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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하나 밝혀놓고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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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10월 13일 (목) 23:47:11
최종편집 : 2016년 10월 13일 (목) 23:50:12 [조회수 : 6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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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잘들 지내고 계신지요? 빨갛게 물들어가는 산을 볼 때마다 나무들의 마지막 정념을 보는 듯해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나무들은 이제 차가운 바람과 졸가리만으로 맞서야 할 겨울을 내다보며 구조조정에 나서겠지요?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혹독한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줄기를 떠나 땅으로 굴러내리는 낙엽, 그 홀가분한 추락이 부럽기도 합니다. 지금은 안으로 거둬들여야 할 때입니다. 늦은 밤, 사위가 고요한 때 서재에 촛불 한 자루를 밝혀봅니다. 바람조차 없는 데 조금씩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다가 윤동주의 '초 한 대'가 떠올랐습니다. 창작일이 1934년 12월 24일로 되어 있으니까 시인이 18살 때 쓴 시입니다. 그것도 성탄절 전야에 쓴 것입니다. 다소 미숙한 것 같기도 하고 관념기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윤동주라는 사람의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祭物)을 보았다."

 

시인은 어둑어둑한 방안을 밝힌 촛불 앞에 앉아 있습니다. 파라핀이 녹는 냄새가 은은하게 방을 가득 채웁니다. 촛불이 일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시인은 문득 그 초가 '광명의 제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시인은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 제물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벌거벗기운 채 십자가에 못 박힌 분입니다. 시인의 심상 속에서 예수는 염소의 갈비뼈처럼 야윈 모습입니다. 녹아내리는 촛농을 바라보며 시인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모순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은 채 당신의 몸을 불살라 세상을 밝히는 그분을 떠올립니다.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는 그 무너짐을 통해 세상에 빛을 가져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납니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나의 방에 풍긴/제물(祭物)의 위대(偉大)한 향(香)내를 맛보노라."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성탄절 전야에 예수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역사의 어둠이 온 겨레를 집어삼키고 있을 때 예민한 시인은 탄생 속에서 죽음을 보고, 죽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보고 있습니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는 세상의 유한한 것 안에 무한이 깃들어 있고, 무한한 것 속에 유한이 잠재성으로 깃들어 있기에 신 안에서는 모든 모순이 통일된다면서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주장했습니다. 윤동주가 그의 사상을 알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는 시인의 직감으로 예수의 탄생과 죽음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촛불은 이상하게도 사람들을 일상과는 다른 정서 속으로 이끌어 가곤 합니다. 정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보면 사람들은 성인들의 이콘 앞에 촛불을 밝히고 말없이 그 앞에 머물곤 합니다. 촛불의 어떤 면이 사람들을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으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가스통 바슐라르는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주홍빛은 불끈 일어선다"는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구를 빌어, 고독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촛불의 불꽃은 수직성에 대한 모든 몽상을 준비한다고 말합니다. 바람이 불면 일렁일 수밖에 없지만, 촛불은 기어코 몸을 세우곤 합니다. 비루한 삶에 지쳤던 사람들은 촛불을 보며 자기 마음을 다잡는 것일까요? 촛불은 우리 영혼을 본래의 자리로 부르는 전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촛불은 어둠과 밝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밝음은 사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밝음 속에서는 사물의 신비도 영혼의 깊이도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낮은 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낮을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라고 한다면 밤은 감성과 상상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접혀진 우주'의 그 드러나지 않은 부분, 곧 어두운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만 열리는 세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촛불 앞에 앉는 순간 우리는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선에 서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둠을 한사코 피하려 하지만 어둠을 어둠답게 맞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피상성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살다보면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둔 밤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느닷없는 사고, 실패, 이별, 권태, 고독, 허무, 질병…. 이것들은 그야말로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빚쟁이처럼 용케도 찾아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곤 합니다. 셈을 하라는 것이지요. 괴롭고 힘겹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이런 손님들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깊음을 머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먹감나무는 아이들의 돌팔매로 입은 상처나 바람에 찢긴 가지를 통해 들어온 물기로 인해 속으로 검은 무늬를 만들어냅니다.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것이지요. 성숙한 삶이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가르멜 수도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1542-1591)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이끌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그 낯선 손님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우리 영혼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는 영혼의 캄캄한 밤은 다름 아닌 끊음이요, 씻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모든 것을 끊고 씻어버리는 기회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모든 욕심을 비워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영혼에 찾아오는 '어둔 밤'은 행운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기왕 촛불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를 흔히 '빛의 화가'라고 부릅니다. 그때까지 빛의 오묘한 조화를 렘브란트처럼 잘 사용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일 겁니다. 흑백으로 표현된 그의 에칭화 '엠마오로 가던 길', '엠마오에서의 식사', '그가 그들에게서 사라지다'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합니다. '엠마오에서의 식사' 장면은 참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시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봅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한 사람은 깜짝 놀라 모자까지 떨어뜨립니다. 다른 한 제자는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경외심에 가득 차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정작 내 시선을 끄는 것은 다른 장면입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환은 식탁에서 벌어진 일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사환의 뒤를 따르던 개 한 마리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대개 그 사환이나 개처럼 무덤덤함 속에서 지나갑니다. 절망이 없다면 희망도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도 없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적 의미로 충만한 세상을 살면서도 그 사환과 같은 시선으로 살아갑니다. 

탁자 위에 고요히 밝혀진 촛불은 우리 영혼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지만, 광장에서 집단적으로 밝혀진 촛불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촛불은 때로는 거대한 함성이 되어 거리를 가득 채웁니다. 촛불은 권모 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 문화 속에서 정치를 영적인 사건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광장에 밝혀진 촛불은 역사의 방향을 오도하려는 이들에 대해 발화된 '아니오'입니다. 그 불빛은 거세게 불어오는 폭력의 바람 앞에서 늘 위태롭지만, 역사는 그 불빛이 결코 소멸될 수 없음을 증언합니다. 제2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족들에게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들려주며 희망을 북돋웠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사42:2-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철저한 낙관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현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서 사람들은 회색일당에게 시간을 팔아먹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 영혼을 팔아 부유함을 사고 있습니다. 돈 많은 이들 가운데는 피고용인들을 존엄한 인격으로 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 '나와 그것'의 관계가 들어서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현전하여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못하고 수단으로 보는 순간 인간 소외가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도 비인간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들, 좀비처럼 변해버린 이들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묻지마 범죄 혹은 혐오 범죄가 속출하는 이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등불'을 밝혀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우리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로지 마음을 정미하고 전일케하여 진실로 그 가운데를 굳게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요는 정치 자금이나 유의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가운데를 굳게 잡으라'는 말 한 마디만 해주었습니다. 집중(執中)이라는 단어는 집중(集中)과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다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의 마음은 온통 영광의 나라에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에 쏠려 있었습니다(集中). 세베대의 아내는 자기 아들들에게 좋은 자리를 보장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드는 일에 쏠려 있었습니다(執中).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의 삶을 요약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와 '아힘사'(ahimsa)가 그것입니다. 사티아그라하는 수동적 저항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은 진실 혹은 본질(satt)을 굳게 붙잡는다(graha)는 뜻입니다. 진리를 굳게 붙잡은 사람은 아힘사를 실천하게 되는데, 아힘사는 '불살생'이라는 뜻입니다. 아힘사를 실천하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지극히 작은 생명 하나라도 살해하지 않고 그것을 구해주려고 애쓰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게 자비이고 긍휼입니다.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은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진리에 사로잡힌 이가 선택할 수밖에 없던 길입니다. 

예수 운동 또한 비폭력 저항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를 해치는 대신 세상의 모든 슬픔과 죄와 모순을 당신의 몸으로 받아안으셨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폭력의 고리를 당신의 몸으로 끊어내셨습니다. 다시금 윤동주의 시 '초 한 대'로 돌아왔습니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몸'이었지만 예수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살라 시대의 어둠, 세상의 어둠을 밝혔습니다. 시대의 어둠을 거스르며 산다는 것은 정말 아름찬 일이지만 예수는 그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먹고 사는 일이 제 아무리 분주하다 해도, 참 사람의 길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을 자꾸 외면하다 보면 우리 또한 좀비처럼 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괴로웠던 사나이,/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 부분) 하고 노래했던 윤동주가 새삼 그리운 나날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가려들으면서 오늘도 내일도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평강을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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