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피조물과 다른 그 무엇이 있다. 먹고 배설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동물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의 삶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수 있고, 아니 먹어도 배부를 수 있다.

사람의 삶은 단순히 ‘먹는다’는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 차라리 인간은 환경을 먹고사는 존재라 해야 할 것이다. AB간척지를 지나다 보면 지난 늦봄의 상흔이 눈에 들어온다. 가지런히 벼가 줄을 맞춰 늘어선 논배미들 사이에 듬성듬성 잡초가 난 논들이 보인다. 오랜 가뭄 때문에 모를 내지 못한 논의 모습이다.

그땐 온 들녘에서 마른 논바닥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일 방송매체들은 등터진 저수지 바닥을 비추고, 시름 앓는 농부들의 타개지고 골진 이마를 바짝 비추면서 동정 어린 도움을 호소했다.

한동안의 보기 드문 긴 가뭄과 불볕더위는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갈가리 찧어 놓았다. 오죽하면 마을 방송을 통해 이장님이 서로 이해하며 가뭄의 난국을 타개하자고 호소했을까. 지금도 길을 가다보면, 그때 슬기롭게 가뭄에 대처해 줘서 고맙다는 현수막이 남아 있다. 헌데 지금은 너무 비가 와서 문제다.

비가 잠시 그치면 들녘으로 하늘거리는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안면휴양림을 걸으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날 걷고 싶어도 함부로 들녘의 바람 부는 언덕길에 오르지 못했다. 더군다나 논두렁은 밟을 생각조차 못했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엔 한가한 들녘을 거닐면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아 보고 싶은 충동이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요즘 같이 바쁜 철에는 들녘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 농민들은 뙤약볕에서 일하는데 한가로이 들녘을 걸으면 아무리 선해도 나쁜 인상을 자초할 수 있다.

내남직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남은 땀 흘려 일하는데 한가하게 걷다니, 농민들은 부화가 난다. 하지만 이곳은 휴양림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굳이 농심을 다치게 하면서 들녘을 걷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걷고 싶어도 못 걷던 때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다.

논둑길을 걷는 게 죄일까. 분명 아니다. 하지만 농민들이 쉴 새 없이 일하는 곳으로의 한가한 산보는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상대성’이란 말의 의미일 것이다. 가물 때는 비가 오는 게 좋다. 비가 흔한 때는 볕이 나는 게 좋다.

사람은 타인이나 환경과의 조화를 행복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은 행복한데 불행하다. 이는 풍요롭지만 다른 이와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는 의미다. 멀리 떠가는 하늘 구름을 보며 생각한다. 혹 나로 인하여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는 없을까. 반대로 내가 다른 이 때문에 불행해하는 건 아닌가.

그때는 가뭄이 죄였다. 지금은 호우가 죄다. 익어야 할 곡식이 떨어지게 하는 죄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분은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만 절대적이다. 상대적인 것을 조화롭게 하며 절대적인 그분만 바라보리라 생각하니 하늘이 더욱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