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는 작은 모임에서 겁도 없이 덜컥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정하고 말았다. 축약본도 아니고 원전을 번역한 양장본의 책은 800페이지가 넘는 들고 다니기조차 어려운 책이었다. 이 두꺼운 책을 할 일 많은 방학 두 달 동안 읽기로 감히 작정한 것이었다. (거의 같은 분량의 <오뒷세이아>까지 이 방학에 함께 해결하려고 했던 무모함은 곧 중간모임을 통해 그 비현실성이 드러났고, <오뒷세이아>의 독서는 곧바로 겨울방학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와의 전쟁에 등장하는 모든 걸출한 영웅들의 이름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외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기억하기도 불가능하다. 때로는 한 페이지에만도 십여 명씩 언급되는 수많은 영웅들은 치열한 전투 가운데 서로 죽이고 죽는다. 이 싸움은 단지 모든 소동의 발단이 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한 여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영웅들은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 각자 자신의 이름을 위해 싸운다. 명예(名譽), 이름에 대한 기림이야말로 목숨을 건 전투의 참 목적이다. 서사시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처음에 선택권이 있었다. 평범하고 행복한, 그러나 이름 없이 살아가는 천수를 누리는 삶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 줄, 그러나 필연적으로 단명하게 될 운명을 선택할 것인지. 아킬레우스는 후자를 택했고 결국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불멸성이다. 그리하여 그리스인들은 신을 불멸의 존재라 부르고, 인간을 필멸의 존재로 부른다. 인간이 신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신에 가까워진다는 것이 불멸을 누리는 것일진대 방법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을 통한 불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인간 영웅들은 이름을 통하여 신의 불멸을 누리기 위해, 그것으로 신의 존재에 다가서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건다. 이들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명예가 손상되는 것, 즉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이고, 어쩌면 가장 두려운 일은 자신의 이름이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것이다. 이 생각은 무덤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의 무덤이나 한자어 묘(墓)가 죽은 이를 묻은 ‘장소’를 가리키는 데 비해 그리스어의 무덤은 ‘기억’이라는 단어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니까 그리스인에게 있어서는 무덤이란 죽은 자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가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머무르는 곳인 셈이다.

명예와 유명에 대한 집착에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과 태도는 얼마나 귀하고 품격이 있던가. 하지만 이름을 향한 집착의 추악함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 추악함에 더욱 익숙하다.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 유명해지겠다는 욕심을 온갖 선한 의도로 감싸고 스스로도 속인 채 유혹에 넘어가 패악을 저지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명예에 대한 탐욕이 당사자와 조직을 망치는 일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인터넷과 영상매체의 기술발전은 유명해지는 길을 더욱 쉽고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이들은 온라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기에 열심이다. 어쩌면 이 모든 노력 역시 불멸을 향한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이름을 남기려 애쓰고 있는 이때, 유난히 찬송가의 한 구절이 가슴에 다가오는 이유는 어쩌면 똑같이 이 욕망을 향하여 서 있는 내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일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