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달, 그리고 친구

서편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에 보름달이(?)이 걸려있다.

샛노란 모습이 애처럽게 아름답다. 십자에 못박혀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이다.

책상 위에 걸려있는  벽시계 초침바늘이 새벽 다섯시를 막 지나가고 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순간에 머문다.

“겨울여자를 무척 좋아한다.” 는 한 시인의 싯귀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오랜 지인인 그 시인에게 여짓껏 나는 그 비밀을 꼬치꼬치 캐물은 적이 없다.

사랑에는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없다는 사랑의 신비를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릇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는 첫인상의 신화를

어떠한 이성적 논리나  철학적 학설보다 더 신뢰한다.

또, ‘신화는 사실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 는 한 사상가의 가정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사랑은 첫인상이 99%를 좌우한다.

사랑에 대한 너절한 이유와 설명들은 교활한 인간들의 머리가 만들어낸

허구이고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옛 시인 예이츠가 읊었던가?

“사랑은 눈으로 들고 술은 입으로 든다” 고……

친구!  그 단어만 들어도 아직 나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육체는 비록 늙었어도 가슴만은 청춘인 셈이다.  그런 나를 두고

케롤이 가끔은  ‘철부지’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그렇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하소연하곤 한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바라다 보며 심장이 고동치는 것이

나의 잘못인가?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의 실수인가? ”

그렇다고 여자들의 본성인 질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방금 사랑한다는 고백을 해놓고 뒤돌아서면 그 사랑의 언약이

질투와 미움으로 돌변하는 것이 여자들이다. 여자는 역시 여자다.

나는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살아가는

데카르트 학파 철학자가 아니다.

나에게 삶은  목적없는 소요( 逍遙)이고, 재미있는 한 놀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 대해서도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는 의리파가 아니고,

 “평생 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갖은 사람이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하며

죽을 때까지 참친구를 찾아 헤매이는 톨스토이 같은 순정파도 아니다.

나에게  친구는

내곁에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들은 누군가를 만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앙콩달콩 살다가  사라질 것이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러나,  친구는 기적이다.

그 수많은 인연들 중에서 벗거벗고 찾아오는 친구를 만나다는 것은.

“힘들고 고달프면 아무때나 날 찾아와 잠시 쉬었다 가게.

내가 포근하게 안아줄께…” 하고 나즈막히 속삭이는 그런 알몸의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나는 벌거벗은 겨울나무들을 사랑한다.

여자도 벗거벗은 겨울여자들은 사랑한다.

그리고 친구도 벌거벗은 겨울친구들을 좋아한다.

나는 진화를 멈춘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의 후예다.

02/11/2017  메모

버지니아 숲속에서

해암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