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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끌림에 대하여
정재헌  |  yesupeo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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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년 03월 30일 (목) 00:38:54
최종편집 : 2017년 03월 30일 (목) 00:52:54 [조회수 : 7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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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pixabay

아우님,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 그녀를 보는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변덕스럽지요. 특히 기독교적 인간이해의 기초인 우리네 타락한 본성을 떠올릴 때 ‘운명과 같은’ 사랑이란 실상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 증폭된 나의 내밀한 욕망의 포장일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자기의 낭만적 감성을 보호하고 또 충족시키려는 이들은 ‘느낌’ 또는 ‘우연’ 또는 ‘신기함’ 또는 ‘이상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묘한 기분을 느끼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해버립니다.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신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우상적 해석입니다. 입술은 떨며 ‘믿음의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하나 실상 욕심의 불길이 눈에서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환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말입니다. 여자는 소설적, 드라마적 환상을 가진 듯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어느새 자기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의 세계 안에서 남자 배우와 함께 낭만을 즐깁니다. 이런 성향은 남자와 교제할 때에 그이가 자기를 그렇게 대우해줄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남자친구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남자친구가 나에게 관심해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결국 그런 여인에게 연인이란, ‘나와 그이’가 아니라 ‘나와 그이가 좋아해주는 나’ - 즉, ‘그녀만 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함정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여인은 아예 ‘나’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자기희생의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러한 여인은 또한 남성에게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남자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환상의 환각제를 맞는다기보다는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여자는 ‘스토리’가 있고 남자는 ‘외모’가 있다고 할까요? 이걸로만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좀 더 의미중심적이라 해야 할는지? 그런데 남성이 끌림을 받는 ‘외모’라는 것은 ‘접근의 재촉’ 정도라서, 일단 외모에 반하여 접근한 뒤 사귐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외면보다는 더욱 내면에 의해 느끼는 매력으로 이동하게 되니, 남성이 외모의 노예가 결코 아님은 남성들의 경험이 명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 모두가 가진 환상이란, 얻을 수 없는 비현실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다시 비현실의 세계로 도피하는 사이비 세계입니다.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가 아무리 겉으로 무엇을 가진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공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혼자가 결혼이라는 환상을 가지면 결혼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줄, 거의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비현실적 기대요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미혼자가 독신으로 지내면서 완벽한(혹은 자기의 욕망을 그대로 채워주는) 애인과 사귀는 기대를 품는 것도 환상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란, 그런 애인이란, 그런 커플이란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고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해왔는지 이제 알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무 강한 끌림’이란, 혹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바 없지 않군요. 내 안에 주님이든지 아니면 사명이든지 분명히 채워져 있다면 내 존재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갈 정도로 끌려가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추구하는 이들마다 냉혈한 연애를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결혼에 있어서도 주님으로 먼저 내 마음이 충분히 차 있지 않으면 마음에 허함이 있게 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거짓된 환상으로 도피할 수 있는 소지가 인간에게 있음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곁에 있으면 거부할 수 없이 마음이 가는 대상과 반드시 교제를 추구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존재를 일생에 만나본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겠지요. 그만큼 이를 소중히 여기며 조심히 아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저절로’ 소중하게 느껴지는 사람만 소중하게 여김은 불신자라도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나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마치 ‘내가 끌리는 그녀’에게처럼 대해주고자 노력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온 우주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축복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강한 끌림’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당기는 힘이 어마어마한 활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그 활시위는 해방을 몹시 갈망하고 있습니다. 팽팽히 긴장된 시위를 놓는 순간, 그때까지 참아왔던 장력은 엄청난 세기로 허리를 폅니다. 남녀의 마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삶의 장치들이나 명분들로 서로를 제어하고 구속하여도, 서로 간에 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면 어떤 계기가 주어질 때 강력한 자기력에 의해 둘은 한 곳으로 붙게 됩니다. 자석을 보아도 이를 능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활시위가 풀어지는 것은 많은 말이 아니어도 충분한 일입니다. 평소 압축되어 있던 그 힘은 속마음이 드러나는 ‘찰나의 산들바람’ 정도 세기로도 충분히 활을 튕기게 할 것입니다. 그 활이 오래 묵혀 있었을수록, 활대는 휘어지거나 부러지기는커녕 더 큰 한 맺힘으로 그 활을 저 광대한 창공의 머리끝까지로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끌림을 마구 억누르면 그것도 부자연스러워 오히려 마그마가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더 큰 위험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닌가 합니다. 환상은 버리되, 대신 끌림에 있어서는 자기와 상대에 대한 책임감을 보이는 것이 성숙함 아닐까 합니다. 물론 끌린다고 다 결혼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대해 생각이 더 생기면 다시 쓰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주님의 평강만 빕니다.

 

 

 

“정재헌 저, <30대가 30대에게 쓰는 편지 : 사랑과 결혼편>(주의 것,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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