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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전도운동 정말 해야 하나?
지학수  |  csw365so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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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5월 18일 (목) 13:35:24
최종편집 : 2017년 05월 23일 (화) 22:58:35 [조회수 : 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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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전도운동 정말 해야 하나?

 

   
전국임원대회에서 '100만전도운동 정말해야 하나?'를 주제로 발표하는 지학수 본부장. ⓒ당당뉴스

입을 모아 “한국교회는 위기” 라고 말한다. 미래학자 최윤식은, 한국교회에 다가 올 3가지 위기를 말한다. 첫째, 2017-18년에 다가 올 경제위기, 둘째, 2028년 경,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상당수의 3-40대, 2차 산업종사자가 대량 해고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실업은, 교회의 헌금 감소와 가정불화를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 셋째, 현재 년 1% 정도의 교인 감소 추세가 지속될 경우, 저 출산과 더불어 교회가 공동화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2050년에 이르면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불과 400만 남짓할 것이라고 예상한다1). 현실도 그리 밝지 않다. 일 년에 백여 개의 교회 건물이 경매물로 나온다. 교회 건축의 여파는 재물이나 건물만 잃는 것이 아니다. 텅 빈 건물만 남긴 채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한다.

왜 이렇게 줄고 있나? 외부적인 요인으로, 경제적 여유, 주5일 근무와 여가 문화, 건강 보험과 사회보장제도, 탈종교적 경향, 저 출산과 고령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를 손꼽는다. 내부적인 문제는, 목회자의 독선과 일탈, 헌금 강요, 무리한 교회건축과 교인 간의 분쟁 등을 지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대형교회 뒷자리에 앉아 예배만 드리는 미등록 교인의 수가 늘어난다. 특히 “비합리적 신앙 강요와 노방 전도 방식” 등을 싫어하는 젊은 층의 이탈은 더 심각하다. 거의 40%에 달하는 청년들이 지난 십년 사이 교회를 떠났다.

곤혹스러운 오늘의 현상과 불길한 예측대로 이루어진다면, 조만간 교회는 양로원교회로 전락하거나, 텅텅 비고 말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손 놓고 앉아서 다가오는 위기를 그대로 맞아야 하나? 아니면, “그래 더 망해야 된다!” 고 비웃으며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교인은 줄어들고, 목회자는 교회 빚 갚느라 허둥대고 있을 때, “100만전도운동”이라는 슬로건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소리듣기 알맞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어용이라 매도당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으면 결국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 몇몇 성공한(?) 교회를 제외한다면, 서구 교회나 미국 교회처럼 노인들만 앉아있는 양로원 교회로 바뀌고 말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뛰놀고, 청년들의 노래 소리가 교회를 채우고, 장년들의 열기가 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도를 전해야 한다. “전도하자!”는 요구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오늘이 어둡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본다. 믿음의 선배들은 그들에게 닥쳐온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살피고 그들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1.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1907년 평양대부흥회 이후 서서히 식어가는 불길을 아쉬워하던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은 산 기도를 통해 새로운 성령의 불길을 접하게 된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매리안 스톡스는 “송도 지방에 50,000명!” 전도의 꿈을 기도해주길 부탁한다. 그의 기도는 남감리교회 연회에서 “이십만 명 전도!”로 확장되고, 1910년 가을, 선교사 리드의 제안으로, 한국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에서 “백만의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결의하였다. 그 다음 해부터 총무를 맡은 리드의 리더 십 아래 힘차게 시행되었다. 이때, 전 세계를 순회 중이던 부흥강사 채프만, 알렉산더 등이 참여하였고, 내한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다함께 캠페인에 동참하였다. 기도하고, 전도지와 복음서의 배포하며, 개인 전도를 위해 100,000일의 날 연보를 통해 전도에 헌신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마가복음 700,000부를 인쇄 배부하였고, 거의 모든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했다. 그 당시의 전도가 “소수의 엘리트나 선각자에 의한 전도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 성원에 의한 전 방위적 전도”였으며, 자신이 만난 예수와의 체험을 나누는 증거였다2). 입으로만 하는 증거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전도였다. 한 개인의 삶의 방향과 가치관만 바꾼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윤리적 잣대와 리더십을 바꾸어놓았다. 이로 인해 교회는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 열매 가운데 하나가 3.1 만세 사건이었으며, 계몽운동을 통해 수많은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는 100만 전도운동의 실체적 열매요, 조선 사회를 바꾸는 복음의 승리였다.

거창한 슬로건과는 달리, 물량적인 성장만 살핀다면 “100만구령운동”은 목표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숫자 그 이상의 열매를 거두었다3). 하나의 슬로건 밑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교역자들이 연합하였고, 여기에 조선그리스도인들이 단합된 마음으로 함께 전도에 임하였다. 선교사 간의, 선교사와 조선인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고, 모두가 하나를 이루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백만운동을 통해 거둔 열매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첫째, 매서인이나 한국인 전도인들의 목숨을 건 헌신을 통해 교회의 리더십을 확보하게 되었다. 백만운동의 열기 속에서 보여준 조선인 사역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목숨을 다한 헌신을 통해 개인의 인격과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선교사들은 과감하게 조선인 목회자들을 발굴 양성하고 이들에게 교회와 지방의 치리를 맡겼다4).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교회의 연합을 이루었을 때, 한인 최초로 양주삼목사가 총리사가 되었다. 교회 치리와 전도 사역을 담당하는 본처목사와 22명 가운데 21 명의 지방감리사까지 조선인들이 맡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지속적인 재정적 지원과 교육 사회사업의 지도 외에는, 개 교회 운영에 있어 실질적인 자립과 자치의 초석을 놓게 된다. 자립과 자치는 조선인들에게 만세사건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기억과 더불어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게 해주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경제적 어려움을 교회와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으로 승화시켰다.

둘째, 70만부나 되는 쪽 복음 보급을 위해 문서발행과 출판 활동이 크게 강화되었다. 문서 전도를 위해 많은 권서인들이 헌신하였고, 새신자들을 위한 주일학교 체계가 확립되어 체계적인 교육이 시행되었다. 특히 서구-기독교식 교육을 통해 사회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정신과 신앙으로 무장되었고, 그중에서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기독교의 몫이었다5). 사실, 교육의 가장 큰 혜택은 농촌 지역이나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여자 아이들과 부녀자들에게 돌아갔다. 이제, 여성들도 당연히 교육받아야 하는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여성을 위한 수많은 보통학교와 중고등학교 및 4년제 대학까지 설립하게 이르렀다.

셋째, 100만구령운동은 토마스 하디의 회개운동과 평양대부흥을 통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교회들이 무력증을 맛보기 시작할 무렵 던진 하나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그 비전은 숫자적 성공보다는 교회의 체재를 갖추고 리더십 배양과 교육제도의 정립과 같은 내실을 갖추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고 보인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꺼지지 않는 열정과 열심, 빚을 내어서라고 자체 건물을 보유하고 설교자의 생활비를 조달하려고 했던 교인들의 헌신, 그리고 자치를 통해 자존감과 민족적 긍지의 불길을 교회를 통해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열매는 농촌 계몽운동, 수많은 학교 건립을 통한 지속적 교육 사업, 그리고 출판과 문서 사역에 헌신으로 문화 사역으로 이어진다.

끝으로 이 운동을 통해 자치를 몸에 익힌 교회는 천도교와 더불어 3.1만세 사건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만세 사건으로 인해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지만, 만세사건 이후 십년 동안, 남감리교회[와 북장로교회]는 거의 두 배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6). 이 시기에 북감리교의 경우 선교비와 후원비가 감소하고, 만주 등지로 이주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사회주의 영향으로 교회를 불신하는 안팎의 저항과 장애요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히 내실을 다져갔다. 성령의 불을 가슴에 담고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하는 교회는 제 모습을 찾아 성숙해지고 있었다. 1910년의 스톡스와 동료 선교사들에 임한 성령의 불은 조선 민족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금질하는 “내면의 불”이었다. 이 불이 꺼지고 전도의 열기가 식으면, 교인은 줄고 교회는 결국 문을 닫게 된다. 1885년부터 1930년 사이에 조선기독교회는 흥망성쇠를 모두 경험하였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도 경험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쉬지 않고 전도했고, 매 십년 단위로 부흥운동과 증진 운동을 시행하여 식어가는 불길을 다시 지피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만구령운동은 무엇보다 성령의 역사이었다. 성령의 선취적인 선택과 인도하심인 스톡스를 포함한 젊은 선교사들에게 임했고 부단히 인도하셨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선교사들은 단합하였고 올바른 선교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 정책을 부단히 수행하였고, 단기간에 기대했던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전도의 열기와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의 전도 운동은, 선교사들이나 지도자들만의 일이 아니었고 모든 교인들이 참여한 총체적인 전도였다. 바로 여기에서 여성 교육과 여성들의 지도력 향상, 그리고 나아가 평신도들의 리더십이 발전 고양되는 열매를 거두었다. 조선기독교인들의 목숨을 건 희생과 모든 것을 주를 위해 포기한 헌신은 교회의 지도력 이양을 이끌었고, 마침내 조선인에 의한 실질적인 자치와 자립, 모국어 성경공부 인도와 설교를 도맡게 되었다. 전달력의 향상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백성들의 자긍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조선기독교인들에게 교회는 실질적인 생명의 공동체였다. 그로인해 일제의 탄압과 조직적인 방해 속에서도 교회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고, 민족문화 재건과 보전, 그리고 한글 교육과 한글 보급에 앞장 설 수 있었다. 탄압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농촌계몽운동과 여성운동에 헌신했다. 백만구령운동은, 숫자의 증가가 아닌 품성의 변화를 일구어내고,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양하며, 독립의 희망을 다음 세대로 대물림해주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양적 부흥이 아닌 내면의 부흥, 리더십의 부흥, 남녀평등의 부흥, 그리고 민족혼의 부흥을 이루는 씨앗이 뿌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감리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보자.

 

우리 감리교회만 보더라도 2009년 1,563,993명에서 2016년 1,397,918명으로 불과 7년 사이에 166,075명이 줄었다. 통계표의 거품을 고려하면, 현 교인 수는 이보다 훨씬 작을지도 모른다. 비단 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 교인수가 줄고 있다. 개신교 6개 교단은, 2014년 171,031명7), 2016년 한 해 동안 200,000명이 줄었다. 아래의 그림이 보다 선명하게 비관적인 흐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래 그림에서 잘 보여주는 바대로, 이대로 가면 곧 문 닫는다. 교회 문을 닫으면 목회자는 일자리를 잃고, 신학교는 효용 가치가 없다. 교단은 당연히 할 일이 없어진다. 전도는 결국 존립의 문제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청년층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학교의 학생 수가 300,000명에서 200,000명으로 줄었다는 사실이다. 고령화로 인해 교인 수의 감소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실질적인 감소를 예민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착시현상이다. 예를 들어 지난 십년 동안 장례를 한 번도 치루지 않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 노년층의 교회 출석이 꾸준하기 때문에 교회 전체의 통계표 상에는 교인이 줄어드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새교인의 유입이 멈추었고, 어린 아이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3. 백만 전도의 정당성과 방향 설정

 

교인이 없으면 교회도, 신학교도, 교단도 존재할 수 없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학교가 없어지고,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예전에는 교회 다니지 않는 부모들도 아이들이 교회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현실은 다르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직분자들 마저 자신의 아이들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사교육에 목숨을 거는 세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가장 앞선 문화를 알려주는 곳, 바른 것을 가르치는 곳, 사람을 바로 세우는 곳이라는 근본 인식이 흔들리고 있다. 낡은 것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고 버둥되는 곳으로 청년들에게 비춰진다.

교인들 사이의 분쟁과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치열한 투쟁, 그리고 목회자의 자질 저하로 인한 존경심의 상실 등이 교회 학교를 꼭 보내야 하는 마음을 앗아가고 있다. 교회가 자체 성장을 위해 헌금을 강요하고, 모아진 헌금을 교회 건물 건축을 위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 역시도 교회의 가르침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같은 반감은 사회 풍조와 더불어 젊은 층들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예수를 믿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가르침은 이제 식상한 공식이 되었고, 증명 불가한 광고거리 정도로 치부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직분자들 역시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이 엷어지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야 할 만한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윤리적 결단을 이끌어주고, 대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가르침이 절박하다. 원조 요한 웨슬리의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소위 말하는 감리교회의 3대 DNA의 회복이 절실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통적으로 해오던 개인전도나 가가호호 전도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복음은 전해 받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전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많은 영적 도전과 감화를 준다.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과 교제 없이 살아가고 있고 그들에게 무관심하고 있는지 전도해 보면 스스로 알게 된다. 일주일 내내 단 한 번도 믿지 않는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고 보낸다. 한 마디로 남에게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이런 유형의 사람”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저항과 벽이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사실 노방전도가 목청을 높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일이 아니라면, 전도지를 받는 이들의 저항이 그리 심한 것은 아니다. 아울러 두렵고 떨리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 두 번만 해 보면 공포심이나 수치심은 이내 사라진다.(이상 템피교회, 김찬홍목사 증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형식이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 증거는 지상명령이다. 나와 너의 구원이 직결된 문제이다. 하지 않으면 죽고, 하면 다함께 사는 일이다. 문제는 전하는 자의 말이 신빙성이 약하고, 받는 이들이 절박하지 않게 느낀다는 사실이다. 인생을 바꾸는 문제이고, 인간의 삶의 양식과 가치관이 바뀌는 문제이다. 해서 전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방식이 식상하게 느껴지고, 거부감이 커졌다. 이에 대한 보완과 보충이 필요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전도 방식을 계발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충분히 해소 해결할 수 있다면 지상명령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수행되어야 한다.

다양한 전도 방법과 형식을 계발함에 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신학적 요소가 있다. 그 뿌리는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이다. 먼저 예수님은 찾아가는 목회였다. 쉬지 않고 머물지 않고 찾아다니셨다. 필요가 있는 곳에, 누워있는 자에게, 목마른 여인에게, 성전과 회당까지 직접 찾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밤이고 낮이고 찾아오는 이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주셨다. 가슴을 열고 반기셨고, 필요를 채우시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해주시고, 다리 저는 자를 고쳐주셨다. 직접 몸을 움직여 찾아가셨고, 필요를 안고 찾아오는 이들의 심장 안에 찾아가셨다. 오늘의 목회는 큰 건물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목회를 한다. 비유를 들자면 그물을 쳐놓고 고기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에 있는 교회들이나 주변 환경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게 지은 교회들의 경우,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이들이 쉽게 찾아들어가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고 문턱이 높다.

둘째, 예수님의 목회는 다양한 배경과 특성을 지닌 제자들을 양육하여 전도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한 가지 방법만 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한 종류의 사람만 택하신 것도 아니다. 비슷한 학벌이나 경제-문화적 배경의 사람만 택하신 것도 아니었다. 다양한 지파에서 골고루 택하셨고, 다양한 직업으로부터 택하셨고, 다양한 품성의 사람을 택하셨다. 예수님 사후 제자들의 사역의 내용과 사역에 대한 보고도 다양하다. 1970년 후반 이후 한국 교회가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만 택하고, 이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누가 원조인가? 누가 원형인가? 예수님께서 그리 하셨을 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연관이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 소경이나 불구자, 소외되고 낮은 자, 그리고 소자들과 심지어 부자에게도 문을 열어 놓은 모두를 포함하는 나라였다. 이들에게 다가가기 가장 손쉬운 사람을 골고루 택하셔서, 훈련시키고, 그리고 파송하셨다.

셋째, 예수님은 당신이 사셨던 그 시대와 그들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는 생명과 평화를 전하셨다. 팍스 로마나 시절, 팔레스타인은 농민 폭동과 “잠재적 혁명”의 화약고였다. 칼이나 창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정치-군사적 힘 앞에 눌려 있었다. 무장을 부추기고, 혁명을 외친다고 평화와 생명의 희열을 이룰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정치 군사적 무력 앞에서 의연하게 사는 길을 알려주셨다. 참된 종말론적 지혜를 알려주시고, 평강을 누리며, 충만한 생명을 맛보고 사는 복음의 긹을 전하셨다. 순간적인 승리와 보복의 혁명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길을 알려주셨다. 해방의 길은 인내를 요구했고, 생명은 의연한 품위를 갖추어야 함을 알려주셨다. 하나의 길, 하나의 방법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 그 역사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알려주셨고, 그 길을 제자들을 통해 전파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모습은 요한 웨슬리를 통해, 조선감리회의 전통 속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 모습은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여성과 피지배층의 교육과 계몽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했으며, 조국의 독립과 사회 계발에 참여하게 이끌었다. 복음은 영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성 전체를 구원하는 일이다. 조선 감리회의 전통은 통전적이며 총체적인 구원 사역을 충실히 이어받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다만 1980년 이후 교회성장신학과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개인 구원에 치중하거나 개교회 건설에만 몰입하는 편파적인 모습이 엿보인다. 이제 이 방법으로는 더 이상 교회 성장을 이루기 힘들어졌다는 것과 대사회적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4. 백만 전도 운동의 실천 방안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예수의 혼을 믿는 자의 심령 속에 부어넣어야 한다. 신학의 언어를 빌리면, “성서적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 저들이 아버지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하고 간구하셨다. 아버지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요 간구일 뿐만 아니라, 약속이며 동시에 지상명령이다.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는 것은 곧 말씀을 화육시키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일이다. 이 일을 온전히 이루어내는 것이 곧 구원의 완성이다. 아버지의 성품을 우리 안에 완성해냄으로써 우리는 거룩과 자유를 얻고,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오늘날에 와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사는 것을 구원으로 오도하고, 죽음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으로 연기시켜주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으로 덧입고,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는 총체적 완성은 미루고 만다. 이 땅에서 누리는 구원의 맛이나, 완성은 멀어진다. 화육의 자리에 축복으로 대신 채우려 하였으나,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을 맛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허와 인격의 결여를 메꿀 길이 없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급한 품격과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제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그 첩경이 바로 성서적 거룩의 회복이며, 성서가 증언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 됨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거룩의 삶을 살아내며,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화육해내며 살아야 한다.

둘째, 믿지 않는 이들에게 행해오던 전통적인 방식의 개인 전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개인전도 방식이든, 축호전도이든, 노방전도 이든 방법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단지 시대상에 걸맞게 업데이트하고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다단계 판매 방식이나 마케팅 기법을 활용하여, 유사 그룹 (homogeneus group)에게 접근하여 전도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교회 내의 계층을 만들거나 서로 간의 장벽을 만들어낼 우려가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도 방식을 채택함에 있어 시대의 입맛을 무시살 수는 없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사회 풍토에서는 길거리에서 고성을 지르거나 전철 안에서 지나치게 시끄러운 소리를 지르며 일방적인 강요를 하는 것은 복음 증거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기독교 전체에 대한 반감을 낳을 수 있다. 극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대신 개개인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예민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에 다가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아픔과 복음의 승리를 담담하게 증거하고, 어렵고 힘든 난관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된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해 본 사람은 그 맛을 알고, 그 감동을 몸에 익히게 된다. 한 번 열매를 얻고, 한 번 그 감격에 취한 사람은 그 다음을 기다리며 자신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목회자들은 모든 신자들이 이와 같은 예민함과 관심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훈련하고 참여를 독려할 필요가 있다. 백만 전도 운동은 한 명이 한 명을 전도하고, 한 속회가 한 가정을 전도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이 같은 참여와 참여를 통한 결실을 체험하면 생명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증거자 자신도 생명의 맛을 더욱 강하게 느끼며 살 수 있다. 의무나 책임으로부터가 아니라 즐김과 감격으로부터 우러난 일이 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셋째, 목회자가 비전을 나누고, 그 비전을 받아 실천하고 확장시키는 일은 결국 평신도의 몫이다. 평신도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감격과 즐김을 목회자만이 독점할 필요는 없다. 독점을 꿈꾸어도 안 된다. 마틴 루터이후 종교개혁가들의 공통된 강조점은 만인 사제설과 직업소명설이다. 내가 일하는 일터가, 내가 살아가는 가정이 바로 성전이며, 내가 하는 일이 사제의 일이라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자각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일은, 믿는 자로 부름 받은 자의 특권이며 존재 이유이다. 따라서 백만 전도 운동은 만인사제 정신을 고취시키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 실천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하고, 이것을 이웃과 친구와 더불어 나누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좋아서 나누고, 나눔을 통해 더 큰 감격에 이르게 됨을 또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순환의 반복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습관이 되고, 품격이 된다. 결국 증거와 나눔을 통해 참 그리스도의 혼과 정신을 자신의 육신 안에 완전하게 실현시키게 되는 것이다. 전도는 남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화육시키는 일이다. 기쁜 일이며 생명의 충만을 체득하는 일이다.

 

 

5. 대사회적-역사적 책임을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린다. 심지어 “기독교박멸협회”까지 생겼다. 마지막 한 명의 기독교인이 사라질 때까지 활동하겠다고 한다. 오늘의 기독교는 친미, 보수 꼴통으로 오해받고 있다. 한때 시대에 앞선, 문화 엘리트이며,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광복 이후, 친일파가 아닌 이들로서, 유일한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은 기독교인들뿐이었다. 북한에는 천도교 계통의 조직이 있었지만 공산당 진주 이후 탄압을 받고 급속하게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남하한 기독교들은 군대와 학교로 몰려가서 훈련받고 그 영향력을 키워갔다. 결국 군부 엘리트와 학자 그룹 중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남한 사회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많은 과거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을 누리며, 변화에 주저했던 이들은 이제 “적폐 세력”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이와 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는 전도의 벽은 높다. 불신이 앞선다. 뒤돌아보면 교회는 조선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백범 김구, 주시경, 안창호, 유관순 등등 이름을 다 거론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 지금은 저평가 받고 있지만 이승만 역시 왕조 정치로 되돌아가지 않고 자유 민주국가와 만인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고 추진했다. 이때 기독교인들은, 특히 감리교인들은 새 정부 수립의 핵심 지도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WCC 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도시산업선교나 민주화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지금까지 행해온 사회적 역할이나 책임을 살필 때, 오늘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현실의 문제에 대해 성실하게 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 전도와 마찬가지로 감리회의 전통이나 자기 정체성과 이어지는 대사회적 책무이여 시대적 대답이다. 줄이자면 오늘 우리 사회는 (청년) 실업, 양극화, 자살, 입시지옥, 차별과 단절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는 이에 대해 답을 주어야 한다. 한 때, 기독교 지도자들은 절망적인 조선 사회에 교육과 계몽이라는 대답을 주었다. 오늘의 대답은 무엇일까? 더 가지지 않아도, 더 많이 나누어도, 조금 더 양보해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과 그 열매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양심회복 운동과 내가 먼저 양보하는 사회 그리고 나누고 베푸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근거와 열매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실천함으로써, 그리고 더욱 탄탄하게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설득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미 몇몇 교회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조금 더 불편하고, 조금 더 느리게 살면서” “더 풍요롭게 더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 등을 돌린 민중들을 천천히 설득해 나가야 한다.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성실하게 이와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찾아내어 알리는 일 역시 대사회적 전도이다. 새로운 복음 증거의 길이다.

 

 

6. 백만 운동의 교단적 실천 방안은?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자율성과 조직력에 있어 타 교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지금까지 행해 온 공헌이나 영향력도 탁월하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성에 대한 인식이나 부처 간의 긴밀한 협력이 아쉽다. 예를 들어, 연간 계획을 세울 때, 교단 내의 공조직뿐만 아니라, 개별 사조직 또는 지방 사업과 일자가 겹치거나 참가 인원이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짧은 기간에 갑작스레 조직 시행되는 일은 겹치는 경우가 더 많다. 한정된 인원과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을 거둘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년도 계획을 한 해전에 함께 모여 일정과 내용을 조정하고, 태스크 포스를 통해 해당 프로그램을 반드시 해야 한 지에 대한 타당성 여부도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각 연회 소속 전도학교, 기도학교, 전국 조직의 남녀선교회와 속회연구원 그리고 연수원 등이 긴밀하게 협력하며, 프로그램의 중복과 간섭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장기 계획의 공동 수립이 필요하다. 현재 교단 내 다양하며 효율적인 기구와 기관들이 있다. 문제는 각 부서별로 각자가 수행해 오고 있던 일들을 해마다 반복 시행하는 성향이 짙다. 늘 하던 일이기에 올 해에도 시행하고, 주어진 예산안에서 안일하게 끝마치려는 모습이 보인다. 이를 타파해야 새로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쏠림과 중첩을 최소화하고, 단순한 반복과 고착을 막아야 한다. 예를 들어 감독회장은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본부 각부서는 해당 정책을 함께 모여 부서별 정책을 수립하고, 이때 전도학교, 기도학교, 남녀선교회, 속회연구원, 군선교회, 연수원등이 참여하여 일정 조정과 예산 분배, 그리고 참여 인원에 대한 산출이 한 해 앞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감독회장의 비전이 사업의 목표가 되고, 각 부서의 정책이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제시되어야 하고, 그리고 각 학교와 남녀 선교회, 해당 기관은 실천부서로의 자기 역할과 기능을 다하면 될 것이다.

기존 기관과 부서를 활성화하고 상호 협력을 강화시키는 것과 아울러 새로운 사업과 내용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문제를 기존의 조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새로운 조직이나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중에 하나가 개척학교와 재개척학교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려고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 아무런 사전준비없이 교회를 시작한다. 현재의 신학교는 이론 중심으로 교육하고 있으며, 목회 실천에 대해서는 인턴 십을 통해서나, 현재 다니는 교회에서 배울 것을 요구한다. 졸업생들은 자신이 교회를 세우면 당연히 사람들이 모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세를 얻어 교회를 시작하여도 개회 예배가 끝나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어두운 세월을 몇 년을 보내야 한다.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찾아가는지 전혀 배운바가 없다. 몇 년의 세월을 보낸 후 자립하는 교회가 가끔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미자립 상태로 남아있다. 농촌의 경우는 이농현상으로 인해 그 정도가 심하다. 교회 문을 연 상태로 교인은 모이지 않고, 경제적인 자립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인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점차로 힘이 빠지고 의욕을 잃고 만다는 사실이다. 때로 가정불화로 이어지기도 하고, 자녀의 교육 문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한 교단적 처방 가운데 하나는 개척학교 운영하는 일이다. 이 학교를 통해 철저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아울러 5년, 10년 미자립으로 남아있는 교회들은 새로운 사역의 방법을 알려주고, 본인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목회를 다시 한 번 선택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7. 집중과 선택: 개척 및 재개척 학교

 

교단 차원에서 2018년도 통합 사업계획 수립과 아울러 강조되어야 할 내용은, 새로운 프로그램의 도입과 법제화이다. 기존 조직이 행하기 힘든 일이며, 새로운 조직과 법제화가 요구된다. 향후 6개월 동안 사전 점검과 모델 시행을 통해 과감하게 시행해야할 중점 사업 가운데 하나는, 개척학교와 재개척학교이다.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면, 최소 한 두 가지 사업을 중점적으로 택하여 백만전도 운동의 핵심 사업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감리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기 집중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백만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이라고 사료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상술해보자.

 

  1) 문제 제기

 

2016년말 통계표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 전체감리교회 수는 6,657 구역이며, 목회자 수는 9,993 (1.5명 : 1교회)이며, 잉여 예비목회자는 2,000여명에 이른다. 소위 무임목사들이다. 매해 200여 명이 배출되며, 전체 졸업생 대비 20% (5:1)8) 에 이른다. 미자립교회에 지원하는 교단 전체의 후원금을 산정하면 그 액수는 상상 이상이다. 전체 감리교회 6,657교회 중에서 약 50-60%가 미자립교회로 분류된다. 아래 도표 (2015년 기준)는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연회

1원이상~

3,500만원미만

3,500만원이상~

7,000만원미만

7,000만원이상

총합계

 서울

147(37%)

54(14%)

194(49%)

395

 서울남

186(46%)

72(18%)

147(36%)

405

 중부

483(45%)

190(18%)

397(37%)

1,070

 경기

394(50%)

149(19%)

245(31%)

788

 중앙

249(45%)

140(25%)

170(30%)

559

 동부

276(42%)

149(22%)

239(36%)

664

 충북

223(55%)

67(17%)

115(28%)

405

 남부

318(54%)

112(19%)

154(26%)

584

 충청

232(36%)

169(26%)

242(38%)

643

 삼남

212(54%)

81(20%)

103(26%)

396

 호남선교

158(59%)

47(18%)

61(23%)

266

총합계

2,878(47%)

1,230(20%)

2,067(33%)

6,175

 

위의 도표에서 맨 왼편의 교회들을 “미자립교회”, 그 다음 가운데 있는 교회를 “비전교회”, 오른 쪽 부분을 “자립교회”, “중형교회” 그리고 “대형교회”로 세분할 수 있다. 이 분류는 어디까지 재정을 중심으로 편의상 나눈 잠정적인 구별이다. 문제는 년 예산 30,000,000 만원 미만의 미자립형 교회가 감리교회 전체의 47%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외부의 보조 없이는 월세나 운영비 지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생활비나 사례비 지급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생활에 허덕이며 목회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개척 후 2-3년 정도된 교회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소망을 잃지 않는다. 설립 후 10년 이상된 교회의 경우 이미 자립 의지를 상실한 경우가 많다. 은퇴 시까지 외부 도움에 의존해야 하고, 감리사 피택이 가능한 정회원 가운데에도 미자립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경우 외부 도움을 공개적으로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미자립교회를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현상유지를 시키는 방법이 하나라면, 이들로 하여금 비전교회 또는 자립교회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도 가능하다.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살려서 특화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기존의 개체교회 형태의 목회 형식을 과감히 벗어나서 다음 장에서 소개할 다양한 형태의 목회를 교육받고, 스스로 가장 적합한 유형을 택하여 새로운 목회를 시도해보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현재의 감리교의 교리 장정은 개체 교회나 교단이 인준한 기관목회만 “목회”라고 인정해주고 있다. 진급이나 감리사선출, 기타 은급 지급 등에 있어, 장정이 정하지 않은 형태의 목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개체교회 목회에서는 낮은 효율과 기능이 떨어지는 목사들이 다른 유형의 목회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개체 교회 목회에서 어려움을 겪던 목회자들이 선교사로 나가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을 종종 발견하기도 한다. 개체교회를 운영하고 설교와 심방을 하는 기존목회에서는 취약하지만, 남을 돕거난 사회봉사, 취약층 도움을 주는 데에는 뜨거운 가슴과 부지런한 발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을 “동일한 목회의 다양한 유형”으로 인정하여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다면 이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라는 목회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목회유형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방위적 변화와 제도적 개혁은 교단의 총의를 모아 “사즉생, 생즉사의 결단”이 있어야만 가능할지 모른다. 단지 현상유지를 택한다면, 앞으로 십년이 가고 이십년이 흘러도 미자립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하지 않는다. 말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공론으로 이미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얼마의 지원을 어디로부터 받는 지에 대해서는 지방별로 보다 정확한 통계표 정리와 더불어 보강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개별 교회가 어디로부터 얼마의 지원을 받는지에 대해서 데이터베이스에 정리하여, 투명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 자원의 쏠림과 편중을 막고, 공정한 분배와 효율적 지원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후원을 단순 계량작업으로 환산해보자. 전체 교회 가운데 미자립이 47% 이고, 30,000,000원에서 70,000,000만원 사이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20%의 교회들 가운데 적지 않은 교회들이 외부 지원을 받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체 감리교회의 50% 정도가 월 평균 100만원에서 150만원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가정해보자. 월 100만원의 지원을 받는 경우, 308,750,000원이며, 150만원의 경우, 463,125,000에 이른다. 무려 월 40억 원에 [30억 원에서 46억 원 사이] 이르는 자원이 “미자립 상태”를 “현상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고 있다. 일 년 예산으로 환산하면 무려 400억 원의 현금이 현상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마치 새는 상수도관을 통해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수도관을 교체하지 않은 채 수돗물을 계속 공급하면, 누수는 늘어나고 공급 비용은 꾸준히 증가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부분적이나마 지속적인 교체 작업이 필요하다. 다양한 목회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누수비용을 줄이고, 이 비용을 새로운 교회 개척 또는 캠퍼스 선교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한 마디로, 자원의 재분배와 용도변경이 필요하다. 자원 자금을 교회 재생 또는 재개척 프로그램에 투자한다면, 5년, 10년 안에 미자립 교회 수를 줄여가고, 비전교회로 발돋움하고, 마침내 자립하는 교회,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중대형교회로, 선교하는 교회로 변모시켜나갈 수 있다. 동시에, 선교지형의 변화로 미자립교회를 더 이상 만들지 않는 교단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것은 감리교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현 상황은 큰 교회를 성공한 교회, 그리고 그 교회의 담임자를 성공한 목회자 또는 능력 있는 목회자라고 통칭한다. 미자립교회 또는 영세교회는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이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미자립교회가 “양식, 목표, 운영 방법” 등을 대형교회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단지 규모만 영세한 교회,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 인적 자원이 모자라는 교회로 보일 뿐이다. 당연히 경쟁력이 없다. 규모는 작지만 자기만의 특성을 지니고 강점을 최대한 발휘하는 행복한 목회를 통해 얼마든지 교인들을 섬기고, 사회적인 공헌을 다할 수 있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것이 2917-18년 백만전도 운동이 선택 집중하여, 지원하고자 하는 주 타켓이다.

 

   2) 문제의 원인 분석

 

현재 신학교는, 준비되지 않은 목회자를 양산하고, 한 가지 신학과 한 가지 목회 패턴으로 훈련시켜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영적 준비가 결여된 채 졸업하고, 사회로 내던져진다. 기도, 성경해석, 설교 강해 준비 능력이 미비한 채 졸업한다. 경쟁력이 없다. 이들에게 주입된 신학 역시, “성공신학/ 번영신학” 모델이 주를 이룬다. 목회 방법론 역시 자신이 출석하는 담임목사의 패턴을 그대로 흡수 모방할 따름이다. 전혀 새로운 것이 안 보이고, 자신 만의 독창적인 강점이 없다. 사실, 번영신학, 교회성장신학이 통하고, 그 신학으로 성공을 이룬 교회는 전체의 10% 미만이다. 나머지 교회들은 실패한(?) 교회들이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신학적 틀과 특성화된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색다른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당신의 사역을 위임하셨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저마다 독특한 특성의 목회나 선교를 강화시키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성서적, 신학적 근거가 필요가 있다. 자신의 특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목회가 성공한 목회라는 것을 수용하고 실천해 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개척에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개척에 임하는 목회자, 또는 전도사들이 경제적, 신앙적 후원 네트워크을 갖추지 못한 채 개척에 임한다는 사실이다. 개척 당시, 일정기간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후원자도 없고, 함께 짐을 나누는 개척 멤버도 없이 시작한다. 많은 경우, 안수받기 위해, 전도사 혼자 또는 사모와 더불어 임대 건물에서 개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복음 증거가 목표가 아니라 안수받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문을 열어 놓고, 노방전도를 통해, 불러들이는 목회를 한다. 기도 응답 외에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개척 멤버도 없고, 일정 기간 후원해줄 교회나 인적 관계도 약하다. 신학대학원 시절부터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역 분야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며, 목회를 익히고, 인간관계를 발전시켜 후원 구조를 만들어 가는 사전 준비가 거의 없다. 인턴 생활을 통해 비전을 구체화하고, 함께 참여할 영적 동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개척교회를 시작한다. 근자에는 자신의 페이스 북이나 SNS를 통해 비전을 나누고 사역 동지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래 준비한 만큼 오래 버틸 수 있다. 이점에 대한 교육도 없고 준비도 없다. 결과는 당연히 미자립교회로 남게 되고, 3년을 채우고 나면 부목사 자리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더 이상 빈자리가 없다.

교회를 개척하는 전도사들이나 초임 목회자들이, 배우지도,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디가야 배우는 지도 모르고, 사실 배울 기회도 거의 없다. 주변의 선배, 동료 목회자와 설교 공동 작업, 목회 노하우 습득을 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에 인색하다. 그러한 기회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있는 것조차 모른다. 코칭을 받거나 정기적 상담을 받거나 성경공부 모임이나 기도회 등에 참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위로받거나 격려 받는 일없이 고작해야 동기들끼리 이따금 만나며 외롭게 버틴다. 이런 상황에서는 관계 장애가 일어나기도 한다. 소위 목회가 잘 안 되는 경우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리고, 남들 앞에서 나타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렵고 힘든 환경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환난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해석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통해 인내를 심어주시고, 인품을 다듬어 주신다. 주님의 품성으로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화육한 인격으로 변화된다. 이 과정이 먼저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 때로 힘겹게 만들고 외롭게 내버려두시기도 한다. 이런 연단의 과정에 대한 분별과 수용, 그리고 신학적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성장신학의 프레임에 갇혀서 스스로를 옥죄이고 있는 목회자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성장신학의 눈으로 보면 교인이 모이지 않으면 무능력하고 실패한 목회자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다. 교회학교나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교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상업주의 논리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직 설교도 미숙하고, 모든 면에 서툴다. 하지만 목회 초년병들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열정과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다.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이다. 목회는 적어도 이십년 이상 한 자리에서 버티어내어야 자리 잡을 수 있다. 인내도 목회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품격이다. 인내로 견딜 수 있도록 용기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이 고난의 기간, 실패처럼 보이는 기간이, 목회자 “자신에게 목회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무르익게 만드는 실천과 신학 무장이필요하다. 부단히 배우고, 연단해야 한다. 이 훈련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미 견디어 낸 선배들이 이 경험적 진리를 나누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개척하는 목회자들과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내적 감정 관리와 관계 조절 능력이 저하되어 심리적 불안정 상태에 놓일 수 있다. 때로 분노 장애와 좌절감, 자기 비하로 인해 시달릴 수도 있다. 교인들에게로 자유롭게 털어놓거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배우자나 가족에게 분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드러나지 않지만 목회자의 가정 폭력도 적지 않다. 심리조절 실패는 인터넷 중독이나 도박, 기타 중독으로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이때, 동료 또는 선배들과 나눔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거나 정기 모임을 통해 자신을 털어놓는 교제가 필요하다. 웨슬리가 말한 밴드처럼, 영적 순례의 동반자를 찾아가서 교인들에게 받은 상처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내면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있는 그대로 긍정 받는 그룹이 필요하다. 적어도 목회자 자신은 행복감을 누리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말씀 전하고 예배와 기도를 인도하는 목회 기능이나 방법론만 익히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목회 초년병들은, 교인들에게 “잘해주고 돌보아주는 것”을 목회로 혼돈하고 있다. 아무리 잘 해주어도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자녀교육을 위해, 친구와의 교제를 위해 교회를 떠난다. 한 두 가정을 위해 일 년 이상 온갖 일을 돌보아주었는데 어느 날 떠나간다면 목사는 상실감에 시달리고 탈진할 수도 있다. 이 상실과 탈진이 누적된다면 목회자에게는 치명적이다. 사실 목회는 돌봄과 나눔이라는 측면 외에도, 가르치고 선포하는 기능도 있다. 가르침의 “디다케”는 기준이 있어야 하며, 기준 [norm] 은 막대기 또는 회초리라는 뜻도 있다. 당당해야, 또 사랑해야 그의 심령을 때려서 가르칠 수 있다. 바른 것을 가르치며 굽히지 않고, 교회를 떠나겠다고 위협해도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이제 겨우 교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떠날 때, 목회자는 상처를 받는다. 현실 목회에서는 떠남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돌봄과 위로가 목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가 먼저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제도적으로는 떠나보내고, 몇 명 안되는 교인을 돌보더라도 굶지 않을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1990년까지 미연합감리교회의 경우 최저생계비를 교단이 보장해주었다.

개척교회에 임하는 전도사들이나, 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이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개척한 교회들 가운데, 짧은 기간 내에 성장하거나 자립을 이루지 못한 교회들은 대체로 유행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 이들은 복음의 불변성과 복음을 담는 그릇의 가변성을 혼동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배운 구태의연한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남들이 좋다고 하면 자신에게 적합한지 확인하지 않은 채 모방하고, 실패를 반복하다가 좌절하고 만다. 무기력해진다. 나에게 알맞은 목회 스타일,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허락하신 목회의 유형과 강점이 무엇인지 빨리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올 인해야 한다.

시대는 변하고, 교인들은 너무 바쁘다. 주일에도 일해야 한다. 청년들을 특히 그렇다. 퇴근 시간이 저녁 10시인 경우도 많다. 잠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예배를 위해 주일 11시 예배를 지키기 쉽지 않다. 많은 대형교회에서는 이미 3부 4부 예배를 드리면 11시 예배를 벗어났다. 오후 5시 예배, 토요일 예배, 심지어 주중의 예배도 드린다. 그런데 전세를 얻어 예배를 드리는 개척교회는 오히려 주일 11시에 붙들려 있다. 회중의 최대공약수를 택해 유연하게 정하고, 숫자가 늘어나면 천천히 주일 예배를 정착시켜나가도 늦지 않다. 가장 역동적이고 유연해야 할 개척교회가 가장 전통에 얽매여있다. 그러면서 자립을 원하고 성장을 꿈꾼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지 않고는 제대로 익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에 낯설은 새내기 목회자들이 방주교회 모델에 매달리고 있다. 찾아가는 목회를 하지 않는다. 그물을 쳐놓고 물고기가 잡히기만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고기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개울에서 고기 잡을 때와 바다에서 잡을 때는 사용하는 그물과 낚시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찾아가셨다. 바울도 개울로 찾아가고, 일터로 찾아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물을 쳐놓고 기다리는 목회, 건물을 지어놓고 “구원의 방주”라고 여긴다. 신학적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물고기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들의 필요에 맞추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의무가 있다. 복음의 혼을 회복하는 일이며, 예수님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소명의식의 끊임없는 재확인과 격려 그룹의 확보가 절대적이다. 미연합감리교회에 속한 한인교회를 전수 조사했을 때, 20년 이상 한 자리에서 고생하며 버틴 교회들이 성장하며, 목회자가 마음껏 목회 비전을 실천할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과 연단 이후에 안정된 목회에 이를 수 있다. 그 사이에 목회자 스스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인간으로 성숙해 간다. 이렇게 되어야 교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목회는 하루아침에 열매를 얻을 수 없다. 자신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일 년에 몇 차례 스스로를 돌아보며 소명의식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왜 목회를 하는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 자신이 먼저 만족하고 있는지? 힘든 부분이 무엇인지? 정기 검진이 필요하다. 목회자 스스로 늘 새롭게 재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늘 가까이 찾아뵐 수 있는 멘토를 찾고, 성심으로 섬기며, 적절한 코치를 받아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자기 자신을 위한 목회가 먼저이다.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가치관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교회 성장이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성숙과 자족이 먼저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개척학교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목회자의 덕목이다. 결국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목회이다. 일체 자족을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며, 빈에 처해서도 부에 처해서도 일체 자족함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한다면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줄 때도 기쁠 수 있다면 좋은 목회이다. 자신에게, 자기 가정에게, 친구들에게 참된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교인들을 참 믿음의 형제자매로 변화시키고, 영적 동지로, 선교의 동역자로 확대시켜나가야 한다. 건강한 목회의 기반은 바로 행복한 자아이다. 웨슬리는 이것을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성화되는 것이라 했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목회이며, 목회자가 누리는 특권이며 보상이다.

 

   3) 재 개척 학교 (Re-Church Planting Training School)의 설립과 운용

 

백만전도운동을 통해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다. 이미 뛰어난 기존 조직과 이들의 헌신이 있다. 조화와 일사불란한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백만전도운동은 2017-2018년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해로서, 특정 사업에 올 인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투자하고, 투자한 만큼의 가시적 열매를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선택과 집중을 통한 중장기 투자가 요구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개척학교와 개척학교이다. 먼저 재개척학교의 시행에 관한 간략한 아이디어를 기술해보기로 한다.

 

1. 연수원 내에 재 개척 프로그램을 분기별로 상시 운영한다.

2. 강사는 가능한한 대형교회 목회자는 배제한다.

3. 쓰라린 개척교회의 도전 및 재도전을 통해 자립하게 된 목회자의 강의를 우선한다.

: 커리큘럼 준비를 위한 태스크 포스에서 검증한다.

4. 교육, 상담전문가를 통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동기를 부여한다.

5. 목회신학 재교육과 성경공부, 기도회인도의 기본기 훈련을 강화한다.

6. 최소 12가지의 다양한 목회유형을 직접 탐방하고, 인턴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7. 교수 공동회의에서 가장 적합한 2-3 유형의 목회를 추천하고 스스로 택하게 한다.

8. 코칭 교회와 연결시켜주고 일정 기간 지원하도록 유도한다.

9. 수시로 목회 현장을 방문, 객관적이고 공정한 현장 평가 후 지속적 지원을 결정한다.

 

    4) 후속조치와 법제 정비 

1. 가정교회 or 속회 모임 형 교회를 인준해 준다.

- 기존의 상가 건물이나 임대 건물이 아닌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이때, 베이스캠프가 되는 가정교회 외에 2-3 곳을 주중 또는, 주일 오후에 드린다. 예배의 형식과 내용은 가능하면 수평식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목회자는 돌봄, 상담, 말씀 연구 등의 특정 사역에 중점하며, 평신도들의 역할을 최대화한다. 당연히 “전세권 설정과 감리사 공동 계약”에 관련된 현행 장정 규정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실질로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만 확인되면, 교회로 인준해주는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

 

2. 시간제로 카페나 기타 장소를 임대하여 교회로 인준해 준다.

- 교인 중 한 사람이 카페 사업장의 주인이 되고, 공동체 전체가 다양한 형태로 그 사업의 운영을 돕는 형태를 취한다. 사업주의 경우, 경제적 자립과 일정 부분의 수익이 확보되어야 자신의 사업장을 통한 공동체 목회 사역에 참여하고, 그 이상의 헌신을 수행할 수 있다. 단기간의 희생은 요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계속 물질적 손해를 보며 카페를 무상으로 임대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교회가 주인에게 최소한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업이 종료된 시간 이후를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교회는 특정 시간대를 사서 주중, 주일, 회중의 편리한 시간에 모여 예배드리면 된다. 따라서 주일 예배를 고집할 필요는 없고, 필요시 헌금은 온 라인으로 유도한다.(최혁기목사의 경우) 기존 교회 건물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친밀한 인간 관계 중심의 사역을 행하고, 이때 상담과 나눔을 위주로 하는 사역으로 열린 목회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이 역시 현행 장정 규정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3. 온 캠퍼스 교회

- 주중에, 학생들의 형편에 가장 알맞은 시간대에 캠퍼스 안, 바깥에서 모인다. 이것을 교회로 인준해줄 수 있어야 한다. 성경공부, 교리 공부에 국한하지 않고, 음악, 그림, 웹 디자인 등을 매개로 예배나 교육, 친교가 행해질 수 있다. 이때, 각 신학대학교 안에 “캠퍼스 선교 동아리”를 만들고, 이 동아리 회원들을 인턴으로 채용하여 함께 사역할 수 있다. 한 곳에 튼튼히 자리 잡게 되면 인근 지역의 대학교, 또는 중 고등학교로 영역을 넓혀나가,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목회를 시도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신학적 개념은 소통, 관계 계발, 돌봄이다. 설교 위주의 목회로부터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내국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외국인 유학생들이 주 선교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학원선교사를 선정, 주변에 있는 베이스캠프 교회와 후원 관계를 맺어주어 선교 활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이때 수련목제도를 활용하거나 현행 장정 규정의 수정하여, 교육선교사 제도를 도입하여 적용할 수도 있다.

 

4. 지방단위 주일/어린이학교 교회학교를 하나의 개체 교회로 인준해 준다.

- 미자립 교회가 많은 지방에서, 어린이 사역자를 청빙하여 본부와 공동 후원하여, 지방 전체를 하나의 어린이학교 교회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지방과 총회가 1/2씩 사례비를 지원, 활동비는 수혜를 받는 지방의 거점 교회가 제공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다. 이때 교육선교사는 주중, 또는 주일, 지역별로 5-6개 교회를 묶어 함께 예배, 기독교교육을 한다. 방과 후 학교를 개설하여, 학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을 모아 기독교교육, 예능교육, 학습지도를 병행한다. 지방에서 아이들을 운송하는 차량을 지원해주는 것도 효과적이다. 전담하는 전도사를 주일학교 선교사로 임명하고, 지방 내 베이스캠프 교회와 후원 관계를 맺어준다. 수련목제도를 활용하거나 현행 장정 규정의 수정하여, 교육선교사 제도를 적용할 수도 있다.

 

5. 사내 예배처, 공장, 기숙사, 병원, 양로원, 기타 이주노동자 교회를 인준해주고, 이곳에 사회선교사를 파송한다. 이것은 위에서 열거한 다양한 모습의 목회 방법과 형식을 변형 확장된 모습이다. 주변에 있는 베이스캠프 교회와 연결하여, 후원 및 지속적인 관리 감독이 필수적이다. 가장 낮고 비천한 곳을 찾아가서 온 몸으로 헌신했던 일은 조선에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이 조선인의 닫힌 벽을 허무는 결정적 수단이었다. “울지마 톰스”와 같은 일화가 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더 많이 이루어지고 더 많이 소개될 필요가 있다.

 

 

7. 결어

 

과거를 돌아봄은 오늘을 보기 위해서이다. 과거는 오늘의 뿌리이고, 미래를 비쳐주는 거울이다. 왜 2017년에 백만인 전도운동을 하려고 하는가? 곱지 않은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과연 몇 년 안에 100만을 모을 수 있을까? 성령의 불이 붙고, 사람들 가슴 속에 전도의 불길이 붙었던 하디의 회심과 평양대부흥 그리고 스톡스의 100만구령사업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꿈을 21세기 냉소적이고 탈종교적 한국 사회에서 이룰 수 있을까? 답은 없다. 하지만 잠들면 죽는다. 오늘날처럼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대형교회와 미자립교회로 갈라져서, 남의 아픔에 대해 무관심하고 나 하나 살기에도 벅차게 느끼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나로 묶고 화해와 일치를 줄 수 있는 슬로건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에, 4년이나 8년 안에 백만을 더 모으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올바른 정책 수립과 수행을 통해 개개인의 삶과 가치가 풍성해지고 의미 충만해진다면? 떠나가는 젊은이들이 되돌아와서 교회의 허리를 이루고, 우리 민족을 위해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사회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면? 어린 아이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찬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다시 굳건히 설 수 있다면? 이념과 수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찬미하며, 받은 사랑을 더 낮고 비천한 자리를 찾아가 나눌 수 있다면? 상처받고 쓰러진 내 형제와 내 이웃이 넘어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의 몫을 담당하며 살아갈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면? 그 열매가 교회 안에서 풍성해지고, 한국 사회의 분열을 넘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도를 전해야야 한다! 눈앞의 열매가 있건 없건, 십 년이 걸리든, 이십 년이 걸리든 생명의 말씀을 살아내고 또 전해야 한다. 어찌 멈출 수 있나? 이 캠페인은,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시대를 향해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자의 외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운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열매는 무엇일까? 한 영혼을 진정 아끼고 돌봄으로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전하다보면, 성령께서 소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끌어 가실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청년 실업과 좌절, 그리고 자살 문제에 대해 교회가 더욱 관심을 갖게 해줄 것이다. 우리 주변에 독거노인과 왕따 당하는 이들과 불이익을 당하는 이주노동자가 의외로 많다는 것에 눈 뜰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백만전도운동은 사회적 관심의 회복이며 역사적 책임에 대한 시대적 선언이다. 둘째, 생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주어진 삶의 풍요를 즐길 수 있도록 이끌어갈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결코 돈이 전부”될 수 없다. 소위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였던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청년들은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척박한 삶과 현실 위에 생명의 방주를 세우는 반석임을 일깨워줄 수 있다.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자각하고 복음의 혼을 회복하려는 대장정이다. 셋째,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단절과 분열의 벽을 넘어서게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살리려는 구령열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이루어가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 참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본래적 연대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넷째, 실직과 경제적 위기가 가정불화와 자살의 원인이 아니라 예수가 보여주셨던 청빈의 여유와 겸비함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하늘을 품은 자는 땅에 연연하지 않는다. 땅에 살면서 하늘을 누리며, 하늘을 전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정체성이다. 해서 백만전도운동은 하나님과 하나됨을 통해 얻는 성서적 거룩을 이루는 길이다. 교회의 생존을 위해 시작하는 100만전도에의 헌신은 결국 기독교의 혼을 다시 되살려서 하늘을 품고 땅에서 겸손과 겸비로 살아가게 도와줄 것이다. 경제지상주의와 맘몬으로부터 이 사회를 해방시키고, 사랑과 평화의 불씨를 이웃에게 전하며,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일체자족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꿈꾸는 시대적 대답이다.

 

 각주 ---------------

1) 최윤식, 다가올 흉년을 대비하라, 유크 네트워크, 2015년 5월호

2) 같은 글, “그들은 여행 중에 노방에서 그러한 전도를 행할 뿐 아니라 날이 저므러서 교회가 없는 동내에 유하게 되면 종일 동안 여행하고난 피로한 몸을 가지고도 그 보행 객주 집 방에서 함께 유하는 사람들의게 밤이 늣도록 복음으로 증거하고 권면” 하였다고 한다. 이방인 선교사의 눈에는 생소한 광경이며, 경이로운 헌신이 아닐 수 없다.

3)좀 더 자세히 살피면, 1910년부터 1912년까지 교인의 숫자만 비교하면 실질적인 성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북감리교의 경우, 1905년 14,309명이었던 교인 수는 1907년 39,613명으로 급증해서, 1910년 47,181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숫자는 1911년 51,248명을 정점으로 1912년 47,367명으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1919년 35,912명으로 감소했다가 1930년이 되어서야 43,031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남감리교의 경우, 1905년 1,216명이었던 교인 수는 1907년 4,998명으로 급증해서, 1910년 9,809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숫자는 1915년 10,278명을 정점으로 1919년 9,460명으로 감소했다가 1930년 18,640명으로 증가하였다. 남감리교회 지역이 강원도 산간지역과 상대적으로 인구 밀도가 적은 지역임을 감안한다면, 개인 전도와 미션 스테이션과 교회 설립에 주력했던 남감리교회의 선교 집중적 전략과 지속적인 약진이 두드러진다.

4) 스톡스, 같은 글, 362-365쪽. 기독교조선감리회 요람, 기독교조선감리회, 1931-1932년도, 22-34쪽. 1930년 남북감리교회의 통합이 이루어졌을 때, 23개 지방의 감리사 중 22명과 2개의 만주/간도지방의 감리사 모두 한인 목회자였다. 장로교회의 경우 224개의 교회 가운데 18개의 교회에만 한국인 목사가 있었고, 57개 교회에는 협력목사가 시무했다. 159교회에는 한국인 목회자가 없다. 9/10가 선교사들의 목회적 권한 하에 있었다. 스톡스, 271쪽에서 재인용. 이에 반해, 북감리교회는 48개 교회와 구역에 한인 정회원목사(2명의 선교사는 협력목사) , 55개 구역에는 목사 대리가 있었고, 3교회만 선교사가 맡고 있었다. 11개 지방 가운데 여러 지방이 한국인 감리사의 지도하에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스톡스는 “안수 받은 선교사의 수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인 지도력을 더 화급히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고 평가한다. (같은 글, 271쪽). 하지만 이것은 선교사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고, 장로교의 경우 개체 교회 담임자를 가능한 한 조선인으로 세우지 않으려는 정책적인 결정에 기인한 것으로 비교된다. 조선인 교역자들에 대한 대학 교육을 미룬 것과 상통되는 부분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감리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학교와 출판 및 병원 사역을 담당하였고, 이 당시 한인 감리교 목회자는 정회원 156명, 전도사 22명, 협동사역자 24명에 이르렀다.

5) 같은 글, “1924년 배재학당의 입학생의 47%가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졸업반 학생의 98%가 그리스도인이었다.” 298쪽. 조선기독교대학교의 경우, 1928년 동문의 98%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298-99쪽. 이 당시 대학졸업자의 비율이 지극히 낮은 것을 감안한다면, 졸업생의 98%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였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 그 의미가 지대하다.

6) 마치 1970-80년대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고 고통을 이겨낸 헌신이 2000년 대 천주교 교세 확장의 불씨가 된 것에 비길 수 있다. 교단이나 교파의 이미지 메이킹과 브랜드 가치의 제고는 장기 선교를 위한 유효한 무형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열매를 얻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7)  구권효, [2015 결산5] 교인 17만 명 감소, 13만이 예장합동, 뉴스엔조이, 2015, 12, 31.

8) 21세기 부흥을 선도하는 보다 성숙한 감리교회, 장단기발전위원회 제안서, 기독교대한감리회 발간, 2016년, 제4분과 보고서,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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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c5117 (211.XXX.XXX.144)
2017-05-20 21:08:23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100만 이아니라 1000만도 할수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이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데..마태복음은 어떻게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
누가복음은 정확하게 가난한자에게 자기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으로 나와 있읍니다.하지만 한국 목회자들은 누가복음의 성경말씀은 언급하지 않고
마태복음만 언급하면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읍니다.그래서 한국에서 교회건물이 커지고 교회를 반대하는 사회주의 사상이 팽배해진 가운데 전도를 할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교회헌금이 많아져야 목회자의 경제적여유가 생기겠지만.. 누가복음의
12장 33절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강조 했더라면 현재의 교회의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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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XXX.XXX.239)
2017-05-19 07:24:23
요한계시록 2장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00만이 아니라 이 민족 모두에게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에는 발람을 따르는 니골라당이 있습니다.
본인들이 아닌 척하는 모습에서 발람을 너무 닮아있습니다.

더욱 더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니골라당이 아니라면
바로 교회 옆의 이웃에게 복음을 직접 전파하십시오.
누구에게 시키지 말고 본인이 직접 전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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