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이라면 아마도 <눈먼 자들의 도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신호대기 중이던 한 운전자의 갑작스런 실명과 함께 시작된다. 이 실명이 괴기스럽고 충격적인 것은 바로 이 실명의 특이한 증상과 이 실명의 전염성에 있다. 이 실명은 암흑 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실명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모든 것이 하얀 색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는 실명이다. 그리하여 이야기 속에서 이 증상은 백색실명이라고 불린다. 이 실명은 빠르게 전염된다. 실명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먼저 실명한 무리들을 수용소에 감금시켜 놓은 정부의 발 빠른 조치도 무색하게 실명의 전염은 순식간에 전 도시를 엄습한다.

사라마구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하여 세상의 지독한 불의와 비극과 모순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은유의 시작은 아마도 이 실명의 증상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실명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빛으로 인해 온통 하얀 세상이 되어버려 볼 수 없는 실명. 따라서 이 경우라면 실명(失明)이라는 단어 역시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이것은 빛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과도한 빛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멂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과잉으로 주위를 볼 수 없는 인간, 심지어 제 자신의 더러움마저도 볼 수 없게 된 인간의 모습은 단지 작품 속 인간 군상만의 모습이 아니다. 올 한 해도 역시 우리가 지독히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소설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때때로 분명하게 독자에게 말을 거는 사라마구의 이 작품은 사실 소설보다는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처럼 에세이에 가깝다. <눈먼 자들의 도시>로 번역된 포르투갈어 원제목 역시 <Ensaio sobre a Cegueira>, 즉 ‘눈멂에 관한 에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는 온 세상이 눈멀었음에도 눈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이 등장한다. 단 한 명의 여인만이 백색실명의 전염병 속에서 눈이 멀지 않은 채 눈먼 자들의 폭력과 불의와 더러움을 목격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없는 채로 자신의 오물로 더러워져 갈 때 오직 한 사람만 타인과 자신의 더러움을 목격하고 그것을 씻으려 애쓴다. 이야기의 또 다른 특이점은 등장인물 중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그렇듯 익명성의 은유는 분명하다. 누구도 아닌 자는 누구든 될 수 있다. 그러니 사라마구의 이야기는 철저한 비유다. 바로 당신이 이 눈먼 자들의 세상 속에서 눈멀지 않은 단 한 사람일 수 있다. 자,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기를 통해 사라마구는 그렇게 묻는다.

사라마구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훈계의 책>의 한 발문, 앞으로의 모든 이야기를 압축한 듯한 다음 발문과 함께 시작한다. “눈이 보이면, 보라. 볼 수 있으면, 관찰하라.” 이것은 지금 눈먼 자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구이기도 하다. 빛과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는 우리들이 이 혼탁한 한 해를 마감하며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눈이 보이는가? 이 세상의 더러움이, 세상의 눈멂이 보이는가? 보인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백성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 4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