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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원로장로의 신학공부 이야기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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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8월 10일 (목) 23:27:45
최종편집 : 2017년 09월 23일 (토) 05:55:00 [조회수 : 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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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고 전화도 없었는데 오랜만에 전화를 해 와서 반가웠다. 먼저 그의 인사는 “야, 더운데 어떻게 지내냐?”였다. “나는 요새 더위와 싸우는 게 일이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지내냐? 백수가 된 네가 무엇이 그렇게 바빠서 형님한테 전화 한 통화도 없었냐?”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 왈 “야, 이 녀석 보게, 너는 왜 형님한테 전화를 안했냐? 너도 백수기는 마찬가진데, 형님이 먼저 전화를 해야 하냐?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으니 누굴 탓하겠냐!”

“야 나는 <당당뉴스>에 올릴 글을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그랬다고 치고, 너는 아직도 풀룻을 배우느라고 바쁘냐? 손가락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서”라고 내가 말을 받자,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야, 나 신학공부 한다. 그동안 공부하느라고 바뻤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뭐? 신학공부를 해? 신학책을 읽는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그런 게 아니란다. 신대원에 적을 두고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있단다.

외국어를 공부하면 치매예방에 좋다고 해서 주민센터에 가서 중국어를 공부했었단다. 그런데 별로 쓸 데도 없는 중국어를 공부하느니 신학공부를 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혼자서 신학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그래서 신학대학에 가서 문의했더니 자기 같은 사람은 서류전형만으로 신대원에 입학할 수 있다고 해서 얼씨구나 잘 됐다 싶어서 등록을 했다고 한다.

이 친구 내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열을 내서 늘어놓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막상 등록은 했지만, 계속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내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벌써 세 학기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고 여섯 학기의 반을 했으니 4분의 3을 한 셈이란다. 그리고 내가 <당당뉴스>에 올린 글에서 평신도들도 신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 말이 자기가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단다. 우리는 보통 친한 친구가 하는 말이나 그가 쓴 글의 내용은 귓등으로 넘기기가 쉬운데, 내가 쓴 글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젊어서부터 신학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직장에 매이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직장의 굴레도 벗어난 지금 남아도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힘이 들기는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되어서 아주 행복하단다. 나도 젊었을 때 신학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못하고 있다가 늦게 신학을 공부하면서 힘든 줄 몰랐었기 때문에, 그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50대 후반에 신대원을 다녔지만, 그는 이제 치매를 걱정해야 할 70대 후반이니 힘이 들 것이다.

아주 잘 한 일이라고 격려해 주어야 할 일이지만, 늦깎이 신학생이 주위 사람들에게 동키호테 같이 보일 것 같아서 걱정이 앞섰다. 70대 후반의 늙은이가 젊은이들과 같이 앉아서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침침한 눈으로 글 읽기에 집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이가 들면 기력이 떨어진 탓인지 자꾸 졸린다. 나는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졸 때가 많다. 요즘 다시 성가대에 서면서, 성가대석에서 졸면 안 되니까, 성가연습 시간에 진한 커피를 마셔둔다. 지난주에는 두 잔을 마셨다.

어떻든 대단한 일을 시작했다고 칭찬하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따라갈 만하단다. 학점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어떤 과목은 슬슬 이름이나 짓고 재미있는 과목 위주로 한단다. 제일 힘들었던 과목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였다고 했다. 낙제는 면해야 하니까 단어를 외운다고 외워도 단어시험 시간에 70점을 넘기기가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시험을 보러 가면서 자동차 안에서 외운 단어도 막상 시험지를 받고 나면 깜깜이가 되더란다.
 
이 친구가 화제를 바꾸어서 자기네 교회의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하고 이야기를 할 때면 마지막 화제는 항상 자기네 목사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사에 대한 불만은 단순히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가 청빙 위원장을 맡아서 모셔온 목사가 마음에 차지 않고, 그가 건축위원장을 맡아서 건축한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 말이다.

왜 목사들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사랑, 칭의, 십자가의 구속 같은 추상적인 말들만 되풀이하는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3, 40년 씩 교회 다닌 사람이 그런 교리를 모를까봐서 주일마다 그런 기본적인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그런 것은 성경공부 시간에 가르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실천신학 교수도 요즘 교인들은 교리에 대한 설교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더란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1년 반 전에 하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1년 반 전에는 목사가 추상적인 교리 설교를 한다고 왜 삶에 대한 설교는 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데에 그쳤는데, 이번에는 자기 같으면 그렇게 설교하지 않겠다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성경을 거론하면서 자기주장을 펴기도 했기 때문이다.

자기네 목사는 거의 매주일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한단다. 성경 본문은 달라져도 결론은 항상 십자가의 보혈이어서 서론과 결론이 맞지 않는 때가 많다고 했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지만,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라고, 주일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니 졸린단다. 그런데 졸면 존다고 무어라고 하니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그가 전에 반복적으로 하던 말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해도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랑이고 희생이기 때문에 사랑이나 희생에 대한 설교도 십자가와 관련이 있고,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사람은 충성하고 봉사하게 될 테니 감사나 봉사에 대한 설교도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통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보혈의 은혜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할 테니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관한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복음서 특히 산상 수훈의 예를 들면서 예수님은 믿음뿐 아니라 행함도 중시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에서도 행함을 중시했다고 말했다. 특히 계시록에서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환상에서 행함을 강조했고 심판 날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행함에 따라 심판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목사들은 그런 말씀은 제쳐놓고 바울이 말한 믿음만을 혹은 교리만을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인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후반 부분은 분명히 그가 전에 하던 말과는 다르다. 이러한 구체적인 대안이나 행함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대는 것은 신학공부를 한 결과인 것 같이 보였다.

친구가 혼자서 떠드는 말을 한참 듣다가 “야, 너 회사에서 일찍 나와서 신학을 했으면 훌륭한 목사가 될 뻔 했다”고 말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글쎄, 나를 시켜주기만 해봐라 내가 훨씬 더 잘 하지”라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이 친구가 전화에 대고 열을 내서 떠드는 것을 보면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쏟아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이 친구 늦게 시작한 신학공부의 맛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나가서 책을 읽는 것 아니겠는가. 눈도 침침할 텐데,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이 친구가 신학공부를 한다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늙은이가 주책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공부는 목회를 하려는 사람만 하라는 법이 없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해야 할 일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고 노소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노력해야 할 일 아닌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호흡이 있는 한 지속되어야 할 일 아닌가. 내 친구처럼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서 하나님에 관한 학문에 열중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 친구처럼 신학대학에 가야만 신학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교회사나 신학사에 대한 책을 읽다 보면 궁금해지는 것들이 생기게 되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금씩 독서 범위를 넓혀 가면 된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무엇보다 종교 개혁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왜 종교 개혁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개신교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소상하게 알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에 멈추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리교인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 감리교를 창시한 웨슬리와 감리교 신학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유명한 현대 신학자들에 관한 책들도 읽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보통 현대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에르마허가 기독교 신앙을 외면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려고 책을 썼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책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신학자들은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는 현대인에게 신앙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도 기독교 신앙을 현대의 문화를 호흡하는 우리 이웃들에게 전하려면 그들에게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늦게서야 신학을 공부하느라고 애쓰는 이 친구를 찾아가서 격려해주어야겠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이 친구의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함께 강의를 듣기도 하고, 학교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해야겠다. 수업이 끝나면 까페에 가서 어제 전화로 다 듣지 못한 이 친구의 신학공부에 대한 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어야겠다. 평신도들도 신학책을 읽어야 한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 친구를 격려해 주어야겠다.

이제 치매를 걱정할 나이인데도, 복음의 진수를 알고자 하는 이 원로장로의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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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112.XXX.XXX.39)
2017-08-28 10:58:55
시원한 샘물 같은 글, 감사드리며 필자와 친구분 장로님의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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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잔나비 (221.XXX.XXX.172)
2017-08-12 21:43:16
우리 모두 신학공부 해서

성경으로 장사하는 목사

몰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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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직딩교인 (223.XXX.XXX.204)
2017-08-11 08:16:47
아름답습니다 기도로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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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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