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런 글은 남긴 적이 있다.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과연 그랬다. 갈등 가운데 있는 두 당사자들의 말을 들을 때, 자신이 겪은 소위 ‘부당하다’는 취급에 대하여 들을 때, 문학평론가의 이 폐부를 찌르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드물지 않게, 분명하게 확인되곤 했다. 타인들뿐인가, 더욱 고통스럽게도 이 말은 나 자신을 들여다볼 때마다 보다 더 선명하게 무섭게 확인되곤 했다.

자신의 악함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아마도 기억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자신과 단순하게 나쁜 사람인 타인 사이의 일을 기억함에 있어 과장과 왜곡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실수와 무례를 지워버리고 타인의 그것은 극대화하며, 마치 곤경에 처할 때마다 고작 수풀 속에 머리를 처박는 가련한 새처럼,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조정하며 생존해간다.

아마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에 관한 인간의 기만과 비겁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특별히 감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며, 나아가 자신은 감이 없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하는 비련의 주인공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부박함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모든 훌륭한 문학작품이 그렇듯 주인공의 부박함은 나 자신의 부박함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오늘 내 죄를 기억합니다.”(창 41:9) 옥에 갇혀 있던 요셉의 절실한 부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술 맡은 시종장은 파라오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다행히도 시종장은 자신의 죄를 기억해내었기에 요셉과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는 곳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참다운 성찰과 진실한 반성과 처절한 회개와 진정한 용서가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기대할 수도 없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마 26:75) 우리말성경은 유감스럽게도 헬라어원문의 ‘기억하다’를 ‘생각하다’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억과 생각은 엄연히 다르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일이라면 올바른 기억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부정하는 인간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올바른 기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억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일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 이은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을 지목하시면서 이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로 기억나게 하시는 일을 언급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해 주실 것이다.”(요 14:15)

성령은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신다.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시는 분은 정확하게 기억나게도 하시는 분이리라. 그러나 이 정확한 기억은 오직 인간이 왜곡되게 기억하기를 멈출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인간의 헛된 몸짓이 멈춘 다음에야 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고작해야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이다. 기억에 대한 기만을 멈추고 잠잠히 기다리면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에게 죄의 기억을 선사해주실 것이다. 참다운 회개와 성결, 용서와 기쁨으로 이어질 진실한 죄의 기억을.

“그러나 나는 네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속되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더 이상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사 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