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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未安)
이진경  |  jinkyung.le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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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4월 08일 (토) 00:04:18 [조회수 : 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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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죄를 저지르고 그 죄가 발각되어 대중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이상하다. 잘못에 책임을 지는 일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된 모든 일을 바로잡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은 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냥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그게 어떻게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미안하다는 말만 해도 그렇다. 미안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끝내는 말이 아니라 이제부터 대가를 치르겠다는 시작의 말이어야 한다. 이제 내가 나의 죄를 깨달았으니 이제부터 어떤 식으로든 보상과 배상의 절차를 밟겠다는 다짐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고 사용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 이제 됐지?”라는 태도로 미안하다는 말을 남발한다. 심지어는 "미안하다고 했잖아!"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는 궤변과 함께. 그런 사과는 상처 받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는커녕 더 큰 분노와 절망을 일으킬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제대로 된 사과나 사죄를 보기 힘든 세상이다.

미안이라는 말은 뜻밖에도 한자어다. 未安. 풀어보자면 미안이란 편안하지 않다는 뜻이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나는 편안하지 않다는 고백, 내가 상처를 입힌 당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는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고백이 바로 미안하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안하다는 말은 책임과 마음을 덜어버리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마음의 불편함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결심하는 말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있고 상대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 신애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서 겨우 겨우 신앙의 힘으로 지옥 같은 삶을 빠져나온 신애는 용서를 주러 간 자리에서 다시 지옥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그 살인범이 자기 역시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평온한 얼굴로 신애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바닥없이 무너진다. 만일 그 살인범이 결코 편안하지 않은 태도로 신애를 향해 눈도 들지 못한 채 차마 용서조차 구하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더라면 필경 둘 다 구원을 얻었으리라.

우리에게는 좀 더 진실한 미안함이 필요하다. 미안을 말하면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편안하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미안은 편안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편안하지 않기 위하여 하는 말이다. 이것은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을 향해 미안한 마음을 지니는 것, 즉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결코 신 앞에서 죄에 관하여 마음을 덜고자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끔찍함을 처절히 깨닫고 결코 편안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편안함은 내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든 신이든 그 편안함의 선사는 철저하게 상대가 결정하는 일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내가 강제할 수 있거나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철저하게 상대에게 달린 일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그렇게 깊고 힘겨운 말인 것이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눅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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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 (175.223.30.218)
2017-04-08 07:15:03
잊어버린 은사.!!!

완벽하지 못함에 빚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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