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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이 개 취급당한다면?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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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0월 26일 (수) 19:11:00
최종편집 : 2016년 10월 27일 (목) 14:09:27 [조회수 : 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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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개 취급당한다면?

 

마15:21·~28 ↔ 막7:24~30

   어려운 일로 힘 좀 있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정중히 거절당하기는커녕 거절하면서 당신을 개 취급했다면, 그래서 당신은 생각조차 못했던 개 취급을 당하면서 온 몸이 땀에 젖는 것과 같은 수치심, 모멸감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개 취급을 당한 순간 당신은 당신을 그렇게 취급한 상대방을 어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상대를 어찌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지 않다면 매우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고고한 인품을 갖춘 교양인일지라도 감정이 상할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어떤 원고에 대한 글 내용을 생각하면서 길을 걷다가 그만 모르는 사람과 가볍게 부딪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키도 컸고 덩치도 좋았으나 훨씬 나이가 어려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는데 눈을 부라리며 반말로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말하는 순간,

   ‘아니, 뭐 이런 XXX가 다 있어. 이걸 그냥...’ 그러는 동시에 제 눈에 그의 급소가 한 눈에 확 들어옵디다. 거리도 적당하고....

   하지만 그건 순간적으로 제 속에서 발동되었던 폭발성 감정이었습니다. 이런 폭발성 감정이 종종 솟구치는 경우들이 있음을 저 자신이 인정하고 있기에 저도 늘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날마다 수련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제가 일찍이 취득해서 갖고 있는 이 놈의 신분이라는 것이 점잖은 나이(?)와 겹쳐져서 저에게 ‘인품화’되어 녹아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속으로는 그런 매너 없는 꼴들을 보면 확 솟구쳐 오르는 폭발성을 종종 느낍니다. 그런데 그날 그 순간 저는 자동화된 기기처럼 그 놈을 향해 살짝 꾸벅하면서,

  "아요. 미안합니다. 노안이 오기 시작해서 그런지 잘 안 뵈네요. 아, 그런데 내가 일부러 님한테 부딪힌 게 아니라 서로 부딪힌 건데 나한테만 책임을 돌리시네...." 그랬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덩치의 낯짝을 주시했지요. 그랬더니 그 덩치도 인간의 탈만 쓰고 있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무리 제가 동안이라 할지라도 머릿결도 상당히 희끗거리는 편인데 순간 머쓱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지나쳐 가버리더군요. “아유...저 매너 없는 ~....”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런 기분.... 이번의 본문은 이런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높은 수치심, 모멸감의 폭발성 눈금을 웃돌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의 해결을 부탁 좀 했다가 느닷없이 개 취급당한 어떤 여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졸지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30대 초반의 청년예수로부터 ‘개’취급을 당했습니다(마15:26; 막7:27). 믿음이 좋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있는 내용이니까 그러련~ 하고 지나가시겠지만, 당사자가 되어 이런 개 취급을 당했다면, 글쎄요....... 참으로 인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고도의 인격을 갖추신 분들에게야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에 나타나는 글을 읽으면 내용이 공통입니다. 하지만 두 본문을 대조하면서 읽을 경우 마태복음이 마가복음보다 내용이 길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이방여인을 개 취급을 하는 유대인 청년예수의 말이 완전히 똑같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마15:26; 막7:27)”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유대인은 자녀, 이방인은 개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여인의 반응이 서로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대답의 내용은 같지만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 취급을 당했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옳소이다’ 라고 즉시 긍정함으로서 “당신이 나를 개로 보면 나는 개이겠지요.”라고 맞장구치듯 했던 반응은 두 복음서가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여인의 반응에서 차이가 나는 점을 짚어본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주인의 상’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예수의 주(主) 되심이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라는 표현이 기술됨으로서 상 위의 음식을 먹느냐 상 아래의 것을 먹느냐의 위치는 다를지라도 똑같은 것을 먹는다는 개념이 작용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이에 따라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방인의 주(Lord)이시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가복음에서는 순서나 위치가 유대인이 이방인을 앞선다고 할지라도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에서 평등성, 혹은 보편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개 취급을 당했을지라도 그에 굽히지 않는 여인의 믿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복음 저자는 유대인들에 의한 차별에 굴하지 않아야 유대인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 예수 따르미의 자격이 생긴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여자는 그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았고 그에 따라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다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서와는 달리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예수의 말씀만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말씀에 따라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보니 딸이 나아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순종을 강조하는 마가복음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볼 수 없는 마가복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의 믿음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크다 작다는 표현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의 행함’이 강조되었습니다. 말씀대로의 행함은 말씀에 대한 의심 없는 무한신뢰를 전제합니다. 말씀에 따라 집에 가 봤더니 딸 아이가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마가복음과는  다르게 마태복음에서는 말씀효과의 즉시성, 말씀의 즉각적인 효력이 강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이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그 시점에서 그녀의 소원이 이루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은 예수’께서 왜 이방여인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방을 선택하지 않으신 것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예수께 나아와 예배드리며 도움을 요청할 경우 거절하지 않으시고 받으십니다.

   마15:25의 ‘절하며’는 예배드린다는 뜻을 갖는 용어입니다. 마2:11의 ‘경배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마4:9,10).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동아리 집단인 것처럼 보이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공동체에 선뜻, 그리고 쉽게 들어와 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방인들은 머뭇거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교회 문턱을 무시하고 예수께 나와 예배하는 사람들을 모두, 기꺼이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개 취급당하는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처럼 예수께 예배드리면서 인생문제를 갖고 나와 호소할 경우 그 사람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기만 할 뿐 사실상 개처럼 짖어대기만 하는 외식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 자신의 믿음에 대한 보상을 넉넉하게 받게 된다는 마태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이와 같이 성서의 이적사건 이야기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된 말씀자료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이적사건들을 읽을 때에는 본문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적사건은 지상의 예수께서 실제로 행한 설명할 수 없는 비물리학적, 반자연법칙적 사건을 있었던 사실 그대로 적어 놓은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패역한 세대를 침다운 믿음으로 살아내시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도록 믿음 안에서 수고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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