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이 장안의 화제다. 추석을 맞아 개봉 4일 만에 200만 명의 관람객을 돌파했다 하니 영화의 기세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도 없다. 영화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절대적 군사적 우위를 자랑하는 청나라 군대를 앞에 두고 결사항전 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에 관한 왕과 중신들의 치열한 논쟁을 중심으로 그린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지옥이었다.” 김훈이 동명의 소설에서 묘사했던 정황처럼 주전파와 주화파는 해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그저 고뇌하고 논쟁할 뿐이다.

영화에 대하여 물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력이라든지 연출력이라든지 영화적 요소의 미덕이나 아쉬움 등 많은 생각과 얘기가 가능할 것이다. 강대국들의 휘둘림을 몸소 경험하고 있는 이 시기에 영화의 상황이 주는 공감 또한 크다. 예나 지금이나 올곧은 극소수의 정치인과 비루한 다수의 정치인들의 모습 또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개인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은 약함에 대한 것이었다. 절망과 치욕을 겪는 나라의 약함이 아니라 약함 그 자체,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었다.

절대적 약함이 있다. 절대적으로 강한 상대를 직면하여 무슨 수를 써도 결코 싸워 이길 수 없는 절대적 약함. 이때 절대적으로 약한 자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보통의 경우 우선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약함으로부터 눈을 돌려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강자 앞에서의 비겁한 선택은 곧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위장된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나 훗날을 도모한다는 자기기만적 자기합리화. 비겁한 자신의 행동을 수치스럽게 인정하기보다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절대적 약함은 때로 스스로를 파멸시켜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스스로의 파괴를 신념에 따른 희생으로 미화시키고 결코 얻을 수 없는 물리적 승리 대신 정신의 승리라도 얻고자 한다. 또는 실상은 불가능한줄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주문처럼 되뇌기도 한다. 강자는 신경조차 쓰지도 않는 약자의 자기희생과 희망고문, 정말로 이것을 고귀하다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종류의 자기 파괴와 희망고문은 약하기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강하다면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선택지로서의 정신승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절대적 약함이란 그 어떤 존엄조차 지킬 수 없는 나약함이다. 한 나라의 왕이 오랑캐의 우두머리 앞에 더러운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올려야 하는 나약함, 죽음조차 무의미한 나약함, 감히 희망을 마음에 올릴 수조차 없는 나약함, 실천 불가능한 정의와 실천 가능한 지옥 사이의 선택밖에 손에 가진 선택지가 없는 절대적 나약함. 영화는 약함의 정체와 현실을 지독하리만치 똑바로, 뼈저리게, 오래도록 지켜보게 만들었다. 그리다가 마침내 이 약함에 대한 상념은 어떤 깨달음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이제까지 나의 절대적 약함을 똑바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깨달음,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리도 내 삶에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으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