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성공회의 본산 웨스트민스터 사원 정문 위에는 ‘20세기의 순교자들’ 10명의 조각상이 있다. 맨 왼편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을 시작으로 다섯 번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지나 여섯 번째 오스카 로메로 신부님 다음에 만나게 되는 인물, 그는 바로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다. 목사로서 또 신학자로서 나치에 저항한 이력으로 처형까지 당한 본회퍼 목사님은 현재 20세기의 순교자들 중 하나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교회 내에서는 꽤나 꺼려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것은 본회퍼 목사님이 취한 극단적인 저항방식 때문이었다. 그분은 단순히 나치에 대항해 반대의 목소리를 낸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 암살 모의에까지 가담했던 것이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서와 같은 이유로 이 목사의 극단적 행동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아무리 정의를 위한다지만 도가 지나쳤다는 것이다.

“어떤 미친 사람이 베를린 대로 위에서 인도로 차를 몰고 있다면 나는 목사로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며 친족들을 위로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차로 뛰어들어 그 운전자를 운전대로부터 떼어놓아야만 한다.”(Wenn ein Wahnsinniger auf dem Kurfürstendamm sein Auto über den Gehweg steuert, so kann ich als Pastor nicht nur die Toten beerdigen und die Angehörigen trösten; ich muss hinzuspringen und den Fahrer vom Steuer reißen.)

이 말은 본회퍼 목사님이 암살 모의 가담과 관련하여 한 말로 전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을 통하여 그가 도를 넘어 보이는 극단적 형태의 저항을 선택했던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만약 히틀러를 계속 그대로 둔다면 끝을 알 수 없는 참혹하고 거대한 살해가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것을 알면서 나는 단지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이유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히틀러 제거 계획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하나 살인자가 됨으로써 수천수만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기회를 방기할 것인가? 단지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을, 혹은 차악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 그럴 수 없다. 나는 기꺼이 죄인이 되어 많은 생명을 살리리라. 아마도 본회퍼 목사님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이유는 결코 신앙의 윤리에 대한 일반적인 규범이 아니며 규범이 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지 그가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만의 이유였다. 그는 밖으로부터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내부로부터 그의 양심을 두드린 목소리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니 적어도 그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으로 자신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가 아닌가의 문제.

우리가 겪어온 바대로 역사의 특별한 시점은 종종 자신만을 위한 특별한 이유를 요청한다. 마치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불현듯 찾아올 역사의 요청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 역시 저 지구 반대편 이국의 목사가 그랬던 것처럼 나만을 위한 이유로 대답할 수 있을까? 본회퍼 목사님 말씀에 묘하게도 작은 기시감이 어리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