이념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취될만한 대상을 찾아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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