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네. 외로운 이 밤 하염없이 눈이 내리네. 꿈이었던가. 그 날 그 언약 다정한 말씀 꿈이었던가....“

굳이 유행가 한 구절 읊지 않아도 충분히 눈이 내린다. 다분히 외롭다. 눈 내린 대지 위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외로움이 결국 쓸쓸함이 된다. 서해안의 눈과 바람, 오롯이 만끽하는 은혜로운(?) 날씨다. 허우적대는 눈발과 함께 나의 서툰 안면도살이가 이렇게 시작되는 모양새다.

그래서였을까. 하나님께서 4시도 못되어 눈을 뜨게 하신 뜻이. 꽁꽁 언 대지 위로 하얗게 덮인 눈, 넉가래를 집어 들고 눈을 치운다. 두껍게 쌓인 눈이 그리 쉽게 넉가래를 피해갈 승산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눈을 치워야 기도하러 오는 성도들이 좀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빗발치는 눈보라에 몸을 맡긴 채 넉가래질을 열심히 한다.

꽤 경사 진 고개를 올라야 들어설 수 있는 교회당, 언덕 위에 하얀 집이 우리 교회다. 이런 교회의 목사이고 보면 눈 쓸기 아니 눈 치우기는 이제 전문가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경사면을 내리 달아 큰길까지 가니 저만치 새벽기도에 나선 성도들이 먼발치로 보인다.

부임하기 전 전임자에게 눈이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문제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눈 치우기 명인이 되어야 하는 나의 운명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그 순간 내게 눈은 그저 노역을 요구하는 그 무엇이었다.

눈이 어떤 이에게는 낭만이다. 그저 외롭게 연인을 기다리는 무드어린 환경일 뿐이다. 허나 어떤 이에게는 노역을 요하는 고된 일이거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치명적인 절망일 수 있다. 어느 해 폭설로 모두를 잃은 성도를 그저 바라만 봤던 때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불같이 뜨거운 모래 바람에 아무리 걸어도 끝이 안 보였다. 둘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무 그늘 하나 없었다. 길가의 무덤을 가리키며 아들이 절망 섞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인 것 같아요. 더 걸을 필요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편하게 죽는 게 낫겠어요. 저것 봐요. 지쳐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잖아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좀 더 가면 마을이 나타날 거야.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있고. 무덤은 이 근처에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란다."

아버지의 말대로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을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무덤이 절망인 아들, 무덤이 희망인 아버지, 둘은 같은 걸 다르게 봤다. 사람들은 같은 눈을 보고 다르게 생각한다. 난 내게 깜짝 놀랐다. 적어도 무드어린 눈은 아니어도 끔찍한 노역의 대상이어선 안 되지 않을까.

신앙인은 사물을 다르게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난 내린 눈이 노역의 대상이 아니라 사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누군가의 길을 쓸어 기도의 불길을 지핀다면 사명 아닌가. 다르게 생각하니 행복하다. 이제 눈이 내리면 사명감 충만하자 다짐한다.

▲ 김학현 목사(정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