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 성서이야기
이런 예수를 믿으라 한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6년 09월 28일 (수) 15:38:36
최종편집 : 2016년 10월 02일 (일) 02:21:19 [조회수 : 5841]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이런 예수를 믿으라 한다

   당신이 지금 믿고 있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본주의를 운운하며 마치 자신의 믿음만이 정통인양,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는 인간중심적이며 세상 중심적이라고 비난하는 몰상식적인 당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예수입니까?

   이에 대해 마태복음 저자가 15장의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을 통해 증언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서 증언되는 “이런 예수를 믿으라”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로부터 세례요한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습니다(14:12). 그런데 세례요한이 언제 참수되었느냐 하면.... 헤롯의 생일잔치 때였습니다(마14:10~11).

   그렇다면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헤롯의 생일잔치에 비교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헤롯의 생일잔치는 왕궁에서 소수가 참여하여 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희희낙락 하던 중에 사람을 죽이는 참수사건이 벌어진 잔치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했던 자들은 왕궁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었으니 넉넉하고 충분히 배부르게 식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소반에 얹혀 있는 세례요한의 잘린 머리가 생일잔치 자리 현장에서 확인되는 순간(14:8,11), 먹었던 음식에 체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헤롯궁에서 왕의 생일 잔칫날 소수가 모인 특별한 식사자리의 음식들은 신하들도 웬만해서는 평일에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는 음식들이었을 겁니다. 그런 날 그 생일잔치 자리에서 유명인사가 참수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주재하신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어떤 식사였습니까?

 

①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서빙을 받았던 식사

   먼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이 서빙 한 음식을 나누어받아 함께 먹었던 식사지리였습니다(14:19b). 헤롯 궁에서 벌어진 왕의 생일잔치에 나온 음식에 비한다면 볼품없는 식사였음이 매우 분명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열두 제자의 서빙을 받으면서 치유된 사람들과 함께 나눈 건강한 생명의 식사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배불리, 넉넉하게 먹은 식사였고 행복한 식사였습니다. 훌륭한 요리를 제공받는 중에 멀쩡한 사람의 목이 잘리는 자리가 아니라 멀쩡하지 못했던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아 건강해진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졌던 식사자리였습니다. 그것도 적은 것으로 시작하여 풍성하게 남게 된 그런 식사였습니다.

   그것은 천국식탁이 어떤 자리인지를 나타내 줍니다. 소수가 즐기는, 그러나 참혹한 지옥식탁이 아니라 대형 군중이 아무런 차별 없이 배부르게 음식을 나누되 제자들이 서빙 하는 음식을 받음으로 하나가 된 천국식탁이 예수께서 베푸신 식탁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을 통해 ‘이런 예수를 믿으라’고 증언하는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병신(病身:병든 몸 강조)도 제자들의 서빙을 받으며 먹게 하시는 이런 예수를 믿으라”

   당신의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만 끝까지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사회 변두리 인생들, 버림받은 존재들이라는 자괴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마저도 끌어안고 제자들의 서빙을 받으며 풍성히 먹게 하시는 천국식탁의 주인예수입니까?

 

2.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서 증언되는 “이런 예수를 믿으라”

   마15:29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바닷가)의 어느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셔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장소에 대한 표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산에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데가볼리 쪽 갈릴리 호숫가의 어느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되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막7:31). 장소가 호숫가로 생각되도록 되어 있으므로 갈릴리 호수를 배경삼아 넓게 펼쳐진 평지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문학적 허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갈릴리 지역은 마가복음의 데가볼리 지역과는 다르게 헤롯 안디바스가 지배했던 지역인데 반-로마 쿠데타가 발생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 입장에서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다가 다시 또 사천 명이 운집했다는 것은(15:38)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서와는 다르게 갈릴리 쪽 호숫가의 어느 산에 사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을까요?

   마태복음은 친-유대적 성향과 함께 친-이방적 성향도 강하게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의 교회 안에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상당수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줍니다. 그렇기에 마태복음이 갈릴리를 강조하는 것은 그 성향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갈릴리는 이방지역으로 분류된 지 오래되었습니다(마4:15; 사9:1 비교참조).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양방향성의 경향을 고려해 볼 때 갈릴리 호숫가를 말하는 것은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괄하는 문학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명 안에 두 범주가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본 대로 오천 명 식사이적 시간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내용이었다는 것에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그에 반해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사건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한 번은 유대인을 위한 식사, 다른 한 번은 이방인을 식사가 베풀어졌다는 구도가 생깁니다.

   실제로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나타나는 숫자들과 ‘광주리’라는 단어는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나타나는 숫자들과 ‘바구니’라는 단어에 비교됩니다. 이런 문학적 특성에 비추어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이방인을 위한 식사이적 사건이었다고 보게 됩니다.

 

②이방인도, 이방인 여자도, 어린아이도 다같이 한 자리에서 차별 없이 나눈 식사

   한편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이방여인을 위한 치유이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 마태복음의 친-유대적 성향이 매우 농도 짙게 나타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15:24)’는 표현은 친-유대적이면서 상대적으로 반-이방적 언어라고 판단됩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 몹시 격분할 만한 경멸적인 언어임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여성차별적인 모욕적 언사도 나타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15:26)’는 말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유대백성을 가리킬 터이고 ‘개들’은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말을 유대인 청년 예수가 딸의 치유를 위해 나아온 여인에게 내뱉듯이 말했으니 여인의 입장에서 견디기가 매우 어려운 언어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방여인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의 말씀과 함께 소원을 이루는 복을 받았습니다(15:28).

   여기서 ‘이런 예수를 믿으라’는 마태복음의 선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이런 예수를 믿으라”

   당신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사람을 등급 매겨 대하시는 신입니까? 그래서 당신도 사람을 대할 때 겉모습으로 판단합니까(약2:1~4 비교참조)? 당신은 예수의 마음으로 예절을 갖추어 사람을 공평하고 평등하게 대합니까?

   혹시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불공평하게 대하거나 억울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한쪽으로 치우쳐 공평하지 못하게 무조건 편들어 다른 사람에게 원성을 사는 일은 없습니까?

 

3.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서 만나는 마지막 날의 예수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치유하셨는데 그들이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14:14). 그러나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서는 치유받은 병자들이 어떤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지를 말해줍니다(15:30~31).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런 질병들은 종말에 이르렀을 때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을 알리는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사29:18~19; 35:5~6).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방인들을 상대로 식사이적을 베푸시기 직전에 예수께서 이와 같은 치유이적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놀라운 치유이적 사건을 목도한 무리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시72:18~19 참조).

   특이한 사실은.... 이와 같은 종말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무리가 예수와 함께 했던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는 점입니다(15:32). 이것은 분명하게도 그 내용이 비역사적이라는 사실을 또 다시 보여줍니다.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라는 말은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어도 너덧 끼니 정도의 먹거리를 갖고 예수와 함께 동행했다는 뜻을 전제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어른들은 먹거리가 없어서 두어 끼니 굶은 채 사흘 째 되는 날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어린아이들마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또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라는 표현은 적어도 일만 명 이상의 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가정단위로 갈릴리 호숫가의 어느 산이 위치한 광야에서 예수와 이틀 밤을 함께 숙박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온 식구가? 이틀 밤을 산이 있는 어느 광야에서? 가족단위로 헤롯군대에 몰살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선명하게 그려지는 구약적인 그림을 보게 됩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함께 산이 있는 광야에서 생활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산이 있는 어느 광야에 함께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 과연 어떤 예수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사흘이라는 날수는 부활을 나타냅니다(16:21; 17:23; 20:19). 사흘째 되는 날 종말의 때에나 있을 치유이적이 발생했고 기천 명의 사람들이 식사이적을 통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께서 주재하시는 풍성하고 넉넉한 천국식탁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사천 명 식사이적을 통해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 과연 어떤 예수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를 지금 실현시킨 부활의 예수를 믿으라”

   마태복음은 예수를 잘 믿다가 죽으면 가게 된다고 관습화된 것처럼 회자되는 ‘저 천국,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천국(하늘나라)은 생전에 예수 잘 믿다가 죽게 되면 가는 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만일 마태복음이 말하는 하늘나라가 예수 잘 믿다가 죽으면 가게 되는 저 천국이라고 생각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3:2; 4:17....etc.)’는 말씀은 ‘너희들 이제 곧 다 죽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말씀인가요?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나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을 지상예수의 활동 중에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 한 점 오차 없고, 일획도 틀림없는 사실 그 자체라고 본다면 마태복음의 “나는 이런 예수를 믿는다”는 생생한 증언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도 마찬가지이거니와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을 통해 마태복음이 전하는 “이런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을 “예수를 믿는 나”의 입장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될 수 있습니다.

1.나는 제자들의 봉사를 통해 풍성히 먹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2.나는 부당하게 차별하거나 억울하게 대하는 일이 절대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3.나는 지금의 고통스런 삶속에서 천국을 살게 하시는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광야 같이 재미없고 외롭고, 어떤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이 덧없게 지나가기만 하는 것 같은 고난의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갈 때에 부활의 주께서 허락하시는 생생한 천국의 현장을 지금 여기서 넉넉히 누리며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박경은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다림줄 (1.220.214.84)
2016-09-29 09:32:11
프레임에 갇힌 자를 구원하는 예수
자신이 만든 프레임을 벗어나라 한다.
그래야 자유하다고
리플달기
5 6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