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시녀이야기’라는 책을 사서 일주일에 몇 장씩 일 년 내내 읽을 기세로 여유를 부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중반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저출산이 지속되면서 미국이 전체주의 국가로 변하고 여성을 임신과 출산의 도구로 통제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유를 잃은 한 여성의 독백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고 아프게 글을 쓸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저희 집 책장은 항상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 남편이 가지고 있던 책장 두개와 결혼 후 산 책장 둘,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키 낮은 책장 둘, 이렇게 여섯 개의 책장이 지금 거실에 놓여 있습니다. 책은 이사를 할 때마다 몇 박스씩 정리해서 버리기도 하고 알라딘 중고 책방에 판매하여 다른 책으로 교환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비워놓은 책장은 또 금세 가득차서 책은 이중으로 꽂히거나 가로로 눕혀서 쌓여 있습니다. 부지런히 정리해도 책 사는 사치를 최고로 아는 남편과 저, 그리고 만화책을 계속 사서 보는 큰아이 덕에 책장의 허리가 휩니다.

  주일 저녁 책장을 보면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우연히 같은 책이 두 권 있는 것이 보여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려고 꺼냈습니다. 그리고 아끼는 책 중 한 권이 보이지 않아서 군인들 중 누가 빌려간 것인지 남편에게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책들 중  공지영, 신경숙, 김형경, 파울로코엘료, 스캇 펙의 책은 버리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친구는 공지영의 책을 제게 빌려가서 아직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영영 못 돌려받으면 같은 책을 다시 살지도 모릅니다.

   고호의 도록은 제가 혼자 아이들과 전시회에 다녀와서 남편에게 선물했다고 첫 장에 쓰여 있었고 알랭드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남편이 어느 크리스마스에 저에게 선물한 것이어서 편지도 같이 꽂혀 있었습니다. 진부령 미술관을 앞에 두고도 잘 가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그림을 좀 더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굴뚝같습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지 않는데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는 세 번 정도 읽어서 더 손이 많이 탄 책이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여기저기 줄을 그어 둔 책들은 언제 다시 들춰볼지 알 수 없어 버릴 수 없습니다. 이사를 다니지 않으면 독립된 서재를 만들어서 책을 버리지 않고 꽂아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때때로 생각합니다.

   주일날 아침에 예배 반주 봉사를 하는 군인 청년이 와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 친구의 피아노 치는 뒷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더불어 제 귀도 호강을 했습니다. 저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습니다. 20대 초반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던 큰언니는 “나 나이트야”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병원 야간 근무를 그렇게 말 한 것이었는데 저와 작은언니는 “언니는 나이트 죽순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놀리곤 했습니다. 작은언니가 음반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듣기 시작한 클래식, 저희 자매는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큰언니가 요즘 홈클래식 채널을 틀어놓고 차 마시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고전 음악은 나이도 고전스러워져야 좋아지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고전스러워지고 있습니다.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 책처럼 꽂아두고 싶습니다. 시대를 역행해서 CD로 보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사실 무슨 책을 사야할까를 고민하는 일은 드뭅니다. 서점에 가보면 사고 싶은 책이 보이고 SNS를 하다보면 신간에 대한 안내가 있습니다. 제 시간의 여유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보다 읽고 싶은 책(사고 싶은 책)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들인 책들을 정리할 때는 고민이 많이 됩니다. 사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돌려주어도 될 만한 책들도 굳이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는 정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합니다.

  여느 사람들처럼 신나게 노는데 취미도 소질도 없는 40대 부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향연인 서점 배회하기와 도서 구입하기는 이렇게 또 다른 고민을 가지고 옵니다. 주일 저녁 잠 못 들고 매의 눈으로 어느 책을 정리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책장을 보면서 제 삶에 가지고 들어온 수많은 경험과 지식들도 비우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장은 꼭 필요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제외하고는 정리하고 비우는 일에 익숙해져야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지금 책들을 싹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채우고 또 버리는 일, 쉬운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그것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버릴 생각을 못할 때도 많습니다. 미래의 어느 순간에 쓰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저장욕구가 발동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많이 싸들고 이사를 다닐 수는 있지만 그렇게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에, 정리해서 버려야 할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