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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인가?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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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9월 09일 (금) 00:00:31 [조회수 : 6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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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er)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오리지널'로 태어나 '카피'로 사는 것이 타락이라 했다. 옳다. 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앞서 바른 길을 걸어간 이를 모방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many ways)이 있지만, 우리에게 예수는 '그 길'(the Way)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는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10:10) 이 단호한 한 마디 속에 예수를 추동한 삶의 원리가 담겨있다. 그는 자기 앞에 현전하여 있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존재'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만나는 이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존재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자들의 기쁨이 있었다. 자기 욕망 주변을 맴돌며 살던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며 살면서, 우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타자들 속에 숨겨진 신적 광휘를 보았다. 예수가 있는 곳에서 거룩과 속됨,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경계선은 철폐되었다. 경계선을 만듦으로써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체제의 토대를 흔드는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제국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민한 정치가인 빌라도가 몰랐을 리가 없다. 불의의 공모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스탠리 하우워어스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한나의 아이> p.375)이라고 말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2,3).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제기한 신학적 문제를 삶의 문제로 바꿔놓고 있다. 어차피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붙들려서 고통 당하는 사람의 현실을 해석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그를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불의를 획책하는 이들과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시스템이 있다. 그것을 철저히 파헤치고, 더 이상 그런 불의가 작동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은 지금 여기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이 가끔은 붙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른다. 예수는 그 짐을 벗겨주기는커녕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신다. 예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덕이는 이에게 십자가를 지라니 너무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신앙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삶의 매순간이 제기하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예수는 그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예수라는 푯대를 향해 걷기 시작할 때, 비록 흔들릴 수는 있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그 길이 진리라고 고백할 것인가는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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