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최재석 칼럼
교회의 일에 책임 있는 사람들
최재석  |  jschoi@cnu.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6년 11월 07일 (월) 18:48:32
최종편집 : 2016년 12월 07일 (수) 22:42:16 [조회수 : 158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을 때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고 유지해야 할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에 따라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맡은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기보다는 흔히 남의 눈에 든 들보를 지적하면서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일전에 서울에 있는 Y교회(대형 장로교회)의 교인이 ‘장로의 회개와 당회복음화’라는 제목의 글을 내게 보내왔다(yoshin@yonsei.ac.kr). 그분은 그 교회의 장로들이 목사의 전횡을 방조하거나 목사를 비방한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장로들의 무책임한 행태를 지적했다. 장로들이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 무례하고 악독한 처사, 폭행과 폭언에 대해 회개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로들이 성경이나 교회 헌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가 혼탁해진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가 지적한 Y교회 당회의 문제는 그 교회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면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회에 일이 생길 때 흔히 목사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분은 장로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목사와 함께 교회의 중대사에 관한 안건들을 처리해야 하는 장로들에게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목사들은 교회의 일에 대해서 장로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목사들은 장로들이 그들의 말을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눈에는 비판하는 장로들만 크게 보이고, 순종하는 장로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 순종하는 장로들에게도 목사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장로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S대학교 신학과의 K교수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책임을 전적으로 장로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는 장로들에게 80%, 그들을 뽑은 교인들에게 20%의 책임이 있고, 목사들에게는 ‘아마 1% 정도’의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언급에 대해서 장로들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장로들

장로들을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순종파가 있다. 그런 장로들은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의 실수를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에서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평소에 목사에게 잘 협력하지만 목사가 실수할 경우 그것을 지적하면서 시정을 요구하는 장로들이 있다. 그런데 목사의 언행이 정상적인 궤도를 크게 벗어날 경우 그들은 비판세력으로 변한다. 비판하는 장로들 중에는 실상을 곡해하거나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목사를 막무가내로 비방하는 사람들이 끼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방죽의 물을 온통 흐려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선의를 가지고 목사에게 조언하거나 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우에 그런 것을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목사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신이 영적 지도자라는 권위의식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회 방침이 최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로들의 지적이나 조언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그래서 목사들은 순종파를 격려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장로들이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런 장로들은 치리장로의 사명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장로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외면하는 것은 그들에게 장로의 사명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목사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공부하지 않는 장로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물론 장로가 성경에 대한 이해나 신학적 지식에서 목사를 따라가기 어렵지만, 목사를 보필하고 평신도들을 지도해야 하는 장로들은 목사 못지않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장로가 되기 전에 그런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면, 장로가 된 후에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장로가 된 후에는 특히 교회의 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의 설교나 교회 운영이 복음에 합당한지, 법에 맞는지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서울 강서구에 있는 기독실업인 모임에서는 매주 화요일 아침 조찬기도회를 가지면서 좋은 신앙서적을 쓴 저자들을 모셔다가 그들의 말을 듣고 책을 읽는다. 다른 기독실업인 모임에서는 회원이 줄어들고 노인들만 남아 있지만, 강서지회에서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회원들 대부분이 교회의 장로들과 권사들이다. 그들은 성경이나 신학서적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문제를 다룬 책들까지도 읽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의 수준은 그들을 선출한 국민의 수준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목사의 수준역시 평신도들의 수준과 맞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수준이 높으면 선생은 열심히 교재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교회에서도 장로들을 비롯해서 교인들이 성경을 잘 알면 목사가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신학자는 책을 읽는 목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책을 읽지 않아도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란다. 무조건 아멘 하는 교인들은 틀리게 가르쳐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느 교회의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에는 비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고 그 단어들에서 영적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면서 그런 해석을 영해(영적 해석)라고 말했다. 그 목사는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있는 열왕기상 19장의 기록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천사가 엘리야에게 가져다 준 떡은 말씀이고 물은 기도라고 말했다. 엘리야가 기력을 회복해서 호렙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적 힘을 회복했기 때문이라고, 우리도 엘리야처럼 열심히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영적 힘을 공급받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교인들은 아멘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이런 성경해석이 신앙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 성경 본문의 의미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 문맥에서 보면 천사가 엘리야에게 준 떡과 물은 보통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이다. 성경 본문에서 절망에 빠진 엘리야가 말씀을 묵상했다거나 기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오히려 죽기를 원했다. 기진맥진한 엘리야는 실상 천사가 주는 떡과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해서 먼 길을 갈 수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떡과 물은 비유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문자적 의미대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 류의 설교를 한동안 듣고 있던 장로 한 사람이 목사를 조용히 찾아가서 그런 영해가 오류라는 것은 이미 19세기 말에 지적되었다고 말했단다. 목사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은 많이 망설여지는 일이지만, 영해의 오류를 아는 장로라면 그 목사를 위해서 특히 교인들을 위해서 그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회의 장로들 가운데 영해의 문제점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면, 그래서 그 사실을 목사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장로가 공부해야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성경해석의 예를 들었지만, 교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럴 때 장로가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목사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지만, 교회가 빗나가지 않도록 바로잡는 것이 장로의 책임이다. 왕조 시대에는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충신들이 있었다. 지금 교회에서 목사에게 직언해야 하는 사람은 우선적으로 장로들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일을 눈감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하는 교회를 위한 일이 결코 아니다. 교회에서는 사회보다 훨씬 더 높은 윤리적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사회인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들이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장로직은 목사의 비위를 맞추는 자리도 명예나 권력을 위한 자리도 아니다. 장로직을 수행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장로들은 흔히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목사에게 떠넘기는데, 그러기에 앞서서 그들은 자기가 평신도 대표자로서 책임을 다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목사의 말에 맹종하고 있지 않는지, 나는 목사가 엉뚱한 일을 할 때 올바로 조언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혹은 나는 내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목사를 비방하지 않았는지, 나는 진정으로 이 교회를 위해서 발언하거나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 한다.


일반 교인들

이런 것은 단지 장로들만 할 일이 아니고 권사나 집사들도 유념해야 할 일이다. 교인들은 모든 책임을 목사나 장로들에게만 돌리지 말고 자기들이 복음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교회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무조건 목사를 편드는 것은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를 복음보다 앞세워서 우상화하기 쉽다. 그러면 자기를 우상화하는 교인들을 등에 업고 목사가 오만해지고 죄를 짓게 된다.

어느 신학자는 유한한 사람을 신적인 것에까지 높이는 것을 ‘악마화’라고 불렀다. 그런 일이 행해지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 모두를 자신의 통제 아래 복종시키려 하고, 만일 통제가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목사를 우상화하는 것은 목사 자신을 위한 일도, 교회를 위한 일도, 그 교회에 속해 있는 내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선생을 존경하고 그분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교인들은 목사를 존경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목사가 주도하는 교회 일에 대해서 무조건 목사의 말을 따르기 쉽다. 신앙인에게는 지정의(知情意)가 모두 필요하다. 그중의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정적인 면에 치우쳐서 지적인 분별력을 잃는다.

교인들이 이성적인 분별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요즘 분별력을 잃고 정에 끌려서 무조건 가까운 사람의 말을 따르다가 국정을 망친 대통령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고 있다. 교인들이 정에 끌려서 분별력을 잃으면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개탄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 만약 우리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못 판단하고 기도한다면 모든 일의 앞뒤를 아시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실까? 안타깝게도 교회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목사들

교회 일에 대해서 장로들과 교인들에게 책임이 있지만, 교인들을 지도하는 목사의 책임은 어느 누구의 것보다 더 크다. 목사는 교회 일을 총괄하는 대표자일 뿐 아니라 가르치는 선생이기 때문에 그의 책임은 목사를 도와서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의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교회 정치 체제로 말하면, Y교회 같은 장로교회에서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행정부의 수반에, 장로들이 입법부의 국회의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목사는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목사의 권위는 제왕적 대통령의 것을 능가한다. 이렇게 권위가 있는 만큼 책임도 크다.

목사들은 자기가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실제로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목사들은 순종을 강조하는가 하면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순종을 강조하는 사람은 권위를 탐하는 사람이고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일이다. 영적 지도자는 모름지기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하고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인간은 실수하고 하나님은 용서한다.’고 말했다.

목사처럼 신앙적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외골수로 사고하는 목사들은 마음이 닫혀 있어서 사물을 폭넓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유연성과 균형을 잃는다. 그러면 실수하기 쉽다. 나치스 독일처럼,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악을 행하는 수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을 강조하면서 확신에 차 있었는데,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유럽이 온통 피바다가 되었다.

목사에게는 자기의 사명에 대한 긍지가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만심은 금물이다. 목사는 종교 지도자들이 흔히 자만심의 함정에 빠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명에 대한 긍지가 자만심으로 변할 경우 안하무인이 되고 만다.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겸손할 수 없고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지속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간다. 요즘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많이 언급하는데, 먼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

목사는 독선적인 자세를 버리고 복음에 따라 살려고 힘써 노력해야 한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교인들과 소통하면서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하려고 애써야 한다.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목사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느 장로는 목사에게 직언하면 목사의 눈 밖에 난다고 말했다. 한두 번 직언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알아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의 생각을 재고하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선의에서 하는 조언인지 악의에서 나온 비판인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 약은 쓴 법이다. 요즘 우리는 달콤한 말만 받아들이고 직언의 통로를 차단한 박 대통령이 나라를 온통 혼란에 빠뜨린 것을 보고 있다. 지금 한국의 정국을 보면서 우리는 박 대통령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요즘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목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서 본질적인 선성(善性)으로부터,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벗어나 있다. 기독교인은 실존적 상태를 벗어나서 본질적 상태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인간이 본질적 상태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실존적 상태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인간은 이 두 가지 상태를 왕래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틸리히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의 긴장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본질을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존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망이다. 따라서 목사는 본질을 추구하는 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지만 세상 삶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는 영적인 세계와 육체적인 세계 사이를 오간다. 그러데 복음을 따라 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적인 자리에 머물게 된다. 육체적인 자리에 계속 머물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지적당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여야 할 목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육체적인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교회에 분쟁이 있다면 교회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동시에 교인들을 가르치기도 하는 목사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바울이 여러 교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애쓴 것처럼, 목사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 한다. 목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면서

바울은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서 반복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따라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은 그 은사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를 몸에, 직분 맡은 자들을 지체에 비유하면서 직분자들은 자기를 내세우거나 다른 직분자들을 비방하지 말고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라고 권면했다. 바울이 이렇게 초대 교인들에게 반복적으로 권면한 것은 초대 교회의 직분자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도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갈등이 재현되고 있다. 목사는 장로의 책임을, 장로는 목사의 책임을 추궁한다. 이런 행태에 대해서 예수님은 상대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지 말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네 눈에 티가 있다고 외치면서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삿대질을 한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모든 것이 네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대해서 내 자신은 최선을 다 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의 일에 대해서 목사도 장로도 일반 교인도 모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마음으로 교회를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의 몸이고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그 지체이기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구성원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다.

내게 맡겨진 직분을 권위의 자리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리로 생각하지 말고 오직 청지기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목사에게도, 장로에게도, 일반 교인에게도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다. 우리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과 사랑을 본받아서 오직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믿음의 선배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바울은 자기가 사례비를 받을 수 있었지만 교회를 위해서 자비량 선교를 했다. 그는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나 지식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정한 교회의 지도자라면 그리고 신실한 교인이라면, 주의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내 권리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교회를 위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해야 한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해서는 교회 안에 갈등만 증폭될 뿐이다. 네 탓이 아니라 바로 내 탓이다.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12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