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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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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9월 14일 (목) 23:31:28
최종편집 : 2017년 09월 23일 (토) 05:55:57 [조회수 : 3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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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창세기 12-20장을 잘못 읽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항의하려 할 것이다. 그 위대한 바울이 그런 실수를 하다니 불경스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창세기 12-20장을 잘못 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창세기 12-20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은 그가 의심 없이 믿었다고 말했다. 신학자들이 그의 이 분명한 실수를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실수가 그의 신학의 기반을 흔들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도 눈감아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 속담이 말해주듯이 사람은 실수하는 존재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 역시 바울과 같은 종류의 실수를 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의 실수도 부가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필자는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실수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우리가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2) Sarah Hears and Laughs, circa 1896–1902, by James Jacques Joseph Tissot (French, 1836-1902)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아브라함 내외

 

창세기 12-20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단산한 사라의 몸을 통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 내외는 그 약속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라의 몸에서 낳은 아들의 자손들을 창대케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 바로에게 사라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두 번째 약속하신 후에도 그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사라가 시키는 대로 하갈과 동침하고 하갈이 임신하자 그녀를 내어 쫓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내외에게 그들의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시겠다고 세 번째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런 말씀은 그만하시라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창세기 18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사라가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말을 엿듣고 있던 사라도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 번째 약속하신 후에도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면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내어주었다. 1차 약속 후에 그가 사라를 바로에게 내어주었는데, 4차 약속 후에 아브라함이 다시 사라를 딴 남자에게 내어준 것을 보면,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그가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고향을 떠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브라함 내외는 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만은 한사코 믿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17:17)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창세기 12-15장을 잘못 읽은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

 

창세기에서 보면 이렇게 아브라함 내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는데, 바울은 그들이 그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고 말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8절에서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4:19)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으니”(4:20-21)라고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확고한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결론지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의 말씀은 진리라고 믿을 뿐 아니라, 특히 바울의 말에 오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다고 하는 로마서 4장 18-22절에 기록된 바울의 언급을 창세기 12-20장의 내용과 대조해 보면 바울의 말이 창세기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 중의 사도라고 하는 바울이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단 말인가!

히브리서 저자도 11장에서 사라가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11) 개역개정 성경의 ‘미쁘신’을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신실하신’으로, NIV에서는 ‘faithful’로 번역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사라가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실한 분으로 믿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아들을 낳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리라고 하는 말을 엿듣고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라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18:13)라고 사라를 질책하셨다. 사라가 그 말씀을 듣고는 웃지 않았다고 말하자, 하나님께서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그녀를 다그치기까지 하셨다.

히브리서의 저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아브라함 내외를 그 약속을 믿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실수를 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로마서보다 10여년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가 로마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시 히브리서 저자가 로마서를 읽지 않았다면, 그 역시 바울처럼 창세기 12-20장 전체를 믿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읽은 사람이다. 왜 성경 저자들이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단 말인가.

 


그들이 그렇게 잘못 읽은 이유

 

창세기 15장 6절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아브람의 믿음에 대한 언급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향을 떠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고백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면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의 그 약속은 믿지 못했다. 그런데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의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언급을 아브라함 내외가 그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까지도 믿은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 왜 그랬을까?

바울이 이렇게 확대 해석한 이유는 먼저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 4장 3절에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을 보면, 그가 창세기 15장 6절에 기록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를 읽고서 유레카라고 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의 내용은 그가 내세우려는 이신칭의 논리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를 구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믿었다.

바울이 그렇게 확대 해석한 데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생각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언급한 창세기 15장 6절에 이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근거를 발견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생각은 이제 그의 마음에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이야 말로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은 사람이라고, 아브라함 내외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그 결과 복을 받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확신, 이 흔들리지 않는 선입견으로 인해서, 15-20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기록이 한 번도 아니고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눈에는 그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이신칭의의 논리에 따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이 이삭을 얻기까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삭을 낳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믿음에 매혹된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읽지 못했다.

우리가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오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글을 읽을 때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하면 그 글 전체가 온통 그 선입견으로 채색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점은 성경을 교리 중심으로 읽는 ‘교리적 읽기’에서 흔히 나타난다. 어떤 교리를 앞세워서 성경을 읽으면 그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만 보이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구절들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글을 읽으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마치면서

 

세상사를 올바로 판단하려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선입견이 강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에 맞는 것은 무조건 좋다고 말하고, 맞지 않으면 무조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객관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글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버리고 전체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글 읽기의 기본이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은 물론 어떤 글이라도 올바르게 읽지 못한다.

위대한 개혁자 루터까지도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읽고 그것에 매료되어 실수를 했다. 그는 믿음에 치중한 나머지 바울의 서신서들에서 믿음에 관한 부분에만 주목하고 그 서신서들에 나오는 삶에 대한 부분은 외면했다. 로마서의 경우 1-11장은 믿음에 대한 기록이지만 12-16장은 삶에 관한 기록이다.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도 전반부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는 그 후반부의 삶에 관한 구절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루터는 행위를 중시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말했고,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은 정경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예수님 자신이 나를 본받으라고 하시면서 행함을 강조한 복음서의 말씀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자기의 주장에 맞지 않는 것은 제외하고 맞는 것만을 골라서 ‘정경 안의 정경’을 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루터는 믿음을 내세워 교리적 해석을 하다가 성경을 편향적으로 읽었고,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의 경우에는 믿음을 앞세우다가 아브라함 내외가 의심한 것조차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읽었다. 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성경을 읽었고 다른 두 사람은 자기들의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읽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모두 이신칭의라는 선입견을 앞세워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경을 왜곡하는 실수를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보고 싶은 세계만을 본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거기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 자기의 생각에 맞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다양하다.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가 다르고, 개신교 안에서도 감리교의 교리와 장로교의 교리가 다르다.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파의 교리에 맞추어서 성경을 읽도록 훈련을 받는다. 그 교리 때문에 일반적인 글을 읽을 때보다 성경을 읽을 때 독자의 선입견이 더 강하게 작용한다.

성경의 독자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에 관한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눈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을 천천히 읽으면서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나 내가 배운 교리와는 다른 구절들이 나오면, 다시 돌아가서 읽으면서 앞뒤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구절의 바로 앞뒤뿐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 안에서 그 부분이 갖는 의미까지를 살펴야 한다. 어느 한 구절은 단독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에서는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은 그 부분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비평의 효시로 알려진 『시학』에서 작품은 처음, 중간, 마지막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얼핏 너무 빤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작품의 세 부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이 없거나 부실하면 훌륭한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철학자의 말은 어느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 부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도 제외시키지 말고 세 부분을 모두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중시하고 다른 부분을 제외하는 것은 올바른 작품 읽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작품 읽기의 기본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하나님의 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어느 한 부분만을 중시하고 다른 부분을 제외하면 안 된다. 그런데 바울과 루터는 이러한 성경 읽기의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가 강한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그들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우리는 글 읽기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사도와 개혁자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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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구 (112.172.204.73)
2017-09-21 15:56:34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짓)'?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새번역>

사실은 바울이 혹은 바울의 문서가 ‘어처구니없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특정한 상황에 적합적인 글(편지=문자)을 성경으로 삼은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아마 바울이 다시 돌아와 자신의 편지를 무슨 영구불변의 진리요 하느님의 말씀이라 믿으려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를 참으로 ‘어처구니없어 할 것’이다.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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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장대구 (118.130.209.146)
2017-09-19 17:03:02
바울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의 칼럼에 분노하며
종교 개혁 500년을 맞이하여 이신칭의로 개혁되었던 역사의 현장을 무시하고 오로지 인간 중심적인 학문에서 빚어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한 칼럼을 반대한다. 정작 본인이 어처구니 없는 실수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첫째, 본인 자체가 이미 전제를 하고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왜냐하면 이신칭의의 교리를 무시하기 위해 이미 전제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보인다. 전제를 내려놓고 성경을 보야 한다면서 정작 자신은 인간중심적인 행위에 중심을 두고 성경을 해석하고 있으니까 그렇게밖에 성경이 보이지 않는 줄 모른다. 본인이 이미 행위주의 전제에 빠져 있다.
둘째, 본문을 문자적으로 본 것이 분명하다. 인내라는 말을 확대해석해서 보니 아브라함이 언제 인내했느냐고 창세기에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잘 보라 어디를 인용했는지 우리 성경에는 주를 달아 놓앗다. 인용된 부분은 아브라함 인생 전체를 놓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굽에서 거짓말했던 부분이나 이스마엘을 낳았던 부분을 인용한 성경구절을 근거구절로 대고 있지 않다. 이 구절을 제대 읽지 않은 오류가 왜 생겼겠는가? 자신이 이미 주장하고 싶은 부분만으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전제 없이 자신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교만과 만용을 부리고 있다. 과연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서적 하나 제대로 읽었을까?
세째,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포장하는데 어찌 진짜 신자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저 독자들의관심을 끌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자신이 최고의 글을 실었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할 것이겠지만 과연 학문하는 자의 바른 관점이라도 가졌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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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4
임인구 (112.172.204.73)
2017-09-22 07:13:05
그래서
그 위대한 종교개혁이 낳은 것이
고작 개독교란 말이오?
고행보다 더한 수행을 하던 루터에게는
믿음으로만('오직'은 무식의 소치이고!)
이라는 구호는
그에게는 복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개차반처럼 살던
그리고 여전히 개차반으로 사는 대다수의
무지렁이들에게
믿음으로만! 이라는 구호는
복음이 아니라 소음이요, 폭탄인 게요.
상황적합적인 문서의 적합적인 적용을 무시하고
무슨 죽이는 문자에 생명줄을 거는
이 우매무지의 극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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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1
김경환 (110.47.216.79)
2017-09-17 10:42:22
바울이 말하는 Sound or Voice의 다중적 의미
<사도행전 9장 7절>
(Suddenly a light from heaven flashed around him)...
they heard the sound but did not see anyone.
그들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사도행전 22장 9절>
My companions saw the light they did not understand the voice of him who was speaking to me.
그들은 빛은 보았으나 예수가 내게 한 소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9장 7절과 22장 9절의 종합>
사울은 빛과 동시에 목소리(소리의 의미까지 포함)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빛은 보았으나 목소리(소리의 의미는 모름)만 들었다.

<의문점>
1. 사울과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빛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고 사울만 눈이 멀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진 사울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마스쿠스로 갔다.

2. 빛을 보고 소리의 의미를 이해한 바울은 눈이 멀었다. 빛은 보았으나 소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눈이 멀지 않고 멀쩡하였다.

3. 같은 빛을 보았는데 누구는 눈이 멀고 누구는 멀쩡하다.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는 그 뜻의 의미를 파악하고 누구는 그 뜻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4.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언어로 말했기에? 빛에 강하게 쪼인 바울만 눈이 멀었다?

5. “닥치고 무조건 믿어라!” 하면 문제가 풀리나... 바울의 행적과 과장된 언행으로 비추어볼 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장면에 대한 바울의 진술은 심히 의심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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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4
남상경 (27.118.79.98)
2017-09-17 08:54:33
듣다
의견쓰기는 11200자까지 쓰실 수있습니다. 욕설 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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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
임인구 (112.172.204.73)
2017-09-16 09:36:49
어처구니없는 바울? 어처구니없는 기독교!
바울의 어처구니없음에서 비롯된 기독교는
어거스틴을 거쳐 루터에 의하여
어처구니없음의 완벽체를 갖추게 되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개신교회의 구호는
철저하게 해체되고, 온전하게 재조립되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바울의 오직 믿음의 교리와 신학은
마태와 야고보에 의하여 철저하게 부정된다.

그런데
기독교-개신교 교회는 바울의 신학에 세뇌되어
-사실, 오직 믿음이란 구호가 얼마나 편리, 유용하냐?-
마태와 야고보까지도
어처구니없는 바울의 잣대로 재단한다!
우매함과 무지의 극치이다.

기록된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
우직하게(생각없이) 믿으며
오직 믿음이라는 잣대(교리)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기독교-개신교는
문자 그대로 개독교이다.
무슨 선한 것이 거기에서 산출되겠는가?

기독교-개신교는
이제 루터의 500주년에 즈음하여
루터와 어거스틴과 바울을 극복하고
예수에게로 나아가는
진정한 개혁을 꿈꿔야 한다.

아니면
그냥 개독교로서
찌질한 죽임을 당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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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7
김경환 (110.47.216.79)
2017-09-15 02:37:34
바울의 실수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울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실감나게 설명한 부분이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사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이르렀을 때 사울 그 자신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자 땅에 엎드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함께 길을 가던 다른 사람들의 행태에 대해선 바울은 상반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사도행전 9장 7절>
다른 사람들은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 <사도행전 22장 9절>

즉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가 또 다른 때에는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오락가락합니다.

이 부분은 前後 문맥상으로 읽어도... 바울이 치매 걸린 것인지 아니면 기억력이 감퇴되어 횡설수설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음에도 만난 것처럼 거짓말하다가 앞에 한 거짓말을 까먹고 뒤에 엉뚱한 말을 한 것인지... 온갖 잡생각이 다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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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
penualnam (27.118.79.98)
2017-09-17 08:57:44
사도행전 22장 9절의 헬라어 단어 'akouo'는 마가복음 4장 33절과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처럼 '알아듣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빛을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것같이(행 9:7) 음성은 들었지만(들음의 소리)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다(들음의 그 메시지나 의미)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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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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