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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과 “로인형제”는 누구인가?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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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8월 30일 (수) 21:33:08
최종편집 : 2017년 09월 06일 (수) 07:22:13 [조회수 :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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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과 “로인형제”는 누구인가?

첫째 교파초월 구원의 복음만 전도,  둘째는 직접전도에 힘써(1907)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1910.9.), “성서학원” 설립(1911)
해외선교로 만주선교 착수(1925)-“로인(盧忍)형제“는 누구인가?(1932)

노종해 목사(KL동남아선교센타)

   
▲ 동양 복음전도관 설립자-김상준과 정빈 전도사/ 염곡-무교동 복음전도

자생적 복음전도관, 전도열정-염곡(소금골)에서 무교동으로(197-1910)

    경성복음 전도관은 오늘날 성결교회(聖潔敎會)의 모체로서 1907년 5월 30일, 서울 종로 염곡(소금골, 종로1가)에 있는 한옥을 세 얻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걸고 전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전도관은 한국인 전도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이들은 김상준(金相濬)과 정빈(鄭彬) 전도사였다.

    김상준(평남 용강군)과 정빈(황해도 해주)은 1905년 일본 동경에 있는 동양선교회(The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O.M.S.) 소속의 “성서학원”(聖書學院)에 1905년 입학하여, 1907년 졸업 후 즉시 5월2일에 귀국한 분이다. 이분들은 한국에서도 동양선교회(O.M.S)와 같은 방식으로 전도할 계획을 세우고 두 가지 방향을 설정하였다.

    첫째로 교회와 교파를 넘어서서 구원의 복음만 전도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나 교파를 설립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어느 교회든지 나가도록 한다는 것으로, 심령(心靈)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둘째는 직접전도에 힘쓰는 것이다. 교육이나 의료, 문서출판과 같은 간접적인 방식의 전도 보다 직접 복음을 들고 찾아가서 전도하는 방식이다.

    김상준과 정빈 전도사는 “경성복음전도관”을 설립하자마자 직접전도에 임하였다. 즉 북을 들고 거리로 나가 한 사람은 북치며, “믿기만 하오 믿기만 하오” 찬송을 불렀다. 찬송 소리와 북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이면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과 피해를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용서하심과 중생케 하시는 은혜를 증거 하였다.

    이 구원의 기쁜소식(복음)을 듣고 결단시키기 위해 “복음전도관”으로 모이게 하였다. 길거리에서 장마당으로, 장마당에서 마을로 이들은 복음전도의 일념(一念)으로 피곤함도 잊고 멸시와 조롱의 손가락질도 무시하고 복음전도의 사명 감당을 위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는 것을 감사하며 기쁘게 감당한 것이다.

    북을 치며 찬송을 부르고 전도할 뿐 아니라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방문하며 축호전도도 힘썼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데 열정을 다 쏟은 것이다. 이러한 열정에서 전도한지 1년도 안 되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힘 있고 능력 있는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죄의 용서와 구원하시는 은혜로 인한 통회자복과 은혜 충만의 도가니가 되었다. 구원의 기쁨에서 온갖 시기와 미움, 탄식과 원망, 근심과 불안을 벗어버리고 능력의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었다. 바로 여기에 감격과 기쁨의 찬송이 있었다. 북을 치며 손 벽을 치며 기쁨의 찬송을 함께 불렀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복음전도를 위해 헌신하였고 곧 3천여 원의 헌금이 모아져, 1908년에는 구리개 즉 무교동 12번지에 대지와 한옥을 구입하고 이전하였고,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으로만 사용하였다. 이 복음전도관은 오늘 성결교회(聖潔敎會)의 시작이 되었고, 중앙성결교회(中央聖潔敎會)의 전신이기도 하다.

    복음전도관은 사중복음(四重福音)을 내세우고 전도하였다. 첫째 중생(重生)케 하시는 그리스도, 둘째 성결(聖潔)케 하시는 그리스도, 셋째 치료(治療)하시는 그리스도, 넷째 재림(再臨)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4중 복음은 오늘날 성결교회에 이어지고 있다.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조직(1910)-성서학원 설립(1911)

   
▲ 죽첨정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성서학원(1912.)

    복음전도관은 1910년 9월에,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란 교단을 조직하였고, 이듬해 1911년에는 교회 내에서 수업하는 임시로 “성서학원”(聖書學院, 현 서울신학대학)을 설립하여 전도자를 양성하였다. 1912년에는 죽첨정(현. 충정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경성 성서학원“을 신축키도 하였고, 제1회 졸업생 1명 ”이명헌“을 배출하였다. 이후 1920년 ”동양선교회 시대“가 끝나기까지 졸업생 56명(남자 39명, 여자 17명)을 배출, 전도인 양성하여 전국 성결교 부흥을 이루게 하였다.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교단“(1921년)으로 조직되고, 1929년에는 ”서대문 전도관“을 신축하고 이전하였으며, ”성결교회“는 ”연회“를 조직하였고, 기관지로 ”활천“(活泉) 지를 발간하였다.

    김상준(金相濬)와 정빈(鄭彬) 전도사는 복음전도관의 설립자요, 한국 성결교회의 기초자이며, 성결교회의 최초 목사이기도 하다. 이들은 동경의 동양선교회와 복음전도 문제를 연락하고 있었는데, 1910년 동양선교회는 영국인 “죤 토마스‘(Rev John Thomas) 목사를 ”한국 감독’으로 임명 파송하여, 한국에도 “동양선교회”(O.M.S.)를 세우고, “경성 성결교회”를 조직하였다.

 

동양선교회 만주선교 착수(1925); 동만주에서 남만주로 확장(1932)

   
▲ 동양선교회-경성 성서학원(1932.3.)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교단(1921년)이 제1회 성결교회 총회(1932년)가 열렸고, 최초로 해외에 선교도 자립선교로 만주선교를 착수하였다. 자립선교는 성겨교회의 특징으로 외국선교부에 의해서가 아닌 만주에 거주하는 성결교인들의 노력과 청원으로 착수되었다. 1924년 간도지방 용정의 간 박기래, 박장환, 한치국 집사 3인이 기도회와 전도집회가 동인이었다. 용정에 살고 있는 교포 30여명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교역자의 필요를 절감하고 교역자 파송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요청에 한국 동양선교회 이사회는 지원을 결의하고 1925년 3월에 최초의 선교사인 이원근 전도사를 파송하여 용정교회를 설립하고 만주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조승각, 황성택, 박문익, 김인석, 김선학 등이 부흥운동과 교회설립에 힘을 써, 동만주 지역에서 할빈교회, 명월구교회, 목단강교회, 조양천교회, 도문교회, 연길교회 등을 또한 남만주 지역에는 봉천교회, 무순교회, 안동교회, 심양교회, 북능교회, 포하교회 등의 교회를 8 15 광복 전까지 계속하여 설립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과 함께 중국이 공산화됨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만주를 떠나게 되어 1925년에 시작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약 20년 동안 많은 열매를 거두며 활발히 전개되던 만주선교가 중단되었다.(참고:기독교 대한성결교회 해외선교사역)

 

나가며-'로인형제'는 누구인가?-만주선교사 파송(1932) 받아 사역활동
 

   
▲ “노인”(본명:노문진) 선교사(1929년, 24세)

    필자는 '로인(盧忍)' 선교사의 '손자'로 조부님에 대한 얘기를 아버님(노병례)으로부터 단편적으로 들어왔으나, 정확한 자료를 접하지 못하여왔다. 그러나 최근 '활천(活泉)' 지의 “만주봉천 활동 소식” 보도를 접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공개하게 되었다. '활천(1932년10월호)'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 *“活泉”(1932年10月號)-만주 봉천포하로 임명 된 “로인형제”

 

이를 문서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래는 “노인”(盧忍) 선교사에 대한 장남 노병례(노종해 부친)의 기록이다.

노문진(盧文珍, 1906-1951)-기독교 입신 후 개명: 노인(盧忍)
    “노문진(1906년 생)은 20세 시 일본 동경 자유주의 서양 신학문 배우러 갔다가, 갑자기 걸리신 병 1926년 경, 와세다(早稻田) 성결교회( 聖潔敎會에)서 구원 치유 받으시고 고향집에 오셨을 때, 간증전도하시니 곧 할머님과 아내 회개 입신, 곡식 저장의 고방(庫房)간과 부엌 등에 섬겨 모시던 귀신 당직개(싸리함) 다 부셔 태워버리고 그 때부터 2키로나 먼 교회에 눈이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다니신 독실한 신앙심”(참고-盧炳禮: 피와 눈물의 “평화의 뿌리”, 九旬記念特集, 서울, 삼일인쇄 2013.p394)

    또한 “나(盧炳禮)의 아버지는 26세 시 일본 동경(東京)에서 구원의 체험으로 귀국 당시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神學院)에 입학 졸업 직 전 1932년 만주 봉천(奉天=심양) 북능(北陵)이라는 곳과 무순(無順) 등지에서 선교사로 4-5년 동안 열심히 개척전도하시다....선교사에서 생겨난 위장병, 늘 아프시던 것 더욱 심한 통증으로 피난 못가신다고...”

   
▲ 동경 와세다(早稻田) 성결교회 시절(1929)-앞줄 우측이 노문진(노인)

    조부 노인(노문진) 선교사는 동경으로 유학 가셨고, 20세 때인 1926년에 “와세다 성결교회”에서 신앙체험으로 기독교로 입신하셨으며, 1929년 초 귀국하여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 하시였다.

    1932년 초 성서학원 졸업 직 전 후, 동양선교회로 부터 “만주선교사”로 파송 받아, 당시, 남만주 지역으로 선교지 확장되던 때 동년 7월 12일, “봉천포하”에 도착하여, 즉시 북치고 소리 높여 찬송하며 “노방전도”에 착수하였고, 북능과 포하에 교회개척 설립활동에 임하였다. 과로로 질병이 악화 되어 5년 사역을 마치고, 1937년 경 고향(평남 평원)으로 귀향하였고, 투병 중 해방과 6.25사변을 격는 중, 결국 극심한 질병으로 1.4후퇴 때 피난하지 못하고, 1951년 별세하시었다.

    손자 노종해(盧宗海)는 부모와 남하하여, 감리교회 목사이며, “말레이시아 선교사”로 헌신하여 파송(1985년4월4일) 받아, 32년 동안(1985-2017) 사역 중이다. 앞으로 더욱 심층적으로 “세계 한인선교님들과 사역활동”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조부님의 선교사 헌신의 삶을 기억하면서, “달려 갈길 다 달려가도록” 세계선교사명 감당할 것을 결단하고 있다.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rch-20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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